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일기 11

그곳 사람들

by 해다니

각 프로그램에는 FD라는 구성원이 있다. 그들은 촬영현장에서 무대 세팅, 소품준비, 현장정리 등등 잡무가 많은 직업이었다. 주로 파견직으로 시작해서 일이 손에 익으면 자체 계약직으로 전환되어 2년씩 계약을 이어갔다. 가끔씩 오래된 프로그램에서는 메인 PD까지 물갈이가 싹 되어도 시스템을 알고 있는 FD는 남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


한 프로그램에 대부분 한 명이 담당했지만, 규모가 큰 프로그램에는 두세 명이 투입되기도 했다. FD의 세계는 대부분 밤낮없이 일하고, 집에서 자는 날보다 회사 숙직실이나 근처 모텔에서 자는 일도 많았다. 운전이나 무거운 짐을 드는 일이 많아 남자 FD가 많았지만, 꼼꼼한 성격 덕분에 여자 FD를 선호하는 PD들도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붙어 있는 이들 사이에는 자연스레 호감과 다툼의 감정이 오가곤 했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이 때로는 엉뚱한 방향으로 꼬이기도 했다. 내가 목격한 사건 중에서도 유난히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


그 당시 이제 막 3주년이 된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곳은 특이하게 남녀 FD가 팀을 이루어 일을 했다. 보통은 외부팀, 내부팀 나누어서 그 팀에 한 명씩 투입되는데, 스튜디오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 치고는 특이하게 두 사람이 함께 배치되어 있었다.


최 00은 이곳에서 아주 털털한 성격의 여자 FD였다. 술자리에는 빠짐없이 참석하고, 주변에 남자사람친구가 많은 편이었다. 친언니와 같이 서울에서 자취를 하던 그녀는 언니와 크고 작은 다툼을 하다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고, 최 00은 언니의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은 그녀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같이 일하던 남자 FD 임 00을 불러 다짜고짜 본론부터 이야기했다.


"너네 집에서 일주일만 신세 지면 안될까?"


혈기왕성한 20대 중반의 청춘남녀. 남자는 그녀를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다. 감기, 가난,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 그녀가 그런 그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겠지만, 여자는 그의 마음보다는 집이 필요했다. 그렇게 일주일만 지낸다던 생활은 어느새 동거가 되어버렸다.


이미 공개적인 사내연애를 했던 최 00은 남들 입에 오르고 내리는 것이 별로라며, 임 00에게 사귀는 것을 비밀로 하자고 요청했다. 그는 동거를 하고 있기에 이 비밀연애가 딱히 문제 될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덧 동거생활 다섯 달이 되어갔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집안일부터 회사일까지 혼자서 도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호의는 점차 당연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아! 맞다. 소품실에서 저번에 썼던 물건 가져와야 하는데. 아까 피디님이 찾으시더라고. 그것 좀 챙겨 와 주라."

"나, 배가 아파서 그런데 이거 좀 대신 가져다주라."

"00 업체에 전화해서 확인할 거 있었는데 거기 연락처 알려줄 테니까 전화 대신해 주라."

"어제까지 하기로 한 거 깜빡했네. 그거 지금 대신해 줄 수 있어?"


무거운 짐 옮기기, 거래처 연락, 장소 확인, 자신의 실수까지 모든 것을 그의 책임으로 돌려버렸다. 왜 더 사랑하는 사람이 늘 '을'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오늘 친구네서 자고 갈게. 저녁 혼자 먹어.]


그녀의 연락. 그녀는 요즘 들어 외박이 잦았지만 그녀를 믿었기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저 보내온 내용이 어떻든 간에 마지막에 붙어있는 하트 이모티콘에 그가 미소 지어졌다. 점차 동등하지 않아 지는 관계가 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갔다. 아무것도 알 리 없는 주변 사람들은 그의 건강 상태를 걱정했다.


"집에 무슨 일 있어?"

"아니, 별일 없어."


다른 프로그램 FD였던 박 00이 그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래? 힘든 일 있으면 말해. 나도 너랑 고민 상담할 게 있는데, 내일 저녁에 시간 되면 술 한잔 할래?"

"내일 말고 오늘은 어때?"

"오늘은 내가 저녁에 약속이 있어."


둘은 서로 같은 고향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친구가 되었다. 비슷한 업무와 같은 고향으로 남들보다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완전 대박사건이에요!"


그와 같이 일하던 진행팀 동생이 대단한 발견을 한 듯 달려와 말했다. 편집실에서 뜻밖의 장면을 목격했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편집실에서 뽀뽀를 했다니깐요."


사내에 복사기도 안다고 하는 사내연애에서 비밀연애라는 게 애당초 가능했었을까. 요 근래 박 00과 동선이 겹친다고 생각이 들었던 것들이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임 00은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그는 바로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잠깐 나 좀 봐."

"나? 지금 철물점 가는 길이야."

"언제 들어오는데?"

"글쎄, 한 20분 정도 걸리지 않을까? 무슨 일인데?"

"어제 어디서 잤어?"

"친구네서 자고 간다고 말했잖아."

"그 친구 이름이 뭔데? 어떤 친군데?"

"너,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나 못 믿어? 나 지금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어. 이따 전화할게."


그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임 00은 곧이어 박 00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나, 6층 편집실이야. 왜?"

"나와, 할 말 있어. 공개홀 가는 곳 티켓부스 근처야."


분노에 차 있던 임 00과 아무것도 모르던 박 00이 최 00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건의 전말은 최 00과는 4개월 전부터 교제를 했고, 임 00과 사귀는 사이인지는 전혀 몰랐다는 것. 그녀는 2주에 한 번씩 본가에 다녀오겠다. 또는 친구네서 자고 오겠다는 핑계로 임 00을 속여가며 박 00과 외박을 했다. 박 00은 최 00이 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줄 알았고, 집에 가면 언니가 핸드폰 만지는 것을 싫어한다고 말해서 집에 가면 연락이 뜸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둘 다 피해자였음을 깨달았다. 서로 쌓여가는 분노를 풀기 위해 그녀를 찾았지만 그들의 삼자대면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버려둔 상태로 그날 바로 도망쳤다. 그녀가 말없이 사라졌어도 모든 일은 똑같이 흘러갔다. 4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그 어떤 업무도 하지 않았기에 최 00이 사라져도 업무에 지장도 없었다. 그녀는 할당된 자신의 업무 반절은 임 00이, 나머지 반절은 박 00이 하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둔 상태였다.


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미 다른 방송국에서도 그렇게 연애를 하며 자신의 업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겼고,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이 돈만 챙겨갔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나는 이 사건을 보며, 한편으로는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작은 사회에 갇히면 시선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더 좋은 사람을 찾는 판단력이 떨어진다. 아마 그녀는 그것을 이용했을 것이다.


매일 밤낮없이 한 공간에서 일하다 보니 보는 사람은 한정적이고, 청춘남녀는 불타오르기 마련이다. 그녀는 사랑이 아니라 늘 자신을 위해 헌신할 사람을 찾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끝까지 속일 수 있다는 오만함 역시 그녀가 선택한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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