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초반,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강렬했던 기억 덕분에 도쿄여행의 루틴이 되어 버린 곳이다. 솔직히 그 때나 지금이나 예술은 전혀 모르지만, 어렴풋이나마 큐레이션이란 이런 것이구나...라는 걸 알게 해 준 공간. 흥미로운 테마를 선정하고 그로부터 연결되는 회화, 조각, 미디어아트 등 모든 형태의 예술 작품이 배치된 것을 보는 재미, 마치 전시 자체가 하나의 창작물 같다는 느낌을 알게 해 주었다. 덕분에 내 안에는 여기서 하는 전시라면 믿고 볼만하다,는 믿음의 벨트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다.
이에 더해 도쿄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도 매번 이 곳을 찾게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이번에 본 전시의 제목은 모리미술관개관 20주년 기념전 <ワールド・クラスルーム:現代アート の国語・算数・理科・社会 (월드 클래스룸 : 현대아트의 국어, 산수, 이과, 사회)>
솔직히 전시 자체는 들어서는 순간의 기대 만큼 나올 때의 충만함이 크진 못했지만, 그건 작품의 어떠함보다 내 상태의 어떠함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어찌되었든 익숙한 공간에서 누리는 반가움과 느긋함만으로도 충분했다는 만족감을 안고 모리미술관이 위치한 롯본기힐즈를 떠난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일을 해보자는 포부를 안고 나선 여행이지만 그래도 몇 개쯤은 아는 공간에서 익숙한 행동을 하는 것도 좋겠지, 라고 덧붙여 보지만 결국 익숙한 곳으로만 향하고 있는 나. 마치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앞머리의 방향처럼 큰 맘먹고 반대로 바꾸어 보려 해봐도 결국 또 매번 같은 방향으로 쏠리고 있는지도.
모리미술관이 위치한 롯폰기힐즈를 나서서 길 건너 동네를 배회하던 중 오래된 카페 한 군데를 발견한다. 어쩐지 냉정해 보이는 마천루와는 다른, 정이 느껴지는 공간. 역시나 익숙함이 닿는 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아늑하게 느껴지는 구석에 자리 잡고 산미가 적은 원두를 고른다.
할아버지 마스터가 커피를 내려주는 곳. 커피를 마시기 전부터 커피맛에 믿음이 생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실제로도 커피는 참 맛있었다. 내 입에 맞았다.
일드에서 많이 본 카페 분위기, 나이 지긋한 마스터에 대한 환상 때문이려나 싶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감각이랄까, 선입견은 위험하지만 오감으로 전해지는 예감은 과학일지도 모른다. 낡았어도 반짝이는 테이블을 보면 느껴지는 성실함, 단정하게 차려 입은 마스터의 옷차림, 이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편안한 표정 같은 것들을 보면 느껴지는 애정같은 것이 있다.
어느 쪽이든 결국 커피가 맛있었다는 결론 뒤에 붙이는 사족이겠지만...
종일 발길닿는 대로 걷고 잠시 멈춰서기를 반복한 하루. 만보기는 며칠 째 2만보를 훌쩍 넘기고 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숙소 근처의 초밥집으로 들어간다.
약간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털썩 주저 앉는데 "오늘 하루 수고하셨습니다."라는 한 문장이 툭 날아온다. 이상하게 울컥해지는 기분. 수고했다는 말이 왜 이리 좋을까. 여유로운 여행자로 보낸 하루의 끝에도, 바쁘게 일한 노동자로서의 하루의 끝에도, 수고했다는 말은 참 고맙고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