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같은 일상의 반복, 무슨 재미로 사나요?

삶이 무미건조한 사람에게

by 노형균

의학과, 의예과 대나무숲에 올라온 후배들의 고민 포스팅에 과거 자주 댓글을 달았었는데 근래에는 바빠서 그러지 못하다가 오늘 오랜만에 댓글을 달았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답하려 했는데 추가 수정을 여러 번 거듭하다 보니 아마도 역대 가장 긴 댓글이 된 듯하다. ^^

글을 쓰고 첨언하면서 이는 나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라 여겨졌다.


의학과, 의예과 대나무숲에 올라온 의예과생의 고민은 다음과 같다.


# 14772번 차트 #고민


본과 선배님들 그리고 의사 선배님들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본과에 진학 시 거의 공부만 해야 하고 의사가 되어도 매일 일해야 할 건데,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면은 어떤 재미로 다들 인생을 사시는지 궁금합니다. 최근 들어 삶이 무미건조한 것으로 느껴지네요.


이에 댓글을 달았다.


인생을 건축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내가 살고 일하는 공간을 만들려면 건물을 짓기 전에 먼저 땅을 파야 합니다. 땅을 넓고 깊게 팔수록 더 크고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큰 건물일수록 기초작업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 돈이 소요됩니다. 본과 때 공부하고 인턴, 레지던트 수련을 받는 건 의사, 전문의가 되어 환자를 돌보는 병원을 짓기 위해 땅을 파는 기초작업이라고 보면 됩니다. 땅 파는 건 그리 재미가 없을 수도 있고 단순하고 지루한 작업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땅 파는 작업에서도 재미와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그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땅을 파는 동안에도 땅만 파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음악도 듣고 땅 파다 배고프면 맛있는 음식도 먹고 휴식도 하고 같이 땅 파는 동료와 대화도 하고 하다 보면 거기서 행복과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의대를 진학하지 못해 의사의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글쓴이를 무척 부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부디 행복한 의사가 되길 바랍니다. 행복하기 위해선 불평, 불만보다는 감사하면 됩니다. 의대에 들어올 수 있는 좋은 머리를 주시고 키워주시고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강의해주시는 교수님들께 감사하고 친교를 해주는 친구들에게 감사하고 의사가 될 수 있게 가르쳐주는 환자들에게 감사하면 됩니다. 식당에 갔을 땐 밥 차려주는 식당 주인한테 감사하고 버스 탈 땐 운전해주는 기사한테 감사하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꿋꿋이 잘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게 감사하면 됩니다. 글쓴이의 글에서는 약간의 우울감이 느껴지는데 감사는 우울감도 감소시킵니다. 지금 우울하다면 객관적으로 감사할 일들을 찾아 적어보세요. 그러면 불만과 우울이 사라지고 다행이다 싶고 행복해질 겁니다. 일회성으로 그칠 게 아니라 감사일기를 일주일에 한두 번 5분 간이라도 써보세요. 놀라운 변화가 생길 겁니다.

명상도 권하고 싶습니다. 학습, 스트레스 감소, 건강, 노화방지, 장수 등에 도움이 됩니다.

부디 자신의 안에서 이미 행복할 수 있는 요인들을 찾아 깨닫고 그 행복을 만끽할 수 있길 바랍니다.


P.S. 글쓴이는 본과 진입을 앞둔 예과생 같은데 2년간 잘 놀다가 좋은 때 다 가고 이제 곧 본과 진입해서 공부하고 졸업하면 인턴, 레지던트 수련받고 환자 볼 생각에 우울한 겁니다. 마치 방학이 끝나가는 학생이나 주말 신나게 잘 놀다가 일요일 저녁이 되면 내일 월요일 출근해서 일할 생각에 우울해지는 직장인과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이라면 개학이 기쁠 테고 일을 즐기는 직장인이라면 출근이 설렐 겁니다. 수년 전 내가 이비인후과 동문회를 일요일 저녁에 갔을 때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개원한 후배가 "내일이면 또 출근해서 환자 볼 생각하니 우울하다."는 푸념을 했습니다. 그때 난 보건소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는데 난 반대로 "내일 출근해서 일할 생각 하니 설렌다."라고 말했습니다. 보건소장 때만 그랬던 게 아니라 많은 직장에서 그랬습니다. 일하는 게 아니라 노는 것 같고 (하는 일 없이 노는 게 아니라 바쁘게 회의도 하고 출장도 다니고 결재도 하고 골치 아픈 민원해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일이라기보단 놀이 같았습니다.) 월급날이면 놀고도 돈을 받아서 미안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모든 직장이 그럴 순 없겠지만 자신의 적성에 맞고 즐길 수 있는 일이면 그렇게 됩니다. 설사 적성에 맞지 않고 즐길 수 없다 해도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란 말이 진리입니다.

년 365일 날이 맑으면 사막화되듯이 맑은 날이 있으면 비 오고 흐리거나 비바람이 치는 날도 있게 마련입니다. 지금 글쓴이는 무상(無常)의 도(道)를 깨닫지 못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변화를 받아들이고 순응하면 됩니다.

본과 올라가서 바쁘게 공부하다 보면 지금과 같은 불안과 우울도 자연히 없어집니다. ^^

그리고 지금은 모르지만 본과, 인턴, 레지던트, 전문의 생활을 하면서 그때가 되면 느끼고 경험할 재미와 보람과 행복감이 반드시 있습니다. 예과 때 놀 때 느끼는 행복감과는 차원이 다른. 죽을뻔했던 사람을 내 손으로 살리는 경험은 아주 특별한 보람이 있습니다. 내가 낸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면 뿌듯하고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나는 새로운 직장을 갈 때마다 여기보다 더 좋은 직장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직[3~4년 주기로 (때론 1~2년) 10번 정도 이직. 이직의 주된 목적은 새로운 경험과 배움, 성장.]하고 나면 항상 더 좋았습니다. ^^ 우리의 인생에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좋은 일들이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희망을 갖고 본과 생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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