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체 없는 무언가.
나 홀로 남겨진 공간.
나 밖에 없는,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
나는 그곳에서도 눈치를 보고 있다.
누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지,
무엇이 나를 주저하게 만드는지.
형체 없는 것들과 싸우는 중이다.
아마도, 그 시작은 고등학교 1학년.
작은 노트북 모양의 전자사전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나도 엄마에게 공부를 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조르고 졸라서 영어사전을 얻어냈다.
그 안에는 '메모장' 기능이 있었다.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사춘기 시절.
종이에 낙서를 하면 흔적이 남고,
흔적이 누군가에게 닿을까 두려웠던 나는
조용한 기계를 가장 안전한 비밀 공간이라 여겼다.
그곳에 나는, 내가 쓰고 싶었던 글들을 적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나만의 작은 세계였다.
어느 날, 서랍 속 나의 영어사전이 사라졌다.
말없이 빌려간 그것은,
나와 친하지 않았던 같은 반 아이들의 손에 있었다.
그들은 내가 홀로 적어 내려간 문장들을 발견했다.
사실 별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만의 시나리오.
조심스럽게 꿈꾸고 있던 이야기.
그런데 그들은 비웃었다.
그때부터, 나의 자아는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나는 작아졌다.
무언가를 쓰는 일,
나를 드러내는 일이 두려워졌다.
지금은 안다.
내가 무엇을 하든 눈치 줄 사람은 없다는 걸.
하지만, 내 안의 나는 아직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
누군가는 교복을 입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말하지만,
나는 아니다.
오히려 그 시절을 지우고 싶다.
돌아가서 바꿀 수 있다면, 바꾸고 싶다.
그날의 기억들을.
나는 오늘도 눈치를 본다.
종이에 끄적거린 말들을 누가 볼까 봐,
그 위를 새까맣게 덧칠한다.
작은 고양이 그림에도, 토끼 그림에도
그 위에 나의 주저함이 덮여 있다.
흔한 SNS에서도 나를 드러내기 쉽지 않았다.
누가 볼까, 또다시.
나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형체 없는 시선과, 끝나지 않는 주저함에.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기를,
그저, 그렇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작은 기억이 평생을 흔들 수 있다는 걸
나는 그것을 안다.
나는, 질기게 붙어 있던 꼬리표가 떨어져 나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