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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분"의 채소, 냉이

by 헤아림




춘분

양력 3월 20일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때

봄나물 캐 먹기, 감자 심기





우리나라에서는 입춘을 절기의 시작으로 보는데 서양에서는 춘분을 기준으로 한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시기부터 완벽하게 한 해를 시작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제부터는 동서양 어디를 기준으로 해도 틀림없이 봄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날이 점차 따뜻해지겠지, 하고 믿었지만 자연이 나의 믿음을 배신하고 추위를 데려온 탓에 결국 나의 연재도 한 주씩 밀려나게 되었다. 심지어 평년보다 추운 날과 더운 날이 널뛰기하듯 오가고 있어 더욱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주말과 주 초에는 반팔을 입은 사람을 마주칠 만큼 덥다가 어제는 세찬 눈이 내렸으니 이걸 대체 어떤 날씨라고 해야 하는 건지. 직접 농사에 뛰어들다 보니 날씨의 변화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춘분을 맞이한 밭은 여전히 허전하기만 하다. 몇 번의 절기가 지나야 생명력 넘치는 밭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 계속 마음이 조급해진다. 심지어 어제는 눈까지 왔으니 싱그러운 초록이 가득한 밭의 모습이 한걸음 더 멀어진 기분이다. 그래도 이제 경칩에 심어둔 완두도 새싹들이 움트기 시작했고, 조금이지만 여전히 수확해 먹을거리가 있으니 이를 작은 위안으로 삼는다.



어제 내린 눈을 흠뻑 맞은 완두와 냉이



엄마에게는 사이좋은 여섯 남매가 있다. 그중에서도 유독 세 자매가 가까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이모들과 여기저기 나들이를 많이 다녔다. 특히 이맘때 교외에 나가면 세 자매는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리고 한참 후 냉이를 한 봉지 가득 담아서 돌아오셨다. 냉이 레이더라도 있는 건지 어디를 가든 냉이를 찾아내시는 능력이 놀라울 정도였다. 얼마나 재미있길래 저렇게 냉이를 캐러 다니실까 몇 번 따라나선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계속 쪼그려 앉은 상태로 아직 덜 녹은 땅을 파서 뿌리까지 온전히 캐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봄이면 "냉이 캐러 갈까?" 하는 이모들의 전화가 온다. 이쯤이면 엄마와 이모들이 좋아하시는 게 냉이를 먹는 일인지 그저 세 자매가 어울려 냉이를 캐러 다니는 그 행위 자체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역시 좋아야만 감내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토록 냉이를 찾아다니던 엄마는 밭이 생긴 후로 멀리까지 갈 이유가 없어졌다. 산으로 둘러싸인 우리 밭 주변으로 이미 냉이가 곳곳에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엄마가 신나서 이모들에게 전화한다.


"냉이 캐러 올래?"



가족들이 놀러오면 건강한 냉이를 잔뜩 캐서 냉이 라면을 끓여 먹고는 했다.



몇 년간은 주변에서 자라는 것들을 캐 먹었지만 이제 그걸로는 성에 안 차셨나 보다. 작년 가을, 기어이 냉이 씨앗을 받아서 밭 한쪽에 뿌리셨다. 그동안 야생의 냉이를 캐서 먹었다면 이제 재배를 시작하신 거였다. 그렇게 첫 냉이 농사의 결과가 올봄에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처참한 실패. 우리가 느끼는 냉이의 향은 그 뿌리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겨우내 뿌리를 굵고 길게 뻗은 게 잘 자란 냉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밭 냉이의 뿌리는 아주 귀엽고(!) 가늘었다. 냉이 캐는 시범을 보여주겠다고 나선 엄마가 호미로 살짝만 땅을 긁어도 뿌리가 쑥 뽑혀 올라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별로 깊게 안 파도 되네!" 하고 신이 났다. 생각보다 일이 수월할 거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엄마는 시무룩한 말투로 대답하셨다. "못 컸으니까 그렇지."



작고 소중한 올봄 냉이의 뿌리



연재를 한 주 미룬 사이 냉이 잎이 쑥 자라서 흙 색이던 냉이 밭을 초록색으로 바꿔주었다. 그래도 한 주 미룬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냉이의 성장에 있어서 중요한 건 잎이 아니라 뿌리였다. 냉이를 먹기까지는 한 포기마다 잎과 뿌리를 정리하고, 뿌리에 묻은 흙을 정성스레 털어낸 후 그래도 남아 있을지 모를 흙을 몇 번이고 씻어내는 고된 작업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냉이 손질하는 걸 볼 때마다 혼자서는 절대 안 해 먹겠다 싶었다.) 빈약한 냉이지만 열심히 캔다 해도 먹기까지의 작업이 더 힘들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그냥 냉이밭을 갈아엎기로 했다.



한 주 사이 많이 커서 땅을 가득 채운 냉이 잎



사실 농사라 해도 땅을 고르고 그 위에 씨앗을 뿌린 거 외에는 야생과 딱히 다를 것이 없었다. 매년 굵고 싱싱한 냉이를 캐오던 곳인데 왜 올해는 잘 안 됐을까? 냉이가 알려주지 않는 이상 정확한 답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 이유를 짐작하고 다음 농사에 반영하는 게 농부의 일이니까 나름대로 고민해 본다. 엄마가 짐작하기에는 정해진 공간에 너무 많은 씨앗을 뿌린 탓인 거 같다고 했다. 서로 너무 가까워서 어느 쪽으로도 제대로 영양이 가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냉이를 캐는 동안 하나인 줄 알고 호미질을 하면 아주 작은 3~4개가 딸려 왔으니 그 거리가 가깝다고 표현하기도 어려울 만큼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무엇이든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아주 가냘픈 냉이지만 한 소쿠리 캐놓고 나니 싱그러움이 느껴진다.



냉이를 곁에 두고 먹으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냉이를 먹으며 봄을 느낄 만큼 냉이를 대표적인 봄나물로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가을에도 새로 캔 신선한 냉이를 맛볼 수 있다. 나도 처음 가을 냉이를 만났을 때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냉이가 왜 지금 나오지?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원래 가을에도 냉이가 나오는 거라고 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 역시 냉이를 봄나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성장 주기를 찾아보기 전까지는 도저히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냉이는 봄이 지나면서 꽃대를 만들고 여름에 꽃이 지고 난 자리에 생긴 열매가 가을에 들어서면서 씨앗을 떨어트린다. 그렇게 떨어진 씨앗은 빠르게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서 늦가을쯤이면 첫 냉이를 먹을 수 있다. 다만 냉이를 봄나물로 알고 있는 이유는 겨울을 보낸 냉이의 뿌리에서 그 특유의 향이 가장 짙기 때문일 것이다. 냉이의 향이 가장 짙은 시기, 즉, 겨울을 막 떠나보낸 봄이 냉이의 리즈 시절(!)이기에 모두가 그 시절을 기억한다.


냉이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한 해에도 몇 번씩 냉이를 먹을 수 있다는 건 무척 기쁜 일이지만 어쩐지 봄의 낭만을 하나 잃은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그게 언제든 알싸한 향이 가득한 냉이 향을 맡을 때면 봄을 떠올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나에게 있어 냉이는 어느 계절에 먹어도 봄을 기다리게 하는 맛이 되어버렸다.


이제 춘분에 접어들고 냉이까지 먹었으니 틀림없이 봄이 오겠지? 눈을 맞으면서도 꽃을 피워낸 매화가 이 질문에 답을 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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