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에게는 대학 때부터 친한 친구 세 명이 있다. 이 남자 네 명은 대학 일 학년 때부터 기숙사 한 방을 써서 스물의 시절 서로의 속 사정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이 기숙사는 위계질서 속 선후배 사이의 엄격한 상하 관계가 강조되었던 탓에 이들의 가슴에는 똑같은 힘듦을 함께 견디고 통과해 나온 전우애가 지층처럼 쌓여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보송하고 앳된 마음에 흡사 사관학교와 같은 엄격한 규칙과 질서로 인해 불에 덴 듯한 상처와 이 상처를 극복한 굳은살이 같은 곳에 같은 형태로 자리 잡은 이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그들의 관계다. 한 방울의 피도 섞이지 않았지만 피붙이에게나 보내는 절대적인 정서적 공감과 지지를 보내는 관계.
나는 남편과 연애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남편의 친구들을 알게 되어, 이들과 이십 대의 몇몇 기억들을 공유했다. 남자들 만의 끈끈하지만 동시에 무뚝뚝할 수 있는 틈새 자리를 내가 메우고 있었고, 이들은 우리 연애의 달콤하거나 씁쓸한 기억의 한 자락에 띄엄띄엄 자리 잡았다. 그들은 내 남편의 친구이기도 했지만 내 연애의 증인들이었고, 내 아름다웠던 또는 쓸쓸했던 스물의 시절을 함께 보낸 나의 친구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각자 서로의 짝을 찾아 결혼을 했고 스물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진 서로의 모습에서 여전히 서로의 스물의 모습을 기억해주는 우리를 만나고 있다.
나는 결혼 후 두 아이를 낳고, 둘째가 세 살이 될 때까지는 정말 힘들었던 것 같다. 육아를 하면서 남편과의 대화보다는 남편에 대한 분노가 먼저 치밀어 올랐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서툰 나의 육아에 대한 자괴감이 먼저 밀려왔다. 출퇴근 속 하루하루가 쉼 없이 바쁘게 돌아갔고, 정리되지 않은 서랍을 어쩔 줄 몰라 그냥 닫아버리는 생활이 계속되는 듯 답답했다. 그런 나를 남편은 나름의 방법으로 돕고 있었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그의 도움은 미미했고, 때로 나를 비난하는 듯했다. 남편이 쉬는 날 어쩌다 한 번 청소를 하면 나는 그가 내가 미처 하지 못한 집안 청소를 하였다고 생색을 내며 나의 게으름을 꼬집고 있다고 느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완벽하게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던 나는 시행착오와 실패의 경험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했고 다른 이의 도움을 받는 것이 어색했다. 지금이야 "어머나, 자기야! 이렇게 멋지게 집안을 청소해 놓다니, 칭찬해!" 하며 남편의 기분을 맞추며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줄 수 있지만, 당시엔 두 아이만으로 힘들었기에 성인인 남편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때의 우리는 다툼이 잦았고 같은 집에서 서로를 소 닭 보듯 말없이 여러 날을 지낸 적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참 어리석기 짝이 없는, 혼자만 잘난 줄 아는 멍텅구리였다.
그런 나의 멍텅구리 시절, 남편과 대학 친구들이 식구들을 데리고 모두 다 함께 여행을 가거나 캠핑을 가면 아내들 중에 나이가 제일 많은 나는 장도 봐가고 음식도 해갔다. 가끔씩 만나는 탓에 공통의 화제가 떨어지는 아내들끼리 앉는 식탁에서 분위기를 좋게 하려고 일부러 과장되게 이야기하고,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는 이가 있으면 대화가 끊이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말을 붙였다. 왠지 내가 그런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아내들 중 나와는 많이 다른 사람이 하나 있었다. 다 같이 이야기하고 있으면 피곤하다고 들어가 일찍 자고, 여자들끼리 설거지하려고 하면 자기 남편을 대신 보내고, 다 함께 모인 식탁에서 자기 아이들 입에 들어가는 반찬만 신경 쓰고, 식탁에 차려 낼 줄 아는 음식이라고는 계란 프라이와 소시지 부침 밖에 없는 그녀였다. 사람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빠가 많은 집 막내로 자라 다른 이의 도움을 받는 것에 익숙하고, 체력이 약할 뿐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이해하지만 멍텅구리였던 나는 그녀가 남편에게 무조건 이해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녀가 얄미울 때가 있었다. "오빠, 나 이거 못 하겠어"라고 말하면 그녀의 남편은 "괜찮아. 에잇 이까짓 것 못해 돼!"라며 그녀의 무능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내가 보기에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그녀가 남편에게 무조건적으로 이해받고 사랑받는 것 같았다. 남편의 집들이 손님 열댓 명의 상을 뚝딱 차려내고, 남편 없이 시댁에 가 명절 음식을 다 하고, 맞벌이하며 둘째 어린이집 등 하원도 매일 시키는 나는 남편에게 이해는커녕 비난을 받는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그녀가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는다고 느꼈다. 그리고 세상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동시에 그녀가 부러웠다. 내가 처해있던 상황이 괴롭다 여겨졌기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나의 결핍이 도드라져 보였고, 나의 애씀이 쓸모없이 느껴졌다. 만약 그때 우리가 휴대폰을 모두에게 공개하는 그런 게임을 했다면 내 휴대폰에서는 아마 그녀를 욕하고, 내 남편을 비난하고, 세상에 대한 울분과 분노가 비린내를 풍기며 날것 그대로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그 시절 나의 비밀은 아마도 "나는 불행하다" 였던 것 같다.
영화 "완벽한 타인"을 보며 남편의 대학 친구 모임이 생각났다. 현실감 넘쳐나는 대사에 공감의 웃음이 터졌다. 비밀을 감춘 친구들, 그러나 '사람의 본심은 월식과 같아서 잠깐 가릴 수는 있어도 언젠가는 드러나게' 된다는 영화 속 대사와 같이 비밀을 갖고 바뀌지 않는 '개인적' 그리고 '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들. 그리고 그들이 하는 게임. 이 영화를 보면서 휴대폰을 모두에게 오픈하는 게임을 하는 것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진정한 영화적 장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은 바로 남편이 집들이를 위해 자신의 고향 음식을 준비하는 장면이다. 스무 살의 딸에게 콘돔을 챙겨주고, 멀어지는 아내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정신과 상담을 받는 남편이 현실에 존재하기 힘들 듯, 일반적인 집들이에서는 손님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집안을 정리하는 힘들고 수고스러운 일은 보통 아내들이 한다. 내가 전통적인 성역할이 익숙한 환경에 있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 장면이 몹시 현실과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토요일 오후를 느긋하게 즐기려고 앱으로 다운 받아 "완벽한 타인"을 보며 맥주를 두 캔 마셨다. 나의 그 시절. 순간순간 울분과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견디고 있던 나. 그런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그 시절 나의 불행이 생각났다. 그 시간을 지나왔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지금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위로를 스스로에게 건넸다. 기분 좋은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