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From me, To me

by shotchuu

25.03.16


날짜를 적는데 240316, 이라고 적었다가 고쳤다. 해가 바뀐지 석 달이 넘도록 자주 이러고 있다. 바쁘고 고단하고 잠도 부족하고 스스로가 모자라게 느껴지며 화딱지도 나고 세상에게도 화딱지도 나고 가오도 약간 죽고 집에 가고 싶고 혼자 있고 싶고 근데 친구들하고 왁자하게 술도 마시고 싶고 그런 심정들로 몇 주 가량을 보냈다.


원래 동태눈이 되기 쉬운 4년차, 나도 때가 타서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하는 태도는 내려놓은지 꽤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는 가오가 상하면 스스로에게 자꾸만 뭔가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남이 인정해 주는 거 말고 그냥 내가 스스로에게 좀 면이 섰으면 했던 거다. 그래서 밖에 나갈 일 있으면 옷장을 열어 가장 상큼한 옷을 걸치고 2025 트렌드 모카무스 메이크업으로 중무장하고 나가고, 사람들 만나면 뭐라도 한 건 제대로 웃겨주고 싶어하고… 이런 식으로 나에게 내가 자꾸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하고 있는 날들, 다행히 그래도 나는 한 건 뒤집어지게 웃기고 나면 오늘 두 발 뻗고 잘 수 있고, 추구미에 맞는 사진 한 장 피드에 박으면 그럭저럭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주현과의 만남은 유비가 제갈공명 만나듯 삼고초려 끝에 이루어졌다. 주현이가 제안서 쓰느라 약속 못 나와서 날짜 바꾸고, 주말로 잡았더니 이번엔 내가 제안서 쓰느라 약속을 못 나와서 이제야 만났다. 마케터들의 만남이란 게 초야에 숨어사는 현자를 난세로 끌어내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니... 용산의 느낌좋은카페에서 그간 겪었던 지독한 일들을 서로 스탠딩코미디의 형태를 빌려 전하고 같이 미키17을 보고 양꼬치를 먹었다. 양꼬치를 뜯으면서 시덥잖은 소리를 하고 있는데 주현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있잖아 나는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너는 참 밀도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사실 주현이의 그 말은, 그동안 내가 오타쿠 같은 짓을 할 때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미쳐버렸던 일련의 행동들을 보며 -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오타쿠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다 얻은 결론이라는 거였다. 주현이의 언어로는 “관심사에 늘 딥 다이브 하는 네가 신기해.” 라는 말이, 그러니까 실은 “그게 뭔데 씹덕아 알아듣게 설명해 제발 현실을 살아” 와 크게 다르지 않은 뜻이라는 걸 듣자마자 알았다.

그리하여 그 말을 처음 들은 당시에는, - 갓반인 주현이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오타쿠 같아 보였길래 그걸 저렇게 깊이 사유했을까?- 라고 생각했는데, 하루가 지나도 그 말이 기억에 남았다. 밀도 있는 사람이라… 때로는 방금 거 웃겼다는 말보다, 오늘 아웃핏 멋지다는 말보다 창의적으로 기분좋은 말이지 싶었다. 주현이가 한 말로 <뭔가보여드리겠습니다> 라는 욕구가 좀 충족된 것 같기도 하다.


그래.. 꼭 가오가 살아야 하나? 나는 영웅은 눈물 같은 거 안 흘린다고 눈물이 나도 기합으로 참고 지내 왔다. 자꾸 나 자신한테도 체면을 세우고, ‘대장부가 가오가 죽느니 그냥 죽고 말지’ 같은 말도 종종 뱉었다. 관우는 화타가 생살 째고 뼈에 스며든 독을 긁어내는데 태연하게 장기를 두었다는데, 내가 이깟 일로 엄살을 부릴 수는 없지. 이게 내 사고방식이었다.


근데 내가 그냥 평생을 품고 살아온, 뭔가에 꽂히면 바닥까지 파고드는 오타쿠 기질은 다른 말로 하면 나의 밀도였다. 딱히 가오가 살지 않아도 이렇게 스스로 면이 서기도 한다니. 가오를 잡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가오가 살 수도 있다니. 실로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래서 오늘 누워서 넷플릭스로 폭싹속았수다 보다가 눈물이 줄줄 나는데 그냥 안 참았다. 아 슬픈 걸 어쩌란 말이냐.. 드라마 보다 좀 운다고 죽는 가오면 원래부터 죽어있는 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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