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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May 30. 2020

만약 그 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엘레나 페란테 나폴리 4부작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을 읽는 내내 나는 흥분해 있었다. 한 권을 다 읽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새벽 늦게까지 책 읽기를 그만두지 못하고 소파에 나와 앉아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책을 읽었다. 단숨에 권을 모두 읽고 이야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 한 채 한참 동안 레누와 릴라가 걸어 다녔을, 내가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이탈리아 나폴리를 상상하며 그 언저리에 머물러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되돌아봤다. 그리고 어느새 내가 이야기 속의 레누가 되어서 릴라와 대화하고 있었다. 헝겊으로 만든 인형을 가지고 놀던 어린 여자아이가 육십이 넘은 할머니가 되어 사라진 친구로부터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어린 시절의 그 인형을 돌려받으며 마무리되는 두 친구의 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아마도 여자로서 비슷한 과정을 거쳐온 내 인생을 돌아봤던 것 같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 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인생을 먼저 살아온 여자 사람으로서 아직 어린 레누에게, 십대의 레누에게, 스물의 레누에게, 결혼을 앞두고 있는, 아이를 낳고, 다시 첫사랑을 만나 결국 자신의 결혼을 끝내는 레누에게 뭐라고 자꾸 말하고 있었다. 자꾸 뭐라고 말했던 대상이 이야기 속의 레누였지만 사실은 그 옛날 나였다. 나는 레누와 릴라의 이야기를 통해 예전의 나를 만나고 있었다. "만약 내가 그 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나에게 하면서. 책을 읽는 내내 그 질문의 정확한 대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내 인생의 후회일 수도 있고 아직까지도 제대로된 답을 알 수 없는 답답함일 수도 있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삐죽삐죽 솟아나고 있었다.



1. 게으른 사람은 소설을 쓸 수 없다.

나는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외국작가의 소설을 즐겨 읽지 않았다. 번역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방의 언어로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활자로 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시각화하며 받아들이기에는 내 상상력과 이해력이 충분치 않았다. 책 읽기가 뚝뚝 끊기곤 했다. 독서는 쾌락이라고 했는데 소설을 읽으며 인지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는 괴로움을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와 같은 문화와 모국어를 공유하는 국내 작가의 작품이 넘쳐나는데 굳이 이해력의 한계를 느끼며까지 외국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었다. 나의 소설 읽기는 한동안 국내 스타 작가에 한정되었다. 눈에 띄는 국내 작가가 있으면 그의 작품을 모조리 읽고 더 이상 읽을 그의 소설이 남아있지 않으면 또 재미있는 소설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는 것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신경숙을 읽고, 은희경을 읽고, 공지영을 읽고, 윤대녕을 읽고, 김훈을 읽고, 한강을 읽고, 김영하를 읽었다. 스타 소설가의 소설을 편식하듯 읽으면서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국내 메이저 출판사의 공모에 당선되어 책을 출판하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소설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처럼 되고 싶은 열망에 비해 나의 글쓰기는 게을렀고 나의 재능은 비루했다. 무언가를 써내고 싶은 마음이 생리주기에 따라 뿜어져 나오는 호르몬처럼 들쑥날쑥했다. 내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내 게으름에 항복한 나를 발견하며 소설을 생산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비통함을 모두 희석시키고 소설을 소비하는 즐거움이라도 온전히 즐기겠다 마음먹은 후에야 비로소 외국작가의 소설이 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주제 파악이 늦은 어리석은 아집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게으른 사람은 소설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엘레나 란테의 나폴리 4부작은 나의 편협한 소설 읽기를 한 번 더 비웃어 주었다. "어때? 삶은 다르게 또 똑같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지? 너는 그 이야기를 놓치고 있었어."라고. 다른 곳에서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나와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나는 그것을 다 알아듣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활자를 머릿속에서 시각화할 필요도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단 한 문장도 없었다.


2. 첫사랑, 이상화된 대상에 대한 환상은 위험하고 또 위험하다.

레누는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새 교과서 살 돈이 없는 가난한 집의 맏딸인 레누는 부자 남편을 둔 친구들이 요양 차 머무르는 섬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도우미가 되어 여름 한 철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 섬으로 니노가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심지어 스스로에게 조차 그 섬에서 여름을 보내야 하는 이유를 여러가지로 둘러댔지만 레누에게 이스키아 섬은 니노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좁은 방에 머물며 친구들의 도우미로 청소를 하고 식사준비를 돕고 주말에는 아내를 찾아온 남편들이 성욕을 해소하는 소리를 들어가며 레누가 그 곳에 머물기로 결심한 것은 니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가 그 섬에 머무를지도 모르기때문에. 그러나 그곳에서 니노와 사랑에 빠진 것은 레누의 친구 릴라였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내가 아닌 다른 이와 함께 있을 때 더 빛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이와 함께 인생을 계획하며 행복한 것을 바라보는 것은, 게다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친구라면 심장이 매 순간 난도질 당하는 기분이리라.


그러나 청춘의 수 많았던 밤 나를 불면으로 이끌었던 날카로운 고민들이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듯이 첫사랑에 대한 환상도 아픔도 그렇게 무뎌져 하나의 의미가 된다. 레누에게 니노는 처음으로 마음에 담은 이성이었고, 고백하지 못한 사랑이었고, 친구와 사랑의 도피행각를 벌인 그러나 그들의 사랑이 파국으로 끝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고통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응집된 대상이 니노였기 때문에 실제의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채 레누에게 니노는 절대적인 의미가 되었다. 그 모든 것의 우선 순위에 있는 절대적인 의미. 그런 그가 나타나 그녀의 삶을 뒤흔들어 놓는다. 소설을 출간하고 배경 좋은 집안의 남자와 결혼하여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적당히 권태롭고 적당히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레누에게 니노와의 재회는 균열의 시작이었다.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그러면 안된다고, 그는 네가 원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책을 읽으며 나는 레누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한낱 독자인 내가 그녀의 삶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독자인 나의 애끓는 바람따위는 상관없이 결국 레누는 자신이 뜨겁게 사랑한 적은 없지만 사회적으로는 인정받는 교수 남편을 떠나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된다. 그리고 부자 아내와 절대로 이혼할 것 같지 않은 니노와 연애를 시작한다. 그의 아이를 낳고 그가 늙은 가정부와 벌이는 충격적인 정사 장면을 목격하고 나서야 니노를 떠난다. 절대적인 의미가 사라지고 드디어 니노의 실체를 확인하는 레누. 그토록 오랫동안 그녀를 매혹시켰던 니노는 원래부터 그런 쓰레기같은 인간이었는데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에 대한, 그 절대적인 의미에 대한 그녀의 환상때문이었다. 이상화된 대상에 대한 환상은 얼마나 위험한가! 위험하고 또 위험하다.

  니노의 선택은 언제나 니노의 야망과 연관이 있었다. 엘레오노라와 결혼한 것도 그만큼 얻는 게 있어서가 아니었던가. 나 역시 니노 때문에 피에트로와 헤어졌을 때 중요한 출판사와 연관이 있었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성공한 작가가 아니었던가. 그런 내 배경은 니노의 경력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니노를 도와준 다른 여자들도 결국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물론 니노는 여자를 좋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선호했다. 니노의 지성이 만들어낸 산물은 소년 시절부터 그가 정밀하게 짜 온 권력의 그물망 없이는 스스로 빛을 발할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릴라는 어떠한가. 릴라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데다 상점 주인의 젊은 아내일 뿐이었다. 스테파노가 릴라와 니노의 관계를 눈치챘다면 둘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니노는 왜 릴라와의 사랑에 미래를 걸었던 걸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p.563~564)  


3. 우정, 질투와 위로의 동행

초등학교를 졸업한 레누와 릴라는 서로 다른 길을 간다. 레누는 헌 교과서를 구해 상급학교로 진학하고 릴라는 구둣방을 하는 아버지의 가게일을 도우며 멋진 디자인의 구두를 만들어 가업을 번듯하게 일으키려는 꿈을 꾼다. 레누에게 릴라는 의지하고 위로받고 싶은 소중한 친구이자 질투의 대상이다. "나보다 휠씬 뛰어난" 릴라에게 익숙해지기 위해 릴라의 제멋대로의 방식에 자신을 길들였던 레누. 무엇이든 마음 먹은 것은 해내고 마는 릴라에게 레누가 힘들게 애써 이루어낸 것들이 너무나도 쉬웠다. 상급학교에 진학해 잠을 줄여가며 겨우 겨우 이해한 그리스어 문법이든, 레누는 그저 조심스럽기만 했던, 고등학교 선생님의 상류사회의 파티든 릴라는 그 모든 것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너무도 간단하게 받아들였다. 릴라가 인생에서 간단히 받아들일 수 없고 스스로도 어쩔 수 없어 힘들었던 것은 가난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그 선택마저도 최선이었던) 결혼이 그녀에게 폭력적이었다는 것 뿐이었다. 적어도 엔초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잃어버리기 전까지. 그래서 레누는 자신이 출판한 책이 성공한 이 후에도 릴라를 생각한다. 릴라라면 어땠을까? 릴라가 나처럼 대학 교육을 받고 책을 쓸 수 있었다면 나보다 더 좋은 책을 출판하지 않았을까? 내가 쓴 책을 릴라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이 질문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명징한 대답을 하는 친구 릴라를 진정으로 아낀다.


레누를 아끼는 것은 릴라도 마찬가지다. 릴라는 레누가 "누구보다 눈부신 친구가 되어야 한다"며 레누를 응원하고 보호한다. 자신때문에 남편과 이혼한 레누와 연애를 하면서도 (이 망할 놈의)니노는 릴라에게 끊임없이 구애한다. 그럼에도 이 모든 사실을 레누에게 함구하는 릴라. 남들이 보기에 멀쩡한 결혼생활을 유부남때문에 끝낸 레누를 친정엄마마저도 비난하고 돌아서는 상황에서 그녀를 지켜주고 싶어 니노의 거지같은 추근댐을 비밀에 붙인다. 인생의 동반자이자 동업자인 엔초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아이가 실종되어 그 아이의 행방을 알지 못해 반 쯤 정신이 나가있던 릴라. 내 딸은 어디로 갔을까? 수 백가지 추측과 상상을 하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스스로에게 이해시키려는 릴라. 그런 와중에 어쩌면 레누의 책 출간에 맞춰 우연히 딸아이와 레누가 함께 찍힌 사진때문에 '레누의 책에 앙심을 품은 누군가 내 딸을 레누의 딸인 줄 알고 데려가지 않았을까?' '레누에게 고통을 주기위해 내딸을 데려가지 않았을까?' 의심하면서도 레누에게 내색없이 우정을 지켜낸 릴라. 감히 나는 말 할 수 있다. 자식을 잃은 어미가 어쩌면 자신의 자식을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간 원흉일지도 모를 대상에 대해 그 정도의 자제력을 발휘하기란 극도로 어렵다는 것을. 그만큼 레누와의 우정이 릴라에게 극한의 상황에서도 지켜내고 싶은 것이었다는 것을.

  릴라는 지적이었지만 이를 활용해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돈이란 저급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귀부인처럼 자신의 지성을 허비했다. 니노는 바로 릴라의 이런 점, 즉 대가를 바라지 않는 릴라의 지성에 매료되었다. 이러한 릴라의 특성은 다른 수많은 여성과 차별되는 것이었다. 릴라는 그 어떠한 가르침이나 필요 또는 목적에 굴복하지 않았다. 릴라를 제외한 우리 모두에게는 무언가에 굴복했던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통해 시험과 실패와 성공을 겪고 나서 우리 자신을 현실에 알맞게 재조정했다.
  릴라는 달랐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릴라를 바꾸지 못한 것 같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릴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제멋대로인 데다 우매해지고 있지만 릴라에게 부여한 능력은 변치 않을 것이다. 오히려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해질 것이다.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p.564~565)
릴라는 구제받고 싶어 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였다.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p.565)



자기중심적인 내가 읽은 책이나 본 영화에 대해서 글을 쓰겠다고 생각할 때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들고 싶을 때인 것 같다. 그 책이나 영화를 읽거나 본 후에 감동받아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그 책과 영화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깊이 감동받은 동시에 그것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참지 못하고 결국 글로 무언가 떠들어 대는 감상문을 쓸 수 밖에 없는 작품을 만나면 참으로 반갑다. 엘레나 페란테의 작품은 그런 작품 중 하나이다. 감동적이면서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은 책. 나폴리 4부작 네 권의 책을 모두 읽은 것은 지난 가을이었다. 그럼에도 이제야 감상문을 쓰는 이유는 나의 글 재주없음과 게으름때문이다. 게으름은 반성하고 재주없음은 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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