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주의 출산의 기억
2017년 8월 31일, 너를 만난 날을 다시 떠올리며
우연히 ‘자연주의 출산’을 알게 되었다.
의료진이 아닌, 산모와 아이가 주체가 되는 출산.
내 몸이 열리는 순간을 기다려주는 출산.
그 가능성 앞에 마음이 열렸다.
진통이 오는 동안, 원하는 자세로 움직일 수 있고,
먹고 싶은 걸 먹고, 처음부터 끝까지 남편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축복이가 태어났을 때, 신생아실이 아닌 부모의 품에서,
작고 따뜻한 온기를 안고 캥거루 케어를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결심을 더욱 단단하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아이가 나올 준비가 되었을 때 그 시간을 기다려주고 싶었다. 세상의 빛을 만나는 그 귀한 순간을 누구보다 아이의 리듬에 맡기고 싶었다.
그리하여
관장 X. 제모 X. 촉진제 X. 무통주사 X. 회음부절개 X
모두 하지 않고 축복이를 만났다.
있는 그대로의 몸으로 축복이를 만나기로 했다.
그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갈색혈을 보고 문자를 보냈고,
조산사님이 전화를 주셨다.
이슬이예요!
축복이가 '엄마 나 준비 됐어요'라는 신호예요
이번 주에 아가 볼 수 있겠네요.
두근두근....
우리 아가... 이제 준비가 됐구나.
심장이 몽글몽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출근한 남편에게 이슬이 비쳤다는 문자를 보내 두었고,
최후의 만찬을 즐기러 닥터로빈에 갔다.
이때까지는 생리통스러운 가진통으로
얼굴이 살짝 찡그리는 정도였기 때문에
저녁 먹고 한강도 걷고, 참을 만했다.
새벽 4시. 진통이 느껴져 잠에서 깼다.
가진통인지, 진진통인지 모르겠어
어플 키고 간격 체크.
남편이 깨지 않도록 혼자 조용히 호흡하고,
교육 때 배운 부교감신경을 셀프 쓰담쓰담하며 견뎠다.
진통 주기는 10분 이내였고, 조산사님께 문자를 보냈다.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는지 남편이 깨서
마사지도 해주고 그러다 스르르 잠들었던 것 같다.
10분 이내로 오던 진통이
오후가 되자 30분 간격으로 왔다.
조금은 완화된 느낌.
남편은 출근시키고, 짐볼 위에 앉아
히프노버딩을 틀어두며 파도를 견뎌냈다.
축복아 이제 곧 나오려는구나
엄마도 씩씩하게 잘해볼게
우리 건강하게 만나자
배를 쓰다듬으며
아가에게 계속 말해주었다.
간격이 5분 이내가 되니 점점 더 힘들어졌다.
요가매트에서 고양이 자세로 호흡하고
히프노 버딩을 틀어두며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하려 했다.
그렇게 집에서 26시간을 보내고,
새벽 5:30. 병원으로 출발.
6:00. 출산센터 도착.
내진결과.
3cm 열렸네요
좌절스러웠다.
집에서... 26시간을 견디다 왔는데....
이제 시작이라고요?
집이 다시 다녀오겠냐 묻는데..
다시 갈 자신이 없어, 출산센터에 들어가기로 했다.
오늘(30일) 안에는 축복이를 만날 거라며.
희망을 갖고 들어간 곳.
하지만 3cm 열렸다는 말에
계속 눈물이 흘렀다.
조산사님도, 내가 집에서 26시간을 진통하다 왔고,
주기를 봤을 때 많이 진행됐을 줄 알았는데
3cm가 웬 말이냐며......
충분히 힘겨웠는데
이제 시작이라는 말에 하염없이 울었다. 엉엉...
그렇게 아침 9시가 되었고
조산사님이 이렇게 잘 먹는 산모는 처음 본다며.
내가 먹는 걸 보니 배고파진다 하셨다.
남편이 떠주는 거 다 먹고 한 그릇 뚝딱.
체력이 필요하기에
힘내기 위해 계속 먹었다.
점심은 외식하려 했는데,
식당에 앉아있기 힘들고
호흡도 힘들어 다시 들어왔다.
남편이 후다닥 포장해 온 점심
울다가 먹다가 울다 먹다
내가 힘들어하니, 개구장스럽게 웃으며 기운 내게 해주는 남편
자연주의는 남편도 함께하는 출산이라
남편의 체력과 역할이 참 중요하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조산사님이 들어와 내진을 했고
5cm 열렸네요
진통수치가 100을 찍어야 아가가 나온다는 데,
길어지는 시간에 심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다.
그런 나를 옆에서 돌봐주고 케어해 주는 남편
우리 좀 더 힘내보자며
비상구 계단도 걸어보고
런지 비슷한 운동도 하며
파도(진통)를 보냈다.
자궁 7cm 열리다
점점 강도도 세지고,
진통주기도 짧아졌다.
화장실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니 조금 완화되는 느낌이 들어
한참을 따뜻한 물을 맞으며 서있었다.
그리고 변기에 앉으니,
견디기 수월한 느낌이 들어 한참을 있었는데...
조산사님이 변기에 있으면 입구가 부어
아기가 나오기 힘들어진다 해서 후다닥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ㅠㅠ 부었단다. (좌절)
그렇게 2~3시간이 지나고 내진을 하니 이제 부기가 가라앉았다고. ㅠㅠ 부은 바람에 3시간 진통을 하며 부기를 가라앉혀야 했다.
샤워한 것이 출산을 더디게 한 것 같다며.
고려했던 수중분만이 나와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셨다.
그렇게.. 밤 10시가 되었다.
자궁 9cm 열리다
이제 거의 다 온 건가?
새벽엔 우리 아기 볼 수 있는 건가?
조산사님은 수중분만보다
둘라선생님을 불러보는 게 어떻냐며 제안했다.
거진 42시간 동안 진통한 상태라 남편도 나도
잠도 못 잔 채 지쳐있던 상황.
우리는 둘라선생님과 함께하기로 했다.
자정 12시.
둘라와 함께하다
든든한 지원군이 있는 느낌.
진통이 왔을 때 둘라샘이 만져준 통증완화법은
전문가라 그런지 달랐다.
남편, 둘라샘이 함께 해주니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더 힘을 내보기로 한다.
진통이 오면 너무 힘겨웠지만
양 옆에 둘라샘, 남편에게 기대어 한 발 한 발 출산센터도 걷고, 열심히 출산진행에 힘썼다.
그렇게 새벽 4시가 됐을까...
비현실적인 진통을 느끼다.
말로만 듣던.. 그 진통인가.
이성적일 수 없다는 그 통증.
최고조의 진통이 오다
살려달라 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진통간격. 1분이 채 안 돼서
마구 찾아왔다.
잠도 이틀간 못 자고 48시간 진통한 상태에서
그렇게 최고조의 진통을 맞았다.
진통을 표현하는 느낌들이 참 많다.
별로 적고 싶지 않은 표현들..
진통이 멈춘 찰나의 순간
정신을 잃은 건지, 기절한 건지, 잠이 든 건지..
기억이 없다.
그러다 진통이 찾아오면 온몸에 번개가 치듯 힘들었다.
그렇게 3시간이 지났나....
호흡도 조절이 안되고 둘라선생님한테 너무 힘들다고
망연자실하게 못하겠다고 다른 방법 없냐고 그랬다.
없단다.ㅜㅜ 그 말을 하는 거 보니
거의 다 온 거라며 나름의 힘을 주셨다.
그 말조차 원망스러웠던,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뎠나 싶다.
그렇게 아침이 밝았다. (하하)
힘을 줘야 할 시간이 왔다.
진통이 오는 순간,
있는 힘껏 힘주기에 돌입했다.
조산사 샘이 알려준 대로.
힘주면 아이가 쑥쑥 잘 나와 주는 줄 알았는데.
웬걸. 정말 느릿느릿 나온다.
힘주기도 3시간~4시간 한 것 같다.
머리가 보인다고 하여
정말 미친 듯 힘을 냈다.
이제 정말 다 왔다는 희망이 보여서인지
다시 초인적인 힘이 났다.
남편, 조산사님, 둘라샘 모두가 합심하여
누워서 힘을 주다가 출산의자에서 힘주기를 해보았다.
밑이 뚫려있어 아래서 거울을 비춰
아기 머리를 보여주셨다.
까맣고 작은 머리통이 보이는데 너무 신기했다.
머리가 나오고
얼굴이 나오고
*꼬에 수박 낀 느낌이 뭔지 알겠더라.
빨리 빼내고 싶었지만 힘조절을 잘 못하면
회음부에 열상을 많이 입을 수도 있어
조산사님이 하라는 대로 했다
힘주라면 힘주고
힘 빼라면 힘 빼기
거의 어깨까지 나온 듯했고
"힘 빼세요"라는 말에
온몸에 힘을 쫘악 뺐고
후두두둑
축복이가 쏟아져 내려왔다.
우리 아가 세상에 나온 걸 환영해
조산사님이 알려주시는 대로
남편이 축복이를 받았고
내 옷이 훌러덩 벗겨지고
축복이가 가슴 위에 올려졌다
그렇게 55시간 만에 만났다. 우리 아가.
보들보들 맨들맨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기의 감촉.
축복이는 우렁차게 울었다.
너도 나오느라 힘들었지
건강히 나와주어 고마워.
아가가 태어나, 품에 안기는 순간.
드디어 해냈다는 안도감과 묘한 감정이 오갔다.
2박 3일. 총 55시간 동안 쌩 진통하며 얼마나 기다려 오던 순간인가.....
'내 아가 나오고 싶을 때 언제든 나오렴
엄마가 기다려줄게.' 해놓고,
거센 진통이 계속 휘몰아치는 순간에는
거북이 달팽이 걸음 걷듯 느릿느릿 나오는
축복이가 원망스러웠다. 그 마음에 대한 미안함과
내 품에 안겨 젖을 힘차게 빠는 느낌의 어색함.
축복이는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궁금함.
참 다양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오갔다.
"어떻게 생겼어?"
계속 물어봤던 거 같다.
"예뻐?"
"응. 너무 예뻐"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이쁘다 우리 아가.
축복아, 세상에 온 걸 환영해
남편은 아내의 진통, 출산. 전 과정을 함께 하면서, 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탯줄을 자르고, 가슴에 안아 품으로 맞이했다. 자연주의 출산은 그 순간에는 힘겹고, 기다림의 순간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축복과 환영의 과정이었다.
출산을 앞두고,
출산후기를 계속 읽었던 것 같다.
아가는 어떻게든 건강하게 잘 만날 거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
낳은 이후에 어떻게 키울지 더 생각해 보라는 말.
당시엔 와닿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가장 맞는 말이지 싶다.
난 자연주의 출산 중에서도 오래 걸린 케이스 같지만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혼자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출산을 겪어보니, 어떤 출산이든,
자연주의, 자연분만, 제왕절개
어떤 형태의 출산이든, 아이가 선택한 것이니 모두 다 소중하고 감사한 여정이었다.
어떤 출산이든, 아이를 건강하게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니 말이다.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을
온전한 기다림으로 맞이했듯
앞으로도 기다림으로
함께할 수 있는 엄마가 돼주고 싶어.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너란 존재.
다시금 너를 축복하고 환영해
내 딸로 세상에 와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