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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진 Mar 06. 2019

섬에서 보낸 11일(2)

나오시마를 걷다 

오르는 계단이 가파르고, 천장이 낮아 아늑했던 다락방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비록 아슬한 계단으로 캐리어를 옮기느라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어릴 적 동화책 속에서 내 눈에만 보이는 요정을 만날 것만 같은 다락방의 분위기에, 어쩐지 이 곳에 오래 있었던 듯한 익숙함을 느꼈다. 약간 쌀쌀했던 실내 온도는 한편에 마련된 코타츠의 진가를 확인하는데 오히려 좋은 이유가 되었다. 

1층의 욕실까지 씻으러 가기까지, 자꾸만 나를 잡아당기는 이불의 유혹을 겨우 떨쳐내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욧차!

유치한 구령으로 스스로를 독려하며 섬에서의 둘째 날을 준비한다. 



나오시마는 예술의 섬이라는 별칭처럼, 섬 이곳저곳에서 크고 작은 미술관과 예술 작품을 만날 수 있지만, 우리는 지중 미술관에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했다. 여러 군데를 바쁘게 보기보다는, 한 군데를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을 한참 걸어 만난 미술관, 마치 데이트를 하러 가는 기분으로 발걸음이 가볍게 나아갔다. 낯선 공기의 흐름이 맘에 든다. 지도를 쫒아 한 발씩 내딛는 기분, 다음에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모르는 그 긴장과 설렘이 가슴을 뛰게 한다.  

지중 미술관은 지금까지 만나온 미술관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그동안 내가 알던 미술관이 예술 작품을 감상하기 위한 공간이었다면, 이 곳은 예술 작품과 함께 하는 시공간을 체험하는 순간을 위한 곳이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는 공간은 그 자체가 커다란 예술품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전시된 클로드 모네, 월터 드 마리아, 제임스 터렐의 작품은 한 작품 작품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는 사색의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 지중 미술관에서 세 명의 작가와 한 명의 건축가를 만나며, 역시 고수는 군더더기로 힘을 분산시키지 않고 단순한 핵심을 자신감 있게 내보인다는 점과 창작물에서는 영민하게 비워 둔 구석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그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이가 감정을 담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되새긴다. 

마치 꿈을 꾸듯, 다른 세계에 들어갔다 나온 듯했던 지중 미술관 관람. 사진 촬영을 철저히 금지한 곳이기에 역설적으로 더 오래 기억할듯하다. 

이 곳에서는 정적마저 작품의 일부였다. 



지중 미술관에서 나와, 이에 프로젝트를 만날 수 있는 혼무라 지구로 향하기로 했다. 

혼무라 지구는 섬 안에서 가장 번화가라 할 수 있을 장소로, 다양한 식당도 자리하고 있는 곳이니 그곳에서 점심도 해결하기로 했다. 차도 사람도 없는 산속의 도로를 한참 걸었다. 나지막하게 이소라의 노래를 틀었다. 

"난 너에게 편지를 써~ 내 모든 걸 말하겠어." 

걷고 또 걷는 이번 여행에서, 소라 언니의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음악, 새로운 영화, 새로운 드라마보다는 듣던 음악과 봤던 영화나 드라마를 반복해서 찾게 된다. 그렇게 나의 세계에 울타리가 쳐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렇게 나의 세계가 깊어지고 확실해지는지도 모르겠다. 아는 것에만 자꾸 손이 갈 때, 나는 좁아지는 걸까? 깊어지는 걸까? 


나오시마 아이스나오 


현미밥으로 건강한 한 끼를 만들어 준다는 식당을 찾았다. 

볕이 잘 드는 자리를 잡고 정식을 부탁하니, 된장국과 현미밥 두부와 몇 가지 야채 반찬이 정갈하게 나왔다. 

이런 건강한 한 끼가 얼마만인지... 혼자 산지가 6년째인데, 나를 먹이고 입히는 일이 여전히 버겁다. 나는 나를 먹이는 게 시시하게 느껴져서 자주 이를 소홀하게 때우고 만다. 그리고 자주 반성한다. 

나는 언제 즘 반성을 덜하고, 더 잘하게 될까?   



나오시마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쿠사마 야오이의 빨간 호박, 노란 호박.

빨간 호박은 숙소 근처에 있어서 이미 봤고, 노란 호박은 일부러 보러 가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그냥 넘길까도 했지만, 그래도 언제 또 이 호박을 볼 수 있겠냐 싶어서 찾아가기로 했다. 

사실, 사람들이 몰리는 곳, 유명하다하 소문난 곳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이상한 고집이 있다. 어떤 종류의 경쟁이든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 제일 크고, 그렇게 기를 쓰고 찾아가 봤자 별거 없을 거라는 섣부름도 있다. 하지만 바다와 어울려 더없이 멋졌던 노란 호박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 사람들이 몰리는 곳, 유명하다 소문난 곳에는 이유가 있지. 그런 치열한 삶의 한가운데를 피하지 않고 쫒았을 때 얻는삶의 활력이 있지.'



오래된 민가 7채를 개조해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둔 '이에 프로젝트'. 일본어 이에는 한자로 '家', 결국 집 프로젝트란 뜻이다. 

이미 지중 미술관에서 너무 큰 문화적 감흥을 받은 후여서 그랬는지, 사실 이에 프로젝트에서 만난 작품들은 나에게 인상적인 이미지를 남기지는 못했다. 한 전시관 앞에서 겪은 무례함 탓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한 전시관 앞에 서있던 일본인 직원은 어딘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주의 사항을 읊더니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존경어를 쓰지 않는 반말투가 거슬렸지만, 일본의 반말과 존댓말은 우리나라와 개념이 달라서 반말을 쓴다고 꼭 예의 없이 대하려는 것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일본어를 더 알기 쉽게 전달하려는 목적인가 생각했다. 어딘가 미묘한 태도에 당황스러움을 느낄 즘 직원은 내가 목에 매고 있던 카메라를 가리키며 이 곳은 사진 촬영이 안된다고 말했다. 주의하겠다고 말했더니,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누가 주의하래! 찍으면 안 되니까 가방에 넣으라고." 하며 다그쳤을 때는 가능한 미소로 대하고자 애쓰던 나의 표정도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어찌 보면 아주 작은 무례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온종일 가지각색의 관람객을 대하는 직원에게 있어 어쩔 수 없는 응대 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한 마디와 그 말을 내뱉던 순간의 눈빛이 종일 머릿속에 빙빙 돌았다. 

말 한마디, 그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나는 누구에게 그런 한 마디를 던진 적이 없을까?


우연히 만난 불친절한 사람에게, 나를 비춰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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