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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진 Mar 07. 2019

섬에서 보낸 11일(3)

무신론자의 불심 충만한 걷기 여행_오헨로 1일 차

오늘부터 이틀간 오헨로를 걷기로 했다. 시코쿠 내의 88개 사원을 돌아보는 순례길, 도보로 완주하려면 40일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나와 친구는 이틀간 10번 절까지만 가보기로 했다.

도쿠시마 역 캐비닛에 캐리어를 보관해두고, 2박 3일 동안 필요한 간단한 짐만 배낭에 챙겨 길을 떠났다.

오늘의 목표는 1번에서 5번 사찰까지, 반도 역에서 내려 1번 사찰 료젠지로 향했다.

봄, 가을에는 순례자의 복장을 하고 길을 걷는 사람들도 꽤 만날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갔던 12월은 비수기라 그런지 좀처럼 동행을 만나긴 어려웠다. 가끔가다 만나는 사람들은 너무 춥지 않냐는 인사말을 건넸는데, 우리에게는 한국의 가을 날씨 정도로 느껴져서 매번 오히려 따뜻하다는 답으로 응대했다.

그냥 그렇다고 할 걸 그랬나, "안 추운데요. 오히려 한국의 가을 정도라 따뜻한걸요."라는 똑같은 답변을 서너 번 즘 말했을 때, 굳이 이렇게 설명하며 부정할 필요가 있나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단순히 "그러네요"라는 인정의 한 마디를 하는 일이 습관적으로 되지 않는지도 모른다.


1번 사찰에서 납경장을 구입했다.

시코쿠 오헨로의 88개 사찰에는 반드시 '납경소'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곳에 가서 200엔을 내면 본당에 놓인 불상의 그림과 그 불상의 이름과 사찰명을 적어주는 납경을 받을 수 있다.









내가 구입한 납경장에는 각 사찰 입구가 그려져 있어서, 그 옆에 납경을 받을 수 있게 되어있다.

애초에 완주를 목표로 한 것도 아니고, 이틀만 걸어볼 건데 굳이 살 필요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납경장 속의 그림이 너무 예뻐서 사버렸는데 이후 열 번의 납경소에 들를 때마다 역시 사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중에 살까 말까 하는 건 역시 사는 게 답이었다.

마치 드래곤볼을 모으는 기분으로, 한 장 한 장 채울 때마다 근래 통 맛보지 못했던 뿌듯함을 느꼈다  나의 무작정 걷기를 누군가 지켜보고 인정해주는 기분이랄까.



납경을 받는 모습 


오헨로 길은 스티커로 표시가 되어 있다. 중간중간 길을 잃을 때쯤 나타나는 이 표시를 따라 걷고 또 걷는다.

1번부터 10번까지의 사찰은 비교적 가깝게 모여있다. 순례를 시작한 이들이 초반부터 지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가 아닐까 싶은 추측도 해본다. 우리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첫날은 20km, 둘째 날은 25km 남짓 걸으면서 하루에 반씩 완주하는 계획을 세웠다.

가는 길은 그야말로 집과 자연뿐이다. 구글 위성지도로 살펴보면, 계속해서 비슷한 여백의 풍경들이 이어진다. 가볍게 군것질을 할 편의점이나 잠깐 구경할만한 상점은 거의 만날 수가 없다. 시골 동네 혹은 국도 변을 계속 걷게 되는데 하루에 만난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그야말로 한적한 길의 연속이다.

그래도 집이 꽤 많이 보였는데 이상하게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생필품 구매는 어디서 구매하는 걸까? 이런저런 의문을 품으며 걷는 길, 이런 적막함이 싫지는 않다.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다가, 만나는 꽃의 이름을 앱으로 검색해 보다가, 그렇게 쉬엄쉬엄 길을 걷는다.



시골길에서 이상하게 계속 만나게 되는 건 말린 감과 유자나무였다. 곶감은 익숙하고 유자는 생소한데, 생각해보니 유자나무를 보는 것도 거의 처음이고 청으로 담그지 않은 생유자를 먹어본 적도 없다.



그렇게 생유자의 맛이 궁금할 즘  무인 판매소를 만났다. 근처 초등학교 아이들이 운영하면 직접 기른 과일이나 채소를 판다는 안내문이 쓰여있다.  아이들이 직접 그린 각종 채소 그림으로 정성스레 꾸며져 있는 귀여운 이 공간에서 유자를 팔고 있었는데, 이 날 깨달았다.  
'유자는 청으로 먹는 거구나.'
어찌나 시던지...

하지만 덕분에 친구와 깔깔대며 웃고, 아이들의 정성스러운 가판대에 미소 지었으니 기분 좋게 유자 값을 넣어두고 다시 길을 떠난다.


길을 걸으며 이 길이 끝나지 않을 듯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가끔은 모든 일에 마지막이 없었으면 싶다.  지겹고 끝날 것 같지 않은 중간 과정만 있었으면... 시간을 좀 낭비해도 늘 그 자리에 있는 듯싶고, 어쩐지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하지만 모두가 한창 빠져있고 서툴지만 뭔가 배워간다는 느낌이 드는 한복판에만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십 대 초반에 연도가 바뀌어도 나이를 먹지 않는단 느낌이 들었던 때처럼...


막상 또 끝이 없는 어떤 일을 하면 못 견딜 테지만.


1번 사찰 료젠지
2번 사찰 고쿠쿠지
3번 사찰 곤센지
4번 사찰 다이니치지
5번 사찰 지조지


이렇게 총 다섯 개의 사찰을 순례하니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모리모토야의 저녁 식사


5번 사찰 근처에 미리 예약해 두었던 민박집을 찾았다. 주인아주머니가 마련해주신 따스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정성스레 차려진 밥상 앞에 앉았다.

몇 년 전 서울 여행에서 놀라운 점쟁이를 만난 적이 있다는 말로 시작된 아주머니와의 수다를 즐긴 후, 방으로 돌아간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생각 없이 길을 걷고, 건강한 재료로 지은 밥을 먹고, 8시도 안되어 곧바로 잠에 드는 단순한 하루.

이 아무 일도 없음이 더없이 큰 위로가 됨을 느낀다. 마음이 건강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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