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무렵 정기검진차 종합병원에 들렀다.
어김없이 괜스레 기운이 빠지는 그런 날. 병원 특유의 냄새를 맡으면 괜히 어딘가 더 아픈 것 같은 그런 날.
몸 상태가 좋건 안 좋건 간에 병원에 간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의 기가 크게 꺾인다.
진찰이 끝나고 처방받은 약을 타러 약국을 가기 위해 병원 셔틀버스 정거장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버스 문에서 옆으로 비켜나 서있으셨다.
가만 서있으신 모습에 누굴 기다리시나 스치듯 생각하며 버스에 올라탔다.
탑승객이 모두 제자리에 앉자 그제야 노신사도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내 뒷자리에 앉은 누군가의 옆에 앉았다.
부인이었다.
귀가 잘 안 들린다는 이야기로 노부부의 대화가 시작되었는데, 평상시라면 당연히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 보느라 남의 대화는 듣지 않았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이어폰을 꽂고 싶지 않았다. 버스 앞에 서있으시던 그 모습이 이상하게 뇌리에 계속 남아 설까...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으나 귀는 뒤를 향했다.
"(할아버지) 이제는 귀가 왕왕거리고 잘 안 들려. 큰일이야. 들리는 게 문제가 생기니 큰일이네."
"(할머니) 보청기를 해야 하나? 나이 들면 다 그런 거죠. 괜찮아요."
(침묵)
"장례식장은 여기로 해야겠지?"
"응. 여기가 괜찮은 거 같아요. 나중에 당신 집 될 곳이니까 잘 봐 둬요."
"OO 병원도 괜찮지 않나?"
"거기는 교통이 불편해서 안돼. 여기가 애들 회사에서도 가깝고, 애들 회사 사람들 오기 편하려면 이 병원이 교통도 좋고 다 좋아요. 어차피 우리 친척들은 올 사람도 몇 없잖아. 대부분 애들 회사 사람들이 올 텐데 교통 편한 데로 잡아야지."
"그렇지. 여기가 좋겠네."
"응. 그렇지만 10년 뒤 얘기예요. 지금은 건강히 잘 지내면 돼요."
(침묵)
" XX 커피숍이 커피가 참 맛나더구먼. 당신, 거기 가서 한 잔 마셔요."
"거기가 원두가 맛이 좋더라고요."
"... 나는 마시면 안 되겠지? 나는 언제쯤 마실 수 있으려나?"
"10년 뒤에."
"... 근데 그 집 원두가 말이야... (중략)"
노부부의 대화를 곱씹다가 눈물이 핑 돌았다.
부모의 사랑은 어디까지인 걸까...
자식들 편하라고 장례식장 교통 편의를 최우선 순위로 꼽다니... 부모는 죽어서도, 관에 들어가서도 자식 걱정이구나...
잠시 후 셔틀버스가 도착지에 다다르자 노부부를 비롯한 승객 모두가 차례대로 내렸다.
남편의 팔짱을 낀 부인의 안내로 노부부는 나와 같은 약국을 향했다.
노신사는 대기 의자에 앉아 순번대로 약을 타는 부인의 모습을 조용히 눈으로 좇으며 기다렸다.
이런 대화를 나누는 노부모이자 노부부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각자, 또는 함께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직 자식도 없고, 살 날이 살아온 날보다는 많이 남았으리라 막연히 생각하는 지금의 나로서는 당최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자식이 대체 뭐길래, 뭐가 그리 애달픈 자식 사랑이길래 교통편까지 고려해서 장례식장을 벌써 정하시냐며 울컥한 마음에 생면부지 노부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사실, 그 질문은 나의 부모에게 향한 것이리라...
뭘 그리 자꾸 챙겨 주시려 하시는지, 다 큰 딸내미 걱정은 그만 하셔도 된다고. 자식들 걱정은 내려놓으시고 자유롭게 사시라고. 괜스레 투정 부리고 싶은 못된 자식의 마음이다.
오래오래 건강하시라고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애써 꾹꾹 누르고 마음속으로 노부부의 건강을 빌며 약국을 나섰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 남은 노부부의 대화 마지막 부분.
당신 살아생전 커피는 안된다는 함의가 담긴 할머니의 단호한 말투와 애써 아쉬운 마음을 지우려 하나 지우지 못하고 그 맛있다는 원두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던 할아버지의 간절한 말투.
자식이 무슨 소용이랴. 역시 건강 챙겨주는 건 늘 옆에 있어주는 짝꿍뿐인 것을!
자식 사랑도 좋지만, 두 분 사랑이 오래도록 빛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