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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진 Mar 18. 2019

섬에서 보낸 11일(4)

무신론자의 불심 충만한 걷기_오헨로 2일 차

오늘도 걷고 또 걸었다.

어젯밤 숙소에서 푹 쉬고 아침도 제대로 챙겨 먹어서 그런지 의외로 몸이 가볍다.

오늘의 일정은 오헨로 6번 사찰부터 10번 사찰까지. 어제보다 약간 긴 30km 정도의 일정이다.

6번 사찰 안라쿠지

7번 사찰 쥬라쿠지

8번 사찰 쿠마다니지

9번 사찰 호린지

10번 사찰 키리하타지

운동화 끈 질끈 묶고 신나는 마음으로 출발해본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전부리를 파는 작은 가게를 발견했다. 불도 켜지지 않은 작은 가게에 갓 만든 주먹밥이 놓여있고 세월이 느껴지는 유리 진열대 층층이 수수한 요깃거리들이 가득하다. 꿀을 발라 돌돌 만 카스텔라, 팥이 들어간 찰밥, 흰 쌀로만 만든 주먹밥 같은 것들.

인기척을 한지 한참 만에 족히 아흔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 한분이 나오신다. 카스텔라 하나를 사서 나오는 길, 아침부터 부지런히 일하시는 할머니의 모습만으로 어쩐지 응원을 받으며 출발하는 기분이 든다.



길을 걷다가 어쩐지 시선이 느껴져 둘러보니 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의 여정을 훔쳐보고 있다. 사실 어제부터 느낀 감정인데 거의 사람을 마주칠 일이 없는 오헨로이지만, 어쩐지 누군가 지켜주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끝이 한참이나 먼 평원만 펼쳐진 길에 들어서서 우리는 유재하의 노래를 틀고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2018년이 며칠 남지 않았던 그 날, 괜스레 울적해지는 불안과 간질간질한 행복이 앞뒤 없이 섞이는 미묘한 기분을 안고

분명 낯설건만 이상하게 익숙한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였던 키리하타지는 산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탓에 사찰의 입구까지도 꽤나 걸어 들어가야 하고 다시 본당까지 오르려면 330계단 다시 234계단을 올라야 했는데, 좋게 말하자면 마지막을 불사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마지막 한계를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살짝 부슬비가 내리는 날씨. 씁씁후후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오른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지만 한편으로는 이 계단이 끝나는 것이 영아쉽다.


오헨로가 이리도 좋을 줄이야.

일종의 코너 속의 코너 개념으로 여행 속의 여행이었던 오헨로에서의 이틀.

생각지 못했던 커다란 감동을 안고 돌아서는 길.

반드시 11번부터 다시 걸으러 오리라 다짐해본다.

비록 한 번에 88개 사찰을 완주하진 못했지만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 하지 않았던가. 다시 이 길에 서서 걷고 또 걷고 싶다. 삶에서 이런 소소한 목표 하나즘 품는 것도 행복한 일이니 말이다. 여력이 될 때마다 다시 찾아와 조금씩 진도를 나가보리라 작은 꿈을 품으며 이 길에 마음을 남겨 두고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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