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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진 Oct 01. 2016

도쿄, 네 벌의 원피스를 사다  

2016.09.25~09.27. Tokyo


여자 넷이  

도쿄에 가자는 약속을 했다. 지극히 우발적인 선택이었고, 그중에는 고작 두세 번 만났을 뿐인 사이도 있었다. 우연히 마주한 자리에서 달구어진 분위기에 툭 튀어나와버렸던 "다 같이 도쿄에 한번 가도 재밌겠네요"라는 말 따위, 그저 흘러가는 인사쯤으로 여겨버려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이미 그런 식의 막연한 약속은 수도 없이 해 왔던 것이니까.

하지만 그 날은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가능하고 구체적인 약속을 하고파서 만남의 자리가 파하자마자 곧바로 비행기표와 숙소를 예약했고, 달력에 동그라미로 출발일을 표시해 두었다. 그리고 여행을 기다리는 한 달 간이 참 많이 행복했다. 여행의 가장 큰 미덕은 떠난 이후가 아니라, 떠나는 날을 기다리는 동안의 설렘에 있었다.



그리하여

여자 넷은 진짜 여행을 떠났다. 막 가을이 시작할 무렵 실현된 지난여름의 약속에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공항에 모였다. 2박 3일의 작은 일탈을 위해 2주쯤은 철야 작업을 해 두어야 했고, 갑작스러운 지출이 지난 자리에는 몇 달간의 카드 할부 대금이 남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새벽 3시에 일어나 공항에 갈 채비를 마쳤고, 아침 7시에 비행기를 탔다. 점심을 먹을 때쯤 도쿄에 도착했고, 니시 오기쿠보에 있는 숙소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곧바로 코엔지를 찾았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작고 오래된 가게들이 늘어선 골목길에서 발견한 중고 옷가게 <러브 소울>에서, 여자 넷은 네 벌의 원피스를 샀다. '이런 옷을 입어보면 재미있어 보일 것 같지 않아?'라는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 호기심이,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 사지 않을 것 같은 화려한 무늬의 원피스를 입고서 내일 아침을 먹자는 또 한 번의 약속으로 이어졌다. 모든 일이 평소 같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평소보다 즐거웠다. 지키고 싶은 약속을 하고 그것을 지키는 일이 이처럼 신나는 일이었던가.    



이상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 넷이 아침 밥상에 둘러앉았다. 3일간 빌린 '램브란트 빈센트' 사마의 2층 집은 모든 것이 고풍스러웠다. 마치 20여 년 전에 살던 집으로 돌아간듯한 진한 밤색의 바닥과 천장, 그리고 여자 넷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가구와 그릇들이 가득한 집에서, 촌스러운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기괴하게 어울렸다. 그녀들은 아주 친근한 동네 친구들처럼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마주 앉았다.

가족이 아닌 타인과 아침 식사를 함께 먹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점심이나 저녁과는 전혀 다르게, 친밀한 관계에서만 공유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 막 잠에서 깨어난 부스스한 모습을 마주하고, 나 또한 그런 모습으로 상대 앞에 선다는 것은 일종의 선을 넘는 일이다. 그러니 아침을 함께 맞이하는 일은 결코 사소하지 않은 중요한 기쁨이며, 관계의 진보다.

그 모든 의미에서 참 좋은 아침이었다. 어느 것 하나 인위적인 것이 없는 순간이었다.

                                            


빙수 가게에는  

삼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바로 된 테이블 한쪽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처음엔 이 가게의 주인으로 착각했다. 서너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작은 바와 한쪽에 딸린 한두 평 정도의 방으로 이루어진 빙수 가게, 아주 낡고 거대한 얼음 가는 기계가 있었고 나무 판 위에 새겨진 다양한 종류의 빙수 이름이 한쪽 벽에 나란히 걸려있었다. 사십 대 즘 돼 보이는 여주인에게 먹어볼 만한 두 가지 빙수를 추천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녀는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커다란 동그라미 모양의 손잡이를 돌려 네모진 얼음을 갈아내었다. 그리고 설탕에 조린 포도가 올라간 빙수와 맛차와 아마 낫또가 고르게 더해진 빙수를 내어 놓았다.

여자 넷은 작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 빙수를 나눠 먹었다. 지나가다 문득 이 곳을 발견했을 때, '좀 이따 봐서 오자'라고 말을 꺼낸 이도 있었는데, 다시 누군가가 '이따 말고 지금 먹어보자'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즐거움은 바로 이런 데서 오고 있었다. 다음이 아닌 지금, 언젠가가 아닌 이 순간, 그냥 해보는 것. 그 마음 하나에 이토록 즐거웠다.



유독

좁은 골목길을 좋아한다. 그래서 일본이 좋다. 이 곳에는 아직 많은 것들이 낡고 좁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취향의 시작은 아마 어릴 적 살았던 빨간 벽돌집과 그 주변의 풍경에서 기인한 것 같다. 집을 둘러싼 모든 골목길들이 동네 친구들과의 무궁무진한 놀이 공간이었고, 그 친구들이 사는 이웃집들은 물론, 슈퍼든 부동산이든 어딜 들어가도 다 아는 사이인 그런 다정한 시절이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매일 드나들었던 강남이 몇 년이 지나도록 정이 붙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엔 너무 널찍한 대로만이 많았던 탓이 가장 크다. 대로는 왠지 외롭다. 사람도 많고 차도 많은데, 모두가 타인이란 느낌이 너무 진하다. 대로에서는 모두가 ‘적’이 되는 기분이다. 골목길에서 느껴지는 안심감이 없다. 식사 시간에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된장찌개 냄새도 없고, 아스라이 들려오는 사람의 말소리도 없고, 골목길 귀퉁이에 동그란 빛을 만들며 선 가로등의 반가움도 없다.

없는 것들 투성인 곳, 내가 사는 그곳을 벗어나고파 도쿄의 골목으로 자꾸 걸어갔다.  

다행히도 골목길의 다정함을 좋아하는 여자 넷이 나란히 서서 걸으며 동네를 어슬렁거리자니, 어린 시절의 한 순간으로 돌아간듯한 따뜻하면서도 조금 슬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는

예쁜 것들이 참 많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개 내가 감당하기엔 비싸거나, 혹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전시장의 컵들은 그곳에 있을 때가 가장 예쁘다. 이상하게 집으로만 데려오면 빛을 잃어버리는 것들이 있다.

니시 오기쿠보의 골목들을 어슬렁거리며 생각한다.

'이 곳은 왜 이리 이쁜가?'

그것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아니어서일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도 좋은 곳을 만나면 습관처럼 "꼭 외국처럼 좋네."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미 익숙한 것, 눈에 익은 것, 오래도록 함께한 것들의 아름다움은 둔감해진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유럽 여행에서 이틀 정도의 일정이 지나면 더 이상 성당 안에 들어가 보지 않는 것과 같다. 예쁜 것도 자꾸 보면 그게 그것 같다. '예쁜 것'보다 앞서는 생각이 '이미 본 것'이라는 지루함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예쁘지 않은 것은 없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변덕스러움이 있을 뿐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바닥을 보며 생각했다. '사랑받는 것들은 다 티가 나게 마련이구나.' 그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다. 나란히 마주한 여자 셋을 보며 생각한다. '사랑받는 이들은 다 티가 나게 마련이구나' 그런 이들과 함께 있으면 나는 조금 좋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같이 있으면 나자신을 한없이 부족하게 느끼게 되는 이가 있고, 반대로 내가 꽤 괜찮은 사람처럼 느끼게 하는 이가 있다. 하지만 나의 생은 이상하게도 늘 전자인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며 그의 곁에서 인정받기 위해 애썼던 날들이었다. 그로부터 기인한 자괴감에서, 소심함에서, 자기혐오에서 벗어나 '애초에 내가 별로인 게 아니라 그가 나를 별로로 생각했던 것뿐'이라는 생각을 하기까지는 삼십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정하기까지는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고작

2박 3일의 일정이었다. 삼 일간 비어 두었던 낡은 아파트에 불을 켜는 순간, 먹고사는 문제는 여전히 그 모양으로 남아 있고, 팍팍한 자신 또한 그 꼴로 여전함을 새삼 상기했다.

여행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함께 떠났던 여자 셋과의 갑작스러운 친밀함도 어쩌면 얼마 가지 않아 자연 소멸하게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 또한 모르는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래도 좋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 나이이기도 했다. 사람에게 끌리는 순간의 감정에 최선을 다했다면 조금 오버스러웠더라도, 유난스러웠더라도, 지나고 나서 괜한 짓이었다는 후회를 할 필요는 없다고 느낄 만큼의 성숙함은 가지게 된 서른셋이었다. 관계의 지속성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진 대신, 친해지고 싶은 이들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는 과감함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무려

2박 3일은 낯선 장소에 다가간 여행이었다기보다, 낯선 이들에게 다가갔던 날들이었다. 어쩐지 끌리는 이들에게 망설임 없이 자신을 내보이고 동시에 자신을 드러내는 타인에 대해 친절하게 마음을 열었던 너그러운 3일이었다.

내일부터 다시 여자 넷은 각자의 먹고사는 문제에 숨 가빠질 것이고, 언젠가 또 떠나자는 약속은 지난주에 만났던 누군가에게 던졌던 '언제 밥 한번 먹어요'만큼이나 힘없는 인사치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간소해졌던 마음을 부풀어 오르게 했던 짧은 여행은 분명히 일상의 어딘가에서 숨어 있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불쑥 튀어나와 마음을 간지럽힐 것이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도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시간 때우기로 틀어 놓은 일드를 볼 때마다, 쇼윈도에 걸려 있는 원피스를 발견할  때마다 떠오르며 피식 웃음을 짓게 할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떠났던 순간이 아니라, 돌아온 후에 질척대며 곱씹을 추억에 있으니까.


네 벌의 원피스를 사고 거닐었던 도쿄에서의 3일. 참 고맙다.


인스타그램 #앨리글리희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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