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의 에피소드
우리는 서로가 알고 있었다. 곧 이별이 찾아올 것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에게 이별을 먼저 말하지 않은 것은, 그의 작은 이기심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아무런 접점이 없던 우리가 서로를 알게 되었다. 깍쟁이 같았던 서울남자와 경기도민의 만남. 우린 서로 같은 선생님에게 과외를 받고 있었다. 백일장에 참가하게 되며 선생님을 통해 이름만 듣던 그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서울깍쟁이라 그런가, 우리 동네 남자애들보다는 하얀 피부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안녕?"
"어, 안녕."
우리는 이렇게 인사만 하고 이야기가 끝이 났다. 선생님은 둘이 왜 이렇게 낯을 가리냐며 우리를 보고 놀렸지만, 나는 그 당시 남자친구가 있었기에 깍쟁이 같은 그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다.
"어쩌지, 선생님이 다른 곳에 가봐야 할 것 같아서. 가면 00이 있을 거야. 기억나지?"
"네, 기억나요."
우린 그렇게 다른 백일장 장소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안녕."
"응, 안녕."
침묵 속에서 각자의 할 일을 마친 후, 나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이야?"
"넌 다했어?"
"응. 이제 제출하려고."
"그러면 먼저 가. 난 아직이라서, "
"기다려줄까?"
"그럴래?"
깍쟁이 같은 그의 곁에서 나는 원고를 계속 읽어 보았다. 이상한 부분은 없는지, 고쳐야 할 부분은 없는지. 그렇게 검토하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런가. 나는 그날 아주 작은 상을 탈 수 있었다. 물론 더 오랜 시간 작성한 그는 나보다 두 단계 높은 상을 탔다. 이상하게 묘한 질투심이 들었다.
"나보다 잘 쓴 거 같지도 않은데, 네가 왜 나보다 더 좋은 상이냐."
"그러게, 운이 좋았나 봐."
백일장 이후 시작된 우리의 연락은 내가 남자친구와 헤어지면서 더욱 잦아졌다.
"나 남자친구랑 헤어졌어."
"왜?"
"나는 집 근처 여자친구고, 저 멀라 천안에 다른 여자친구가 있더라고."
"능력도 좋으시네."
그 당시 나의 남자친구는 정말 '능력'이 좋게도 두 여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그 사실을 알고 바로 헤어졌다.
"나와 술이나 마시게."
"너는 공부 안 하냐?"
나는 그와 만나며 다녀온 백일장에서 받아온 상들로 수능대신 수시전형으로 대학을 진학했지만, 그는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여 재수생 신분이었다.
"친구 위로해 줄 시간도 없겠냐."
재수학원을 다니면서도 나와 연락을 주고받던 우리는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와의 만남은 한 달에 한 번. 아무래도 재수생의 시간을 많이 뺏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사귄 기간은 1년 3개월이었다. 재수생시절에는 한 달에 한 번, 대학에 간 후에도 만남은 여전히 드물었다. 그가 1학기를 마치지 못하고 입대하기까지, 15개월 동안 우리는 고작 15번 만났다. 뜸해진 연락과 만남으로 우리가 헤어질 시기가 다가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나와 헤어지지 않은 이유는 군대에서 기다려줄 고무신이 필요했다고, 어딘가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다는 말이 전부였다.
"잘 지냈어?"
"응."
"오늘 여기서 축구했는데, 아 여자들은 군대이야기 재미없어한다고 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이거뿐이네."
"우리, 헤어질까?"
"......."
그가 군대에서 처음 전화한 그 통화에서 나는 이별을 말했다. 그 이별에서 나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헤어짐에 이유도 묻지 않았다.
"잘 지내."
"응, 너도."
오히려 덤덤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와 헤어진 그가 나를 찾아왔다. 방송국 1층 로비에서 그는 나에게 전화를 했다.
"00 씨 택배 왔는데요. 찾아가세요."
"아, 잠시만요. 금방 내려갈게요."
나는 이 전화에서도 그의 목소리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 저 1층 내려왔는데 어디 계세요? 여기 없으신데."
"너무한다. 내 목소리도 까먹고."
뒤를 돌아봤을 땐, 짧은 머리의 그가 한 손에는 커다란 상자를 들고 나를 향해 서있었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오랜만이다."
"전해줄 게 있어서 불렀어. 업무시간에 미안."
그는 나에게 상자를 건네준 후 바로 자리를 떠나버렸다. 상자 속에는 30개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나는 그 안에 편지를 읽어보지 않았다. 그대로 들고 올라가 6층 사무국 문서 파쇄기에 넣어버렸다. 그것이 맞는 판단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 후, 6년 동안 그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6년 동안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그렇게 나를 원망하면서 살아야 했던 것일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지금 다해."
"만나서 이야기하자."
"아니야,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하고 싶은 말 지금 다해."
그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긴 시간 동안 그는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도 복학하고 다른 연인도 사귀었을 충분한 시간이었다.
"말로 못할 거 같으면 문자로 해. 딱 오늘까지야 너의 연락받아주는 것도."
전화를 끊고 그에게 스크롤을 끝없이 내려야 할 장문의 문자가 왔다. 끊임없는 욕설과 나에 대한 저주가 담겨있었다.
그는 왜 이리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그렇게 나를 원망하면서 살아야 했던 것일까.
그가 나를 미워하는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는 했다. 군대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이별은 더 큰 고통이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6년이라는 긴 시간을 원망 속에서 살아온 것은 결국 그 자신이 선택한 감옥이었을 것이다.
그의 마지막 저주와 함께, 우리의 가늘게 이어지던 우리의 인연도 끝이 났다. 늦었지만 그는 그렇게 나를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