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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민령 Jan 10. 2017

“잊지 않겠습니다”에서 “기억하고 싶은 기억”으로

 나는 봄이 참 좋다. 흑백의 우중충한 겨울이 파스텔톤의 연두색, 분홍색, 노란색으로 물들어가는 게 참 좋다. 살을 애던 바람이 부드러워지는 것도 정말 좋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봄에 묘한 불편감이 덧대졌다. 특히 개나리를 볼 때면, "아, 이쁘다, 봄이구나' 한 다음에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개나리가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까닭이다.      


저마다 다른 기억    

  기억은 서로 다른 것들을 연결짓는 과정이다. 사람, 물건, 사건이 가득한 외부 세계에서 어떤 부분에 얼마 만큼의 주의를 기울이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처럼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이 사람마다 다르기에 똑같은 시공간을 경험하고도 사람마다 다른 내용을 기억하게 된다. 그러니 친구와 나란히 앉아 같은 영화를 봤는데도 기억에 남는 내용이 다르다. 하물며 애초부터 다른 매체를 통해서 다른 내용을 다른 뉘앙스로 접했다면, 기억의 내용은 다를 수 밖에 없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저마다 다른 파편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기억은 사전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과정, 즉 이해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19세기 초 빙하를 본 적이 없었던 영국 지질학자들은 얼음이 지형을 바꾼다는 이야기에 코웃음을 쳤다. 그들이 아는 얼음은 기껏해야 서리나 고드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 교육을 받지 않은 스위스의 농부들은 빙하가 바위를 옮기고 계곡을 파낸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겼다. 얼음에 대한 사전 지식(또는 편견)이 달랐기에 얼음이 지형을 바꾼다는 주장을 다르게 이해한 것이다. 다른 이해는 다른 기억으로 이어진다.     


  기억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도 첨예하게 달라지곤 한다. 방금 전에 일어난 교통 사고를 두고 언성을 높이는 것은, 받아들인 정보의 파편과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짜라고 믿고 싶은 내용과 감정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동일한 사건도 사람마다 다른 감정으로 해석되고, 다른 의미로 기억된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누군가에게는 슬프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화나는 기억으로, 누군가에게는 그저 그런 기억으로.   

  

  그렇게 처음부터 달랐던 기억은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처럼 변형되어 간다. 추억은 종종 실제보다 아름답게 변색되며, 나중에 접한 다른 정보나 뉘앙스로 인해 변질되기도 한다. 예컨대, 자동차 추돌 동영상을 보여준 후, “얼마의 속도로 부딪혔습니까?”라고 물을 때보다 “얼마나 빠르게 충돌했습니까? 라고 더 강한 표현을 써서 물을 때 사람들은 더 높은 속도를 응답하는 경향이 있다. 변형되는 기억은 다른 기억들 아래 묻히고 흐려져 어느덧 잊혀지곤 한다.     


  이처럼 우리는 저마다 다른 기억을 쌓아가고, 바꾸어가고, 잊어가고, 되살려내며 기억을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것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연결되었다가 흩어지며 다른 정서, 다른 행동, 다른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기억의 변형과 망각은 시간의 영향을 받지만, 시간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시간이 가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고, 잊은 줄 알았는데 불현듯 되살아나는 기억도 있다. 내가 개나리를 보며 마음이 불편해진 것은, 개나리가 피는 시기와 노란 개나리가 핀 모습이 세월호의 노란 리본과 연결됐기 때문이다.     


망각과는 다른 과정, 회피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나도 동의한다. 아직도 잊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게 고맙고 든든하다. 그럼에도 부탁받은 글이 세월호와 관련되어 있음을 뒤늦게 알았을 때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눈 딱감고 기억과 망각의 과학적 메커니즘만 쓰자니 불편했고, 그렇다고 정치색까지 덕지덕지 붙어버린 이 무거운 주제를 다루기도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걷다가도, 자려고 누웠다가도… 자꾸만 세월호를 떠올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잠도 쉬이 들지 않고, 들어도 자꾸 깨고, 축축 늘어졌다. 혹시 나는 세월호를 잊어가는 게 아니라 너무 버거워서 외면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세월호를 돌이켜 봐야만 하는 상황이 되자, 억눌러둔 감정이 삐져나오고 있는 건 아닐까...     


사회적 PTSD 급의 충격을 주었던 세월호는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 심연이다. 하물며 새벽에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직장인들, 낮은 취업률과 자영업의 실패로 당장의 하루가 숨가쁜 이들, 까딱하면 굴러떨어져 저소득층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세월호가 버거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외면하고, 회피하게 된다. 이런 이들에게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요구는 정당하면서도 버겁다.     


  회피와 망각은 다른 과정이다. 망각이 잊는 과정이라면, 회피는 잊혀지지 않는, 해결하고 싶지만 대면하기엔 너무 큰 상황에 맞닥뜨린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꼭 해야하는 일임에도 초조하고 불안해서 자꾸만 미루는 것, 힐링 용도로 유행하는 컬러링북이나 컴퓨터 게임 등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것, 생각하고 있노라니 마음이 불편해서 외면하는 것 등이 심리적인 회피 반응이다.     


  "잊지 않겠습니다"는 말은 이미 잊을 것을 염두에 두고 있고, 그러면서도 잊으면 안 된다고 몰아세우는 것처럼 들린다. 힘들고 지치더라도, 노력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버거워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부담을 줘서야 받아들여지기 어렵지 않을까. 무거운 진실과 엄중한 경고, 분노는 잠깐의 폭발력을 가질지언정 오래 가지 못한다. 하물며 여러 사람이 기꺼이 참여하고 싶은 뭔가는 될 수 없다.     


  더욱이 기억하는 자와 망각하는 자의 대결 구도로 접근할 때, 세월호는 직접적인 피해자들과 사회 정의에 유난한 사람들만의 문제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세월호는 피해자들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의 충격이었다. 당시에 유행했던 “각자도생”이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세월호를 자기 문제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였음을 암시한다. 기억의 양상은 다를지언정, 차라리 잊고 싶어하는 이들을 끌어안지 않고는 국민적 지지도, 근본적인 해결도 어렵지 않을까.     


기억하고 싶은 기억     

  나는 세월호가 애써 기억해야 할 무거운 진실이 아니라 떠올리면 힘이 나는 뭔가, 기억하고 싶은 뭔가로 전환되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는 세월호 이상으로 한일병합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자손들이 결코 잊지 않고 경계하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일병합이 아닌 광복절을 축하하며 되새기고,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던 삼일운동을 기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일은 중대한 사건이었지만, 십자가를 상징으로 쓰는 교회조차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보다는 부활절을 더 기린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나까지도 부활절이 되면 공연히 숙연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진다.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그저 어떤 선구자로 기억되었다가 수십, 수백년이 지난 뒤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서 잊고 싶지 않은 기억, 기억하고 싶은 기억이 되어 수천년을 살았다. 상처를 넘어 힘으로. 세월호도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앰버 경보(AMBER alert)라는 게 있다. 아동의 실종이 확인된 즉시 TV, 라디오, 교통 표지판, SNS 를 통해 실종된 아동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유포함으로써 신속하게 아동을 찾아내기 위한 경보다. 이 제도는 1998년 앰버라는 소녀가 텍사스에서 납치 살해된 후, 비슷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고자 여러 사람들이 노력한 끝에 정착되었다. 2002년 연방법으로 재정된 이래 2013년 8월까지, 앰버 경보는 657명의 아동의 무사 귀환을 도왔다. 앰버 경보 덕분에 아이를 되찾은 사람들은 앰버와 앰버 경보를 만든 이들이 얼마나 고마울까? 앰버의 납치 살해는 분명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앰버 경보의 정착으로 인해 앰버는 기억하고 싶은 기억, 감사하고 힘이 나는 기억이 되었다.     


  세월호도 이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수명이 지난 선박과 과적을 단속하는 시스템, 구조 체계와 장비의 점검 및 개선, 정확하고 신속한 보도 체계,각 조직에서 안전 부서의 독립성 보호 등 당장 할 수 있음직한 것부터 개선해가며 거기에 세월호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어떨까? 작은 것이라도 하나씩 고쳐가며 감사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나아간 지점에서 기운 내어 또 한발 내딛을 수 있다면, 그래서 세월호라는 비극이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 일로 전환될 수 있다면… 그러면 세월호도 감사하고 힘이 나는 기억이 되어 오래오래 기억되지 않을까?     


물 속의 괴물: 밝혀지지 않은 진실과 풀어내지 못한 감정    

  세월호 사건으로부터 2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 세월호식 앰버 경보를 만들지 못했다. 그럴 정신이라도 차리기엔, 사실 확인을 비롯한 너무 많은 과정이 혼탁했다.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에서 수백명의 아이들이 바다에 빠졌는데 언론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보도를 하며 혼란을 키웠다. 배에서 사람보다 먼저 구해낸 블랙박스는 공개되기까지 3일이나 걸렸고, 420여년 전 누군가는 세계사에 길이 남을 해전을 이끈 곳에서 끝내 단 한명의 구조자도 나오지 않았다. 세계 조선 수출 1, 2위를 다투는 나라에서 그 배는 아직 바닷속에 잠겨있다.    


  감정적 해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월호가 정치 문제로 비화되면서, 사람들은 충격과 슬픔에 휩싸인 와중에 분노하고 서로 미워하다가 차츰 입을 다물게 되었다. 감정을 표현하고 소통하고 승화시키는 데 탁월한 기능을 수행해온 예술도 자유롭지 못했다. IMF와 스크린 쿼터제 축소를 뚫고 꽃핀 20년 역사의 부산 영화제는 <다이빙벨> 상영에서 비롯된 갈등이 심화되어 올해 기어코 보이콧에 들어갔다. 어떻게 이런 일을 매일 기억하며 맨 정신으로 살 수 있겠나.     


  일상을 살고자 수면 아래 묻어둔 세월호의 기억은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틈만 나면 퀴퀴한 숨을 뿜어낸다. 나는 개나리를 볼 때마다 공연히 울적해지고, 큰 배를 볼 때면 가슴 한 켠이 내려앉는다. 그리고 악몽처럼 불쑥불쑥 되살아난다. 때로는 수백명을 죽이고 병들게 하고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가습기 살균제의 모습으로, 때로는 늑장대응으로 일관했던 메르스의 모습으로, 때로는 정치문제로 비화된 세월호처럼 가난한 노인들이 어버이 연합으로 탈바꿈하는 모습으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송강호네 가족은 괴물이 출현했던 한강가에서 그대로 살아가고, 곁에는 어두운 한강물이 일렁이고 있었다. 어두운 물 속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도 모를 괴물을 가까이 두고 살아가는 거… 이런 거 정말 질린다. 가슴에 돌처럼 얹혀 차마 돌아보기도 힘든 세월호 이후 한번도, 우리는 힘을 합쳐 괴물과 직면할 기운을 펼치지 못했다.     


  과거에는 이처럼 큰 충격에 부닥쳤을 때 현실적인 해결 노력과 더불어 굿을 했다. 굿은 미신이지만 감정의 해소와 승화라는 분명한 심리적,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오늘날에는 예술과 상담이 괴로운 감정을 풀어내고 맞딱뜨린 현실과 대면하도록 돕는다. 억압된 부정적 감정이 터져나오고, 부정적 감정과 덩달아 억압되었던 긍정적 감정이 숨통을 트면, 그 분출된 에너지로 주변이 재해석되기 시작한다. 아마 승화, 카타르시스가 이런 것일 게다. 그렇게 흙을 뚫고 올라온 생명에는 힘이 있다. 힘든 일을 떨쳐내고 몸을 일으킨 만큼 성숙되고 강해진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바뀐 시야에 따라 문제가 재설정되며, 문제를 직면할 힘이 자라고, 해결 과정도 보다 원숙해진다.     


상처를 넘어 힘으로     

  진상 규명, 감정 승화, 대안 구축. 이 세 가지가 순서대로 차곡차곡 이뤄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일은 이미 일어났고, 304 명의 꽃다운 생명을 잃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채 살아갈 수는 없다. 앰버 경보처럼, 잃어버린 생명에 버금가는 것들을 이뤄내야 한다. 순서는 좀 뒤엉켰지만 그때그때 여건이 되는 것부터 조금씩 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지금보다는 훨씬 더 먼 곳에 도달해 있지 않을까? 앰버 경보를 통해 앰버를 기억하듯, 세월호의 이름이 붙은 안전 조치들을 통해 세월호를 기억하며 언젠가는 저 세 가지를 모두 이뤄내게 되지 않을까?    


  인간은 이기적일 때도 있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공감과 협력에 뛰어난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니 정치, 지역, 세대, 성별에 기억까지 보태 분열되는 건 이제 그만하자. 사람들의 마음에서 걸림돌이 되는 지점들을 보살피고, 슬픔과 충격을 함께 풀어내며, 작은 것부터 하나씩 바꿔 힘을 모으자. 상처를 넘어 힘으로… 개나리의 꽃말은 희망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세월호가 기억하고 싶은 기억이 되기를. 언젠가는 개나리를 보며 마음 편히 봄을 기뻐할 수 있고, 이런 일이 있었지만 해냈노라고, 부활절을 맞이하듯 감사하고 기운내게 되기를.


* 2016년 예술 잡지 비-아트에 기고한 글을, 잡지사의 동의를 얻어 여기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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