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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편] 우리 밭에는 꽃도 자라요!

by 헤아림


연재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특별편을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추운 날씨 탓에 다음 편으로 준비하던 냉이가 아직 너무 못 자랐다. 초조한 마음으로 몇 번이나 냉이밭(!)을 들여다보며 얼른 크라고 눈치도 줬지만 여전히 수확하고 요리를 해 먹기에는 너무 작디작은 상태라 결국 한 주를 미루기로 했다. 주말부터 풀린 날씨 버프 받아서 한 주 동안 열심히 자라주기를 바랄 수밖에. 계절과 시기에 맞춰 실시간 연재를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생길 수 있구나 하는 걸 (너무 일찍) 배웠다. 그 대신 어떤 이야기를 써볼까 하다가 채소를 수확하고 요리해 먹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제외할 수밖에 없어 아쉬웠던 밭의 꽃들을 소개하기로 했다.



초록색으로 보이는 게 전부 냉이지만 수확하기에는 너무 작다.






앞서 얘기했듯이 엄마와 나는 둘 다 오랜 시간 가드너로 지내왔다. 다만 엄마는 밖에서 농사를 짓는 실외 가드너, 나는 집 안 화분에서 열대 식물을 키우는 실내 가드너였다. 둘 다 식물을 키운다는 점은 같지만 엄마는 햇빛을 듬뿍 받으며 자라서 열매를 맺는 식물들을, 나는 상대적으로 햇빛은 덜 필요하지만 대신 따뜻한 온기를 필요로 하는 예쁜 잎을 가진 식물들을 주로 키웠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가드닝을 즐기면서도 취향이 겹치는 단 하나는 바로 야생화였다. 야생화는 말 그대로 야생에서 자라는 꽃이기에 여느 농작물과 비슷한 야외 환경이 필요했다. 물론 야생화를 실내에서 아예 못 키우는 것은 아니지만 줄기마저 굵고 튼튼하게 자라서 예쁘고 풍성한 꽃을 피워내기 위해서는 비옥한 땅, 많은 물, 풍부한 바람, 무엇보다 강렬한 햇빛을 필요로 했다.


식덕들은 주기적으로 초록색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보통 화훼단지라 하면 필요한 식물을 사기 위한 목적으로 찾는 곳이지만 나는 꼭 무언가를 사려는 마음 없이 그저 초록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기도 한다. 물론 갈 때 마음과 다르게 빈 손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이런 식으로 집안에 온통 화분이 가득해졌다. 하나둘씩 들인 화분들이 베란다를 가득 채우고, 거실 창가를 가득 채우고, 내 방까지 가득 채우고 나니 이제는 사고 싶은 화분이 있어도 손에 들고 한참을 고민한다. 특히나 그게 내가 가진 환경에서 키우기 힘든 야생화라면 고민이 깊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믿을 구석이 떠올랐다. 내가 집에서 못 키우는 건 밭에서 키워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더 이상 장바구니에 야생화를 담는 걸 망설이지 않게 되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농작물 심기에도 모자란 땅에 꽃을 심어달라 조르면 싫어하시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나만큼이나 꽃을 좋아하는 엄마는 기꺼이 땅 한쪽을 내어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어쩌다 한 번씩 놀러 오는 방문객 중 한 명이었기에 내가 보고 싶은 꽃을 사다 맡기면 잘 키워서 꽃을 피워내는 건 온전히 엄마의 몫이었다. 그리고 내 역할은 엄마의 관심 속에 예쁘게 피어난 꽃을 보며 감탄하고 사진 찍어 SNS에 자랑하는 일. 엄마가 해주는 것을 받아먹기만 하며 자라온 딸은 꽃을 피우는 데 있어서도 그 버릇을 못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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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근을 사다 심은 글라디올러스와 씨앗부터 키운 테디베어 해바라기



처음에는 사기 전에 엄마 허락부터 받았다. 직접 실물을 보고 살 땐 사진을 보내서 이거 어떻냐 물었고, 인터넷으로 주문하기 전에는 엄마 침대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 사진을 보여주며 예쁘지 않냐 물었다. 내가 곁에 두고 보고 싶어서 사는 거지만 그게 엄마 취향이 아니면 무턱대고 키워 달라고 하기 미안해서 내 취향과 엄마 취향의 교집합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점차 엄마가 좋아하는 꽃 중에 내 취향의 색을 고르게 되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보라색 꽃의 매발톱은 이미 몇 년간 밭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면 나는 분홍색 꽃의 매발톱을 사 오는 것이다. 자주색 꽃의 할미꽃을 좋아해서 심어두시면 노란색 꽃의 할미꽃을 사 오고, 진한 분홍색의 천일홍을 좋아해서 심어두시면 흰색 꽃을 피우는 천일홍을 사 왔다. 이런 식으로 여전히 점차 엄마와 나의 취향이 쌓인 꽃밭이 만들어지고 있다.



먼저 심었던 보라색 매발톱 뒤로 나중에 사다 심은 분홍색의 매발톱도 꽃을 피웠다.



내가 밭에 사다 나르는 꽃은 그 종류도 다양했다. 한 해 꽃을 피우고 씨앗을 남긴 뒤 죽는 1년생 화초도 있었고, 몇 해 동안 자리를 지키며 매년 더 크고 풍성한 꽃을 보여주는 나무들, 그리고 꽃이 지고 난 후 구근의 수를 불려 다음 해에는 더 많은 꽃을 보게 해주는 구근 식물들도 있었다. 때로는 씨앗으로, 때로는 모종으로 지금 생각하면 지난 몇 년 동안 참 많이도 사다 심었다. 초창기 때부터 꾸준히 자리를 지키며 이제는 컨테이너를 다 덮을 만큼 성장한 능소화도 있고, 씨앗도 남기지 않은 채 죽어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노랑 할미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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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능소화 묘목을 사다 심었는데 어느새 컨테이너를 다 덮을 만큼 성장했다.






춘분의 채소를 소개하기 어려워진 대신 춘분의 꽃을 소개하자면 우리 밭에서도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건 역시 복수초였다. 복수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은 하얗게 쌓인 눈을 녹이고 그 사이로 꽃을 피워낸 모습이다. 엄마는 그만큼 이른 봄에 찾아와 주는 복수초를 보기 위해 일부러 먼 길을 찾아가실 만큼 좋아하신다. 그래서 몇 년 전 복수초를 사다 심었다. 화원에서 복수초 모종을 발견했을 때, 물을 것도 없이 엄마가 좋아하는 꽃이라며 신나서 사들고 왔다. 비록 한껏 물이 올라 꽃 피기 직전이라고 생각했던 꽃봉오리가 이미 꽃이 지고 난 후 생긴 열매라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복수초. 지금 밭에 유일하게 꽃을 피웠다.


내가 느끼는 봄은 매화가 피는 순간부터라 이맘때 내가 밭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매화나무를 살피는 일이다. 꽃눈이 올라왔는지, 올라온 꽃눈은 얼마나 부풀었는지 매일같이 살피다 드디어 꽃봉오리를 하나 터트리면 그때 비로소 '봄이 왔구나!' 한다. 지금 밭에는 이제 막 매화가 피려고 꽃봉오리를 부풀리는 중이다. 며칠 전부터 n 년 전 오늘이라고 뜨는 사진 속에는 이미 매화가 활짝 펴 있으니 올해 매화꽃 피는 시기도 예전보다 늦어진 것이다. 갑작스러운 추위가 냉이가 크는 시기를 늦춘 만큼 매화꽃 피는 시기도 늦췄나 보다. 내일 밭에 가보면 우리 밭에도 드디어 봄이 와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꽃봉오리를 부풀리고 있는 매화


가을에 심어서 추위를 겪어야 꽃을 피우는 추식구근 식물들은 이제 막 싹을 내밀었다. 튤립, 수선화, 히아신스 같은 꽃들이 바로 그들이다. 밖에서 크는 우리 밭의 꽃들에게는 이게 맞는 속도라는 걸 알지만 같은 시기에 심어서 실내에서 키운 집은 벌써 꽃이 하나둘씩 폈다. 다른 사람들이 자랑하듯 올리는 예쁜 꽃 사진들을 보면 괜히 마음이 조급해진다. 몇 년간 식물을 키워오면서 다 때가 있다는 걸 배웠으면서도 예쁜 꽃을 얼른 보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숨길수가 없다.


이제 겨우 싹을 내민 구근 식물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튤립, 히아신스, 그리고 수선화 2종.


내가 미선나무와 사랑에 빠진 후로는 미선나무도 몇 주 사다가 심었다. 무려 충청남도 괴산의 미선나무 축제에 가서 사 온 묘목들이었다. 미선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식물이라 한국특산식물 중 하나이다. 이 말은 곧 우리나라에서 사라지면 전 세계에서 사라진다는 이야기이다. 한 때 멸종위기식물로 지정된 적도 있었으나 복원 사업을 통해 그 수를 늘린 덕에 2017년 해제되었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자생지 중 하나가 괴산에 있고, 그 덕에 매년 괴산에서는 미선나무 축제가 열린다. "멸종 위기를 극복한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미선나무를 향한 나의 궁금증이 절정에 달했을 때 결국 괴산을 찾았다. 언젠가 갖고 싶은 차를 드림카라고 한다면 나에게 드림트리(!)는 미선나무였다. 직접 본 미선나무는 작은 꽃이 배경을 채우듯 가득해서 따스한 봄날에 소복이 내린 눈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미선나무가 가득 핀 아름다운 모습과 코가 찡할 만큼 달콤한 향기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는 당연하게도 내 손에 미선나무 묘목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마음이 급해서 올라오는 길에 바로 밭에 들러 묘목을 심어주고 돌아왔다. 아주 작은 묘목을 심었으니 자생지에서와 같은 아름다움을 만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막막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대체 언제 자라서 꽃을 가득 보여줄까 했던 능소화도 어느덧 쑥 자라서 매년 여름의 기쁨이 되어주고 있으니 미선나무의 성장도 잘 기다려봐야지.


KakaoTalk_20250323_202406612.jpg 충청남도 괴산에서 만난 미선나무 자생지
KakaoTalk_20250323_202406612_01.jpg 미선나무를 영접하고 온 날, 내 인스타그램 프로필 사진도 미선나무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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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봄에 사다 심은 묘목이 잘 자리잡아 다음 해 봄 꽃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제 새 꽃을 준비하는 중.






이 글을 쓰면서 그동안 밭에 피었던 수많은 꽃들의 사진을 꺼내봤다. 아직도 자랑하고 싶은 꽃들이 한가득이지만 아무도 관심 없는 얘기를 나만 신나서 주야장천 떠드는 식물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이쯤 해보려 한다. 아마 이 꽃들이 내 눈에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래서 밤새 자랑해도 모자라다 싶은 건 새싹이 움트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지켜봐 왔기 때문일 것이다. 식물을 키우며 얻는 성취감이 나를 또 키운다.


이 글을 쓰면서 이미 장바구니에 또 꽃 씨앗을 잔뜩 담았다. 아직 온전히 겨울이 갔다고 하기에도 이르고, 온전히 봄이 왔다고 하기에도 이른 이맘때가 딱 새로운 씨앗을 뿌리기 좋은 때이다. 햇빛이 가득 드는 베란다가 있다면 한 켠에 예쁜 씨앗을 심어서 파종의 제철을 만끽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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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장미조팝나무, 할미꽃, 백일홍, 금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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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우단동자, 수레국화, 달맞이꽃 2종


아, 그래도 꽃 자랑은 도저히 못 참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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