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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은마음 May 20. 2020

배만 채우면 된 걸까? (5)

불면증에 또 밤을 지새우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벽에 기대앉아 있자니 어제의 그 연어덮밥이 떠오른다.

오늘의 숙제를 하자.

잠이 덜 깨서 정신이 몽롱하지만 해야 할 일은 뚜렷하게 기억한다.


지갑과 장바구니를 챙겨서 마트로 향했다. 무슨 요리를 해야 할지는 전혀 모르겠다. 일단 식재료를 보면서 고민해볼 요량이다. 마트에서 장을 보면 주로 과일이나 이미 조리된 완제품, 또는 인스턴트 제품들만 사 먹었다. 요리엔 흥미도 소질도 없지만 결과물이 어떻게 나오던지 간에 일단 해볼 테다.


나는 오늘의 숙제를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다.


호기롭게 마트에 도착했지만 막상 진열된 채소들을 보고 있자니 너무 막막했다. 게다가 냉장고에 기본적인 장이 뭐가 있는지 확인조차 안 하고 무작정 나왔기에 된장찌개라도 끓일 수 있는 상황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모든 재료를 다 새로 사야 하는 건가... 뭔가 일이 커지는 느낌이다.

이렇게 시작하면 제풀에 꺾일게 뻔한데... 머릿속이 하얘진 상태로 빈 카트에 몸을 기댄 채 동네 마트를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르겠다. 이건 좀 괜찮으려나 싶어서 집었다가도 다시 내려놓기의 무한반복이다.


뭐가 좋을까...

간단히 해 먹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마트에 온 지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비어있는 카트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문득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집 근처 마트에서 두부를 만들어서 팔더라며 맛이 좋다고 하셨었는데.

여기에 그런 가게가 있었나? 두부 가게가 어디지?


이전에도 몇 번 와봤던 마트지만 두부 가게를 본 적이 없었기에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마트 이곳저곳을 기웃기웃 거리는데 어디선가 뽀얗게 수증기가 올라왔다.

저기구나!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그 두부집은 마트 제일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운 좋게도 갓 만든 두부가 막 진열된 참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 보고만 있어도 군침이 돈다. 꼬꼬마 시절에 어머니 따라 시장에 가면 종종 보던 판두부다. 크기도 꽤나 큼지막한 것이 제대로다. 간장에 그냥 찍어 먹어도 맛있겠단 생각이 절로 든다.

특별히 조리할 필요 없이 간편히 먹을 수 있겠단 생각에 두부 한 모를 집어 들었다.


따끈따끈한 두부다. 


손으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참 좋다. 두부의 온기가 식기 전에 얼른 집에 가야겠단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두부를 카트에 넣고 앞을 향해 가다 보니 생고기 코너가 나왔다.


어? 고기?  

그냥 굽기만 하면 되는 고기?

딱히 양념할 필요도 없고 소금, 후추만 뿌리면 되는 고기?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시연을 해보고선 소포장되어 있는 삼겹살을 집어 들었다. 평상시 같으면 고기 굽는 냄새와 기름 때문에 절대 사지 않았을 품목이다. 더구나 삼겹살은 내가 그리 좋아하는 고기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일단 목표로 한 숙제를 해야 한다.

몇 그램을 사야 하는지도 전혀 감이 잡히질 않지만 일단 300g짜리 2팩을 집어 들었다.


두부 식기 전에 얼른 가야지!

마음이 급하다.




두부가 식는다는 생각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헐레벌떡 두부부터 꺼냈다.

다행이다. 여전히 따뜻하다.

먹기 좋게 적당한 굵기로 두부를 썰어서 접시에 놓았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차려주셨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지만 어떤 맛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맛있게 먹었던 거 같긴 한데...


맛이 어떠려나...

...... 아......


썰어놓은 두부 한 귀퉁이를 젓가락으로 살짝 잘라내 먹는데 씹을 새도 없이 따끈따끈한 두부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별다른 양념 없이 그냥 먹어도 너무 맛나다. 이 집 두부가 이런 맛이었구나... 양념 없이 먹을까 하다가 간장에 살짝 찍어 먹어볼 심산에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어머니께서 가져오신 집 간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으로 줄줄이 놓여있는 국간장, 양념간장, 된장, 고추장... 어깨도 안 좋으신 어머니께서 여행가방에 가득 실어서 가지고 오신 장들이다. 뭐하러 무겁게 다 들고 오셨냐며, 마트에서 사면된다고 짜증 냈던 그 장들이다. 불현듯 떠오른 그 장면에 마음 한구석이 아린다. 염치없는 딸은 그 간장을 종지에 조금 따라내고선 서둘러 두부를 먹기 시작했다.


제법 큰 두부 한 모를 순식간에 다 먹었다.

혼자서 이 큰 두부를 앉은자리에서 다 먹을 줄이야!

내가 직접 칼질 몇 번 했다고 평범한 두부가 더욱 맛난 두부로 둔갑하는 마술이라도 벌어진 듯하다.


나 자신을 위해 내가 스스로 음식을 차려본 적이 언제였는지 떠올려 보려 해도 너무 까마득한 옛날이라서 제대로 기억해내지도 못하겠다.


그래, 이따 저녁에는 삼겹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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