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북] 내 안의 소리를 알아야 진짜 나를 알 수 있다
작다는 이유로 울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각자의 소리를 가지고 있다. 크든 작든, 내면이든 외면이든, 그 소리가 언제 드러날지는 모르지만, 결국 언젠가는 자신만의 소리를 내는 순간이 온다.
모든 물체는 고유한 진동수를 가진다. 소리가 공기를 통해 물체에 전달될 때, 그 진동수가 물체의 고유 진동수와 일치하면 흔들림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유리가 깨지는 순간은 그 고유 진동수와 일치하는 외부의 진동이 작용한 결과다. 우리는 실제로 소리만으로 유리를 깨뜨릴 수 없지만, 양철북에서는 주인공 오스카가 소리를 지르면 유리가 깨진다. 처음 이 설정을 접했을 땐 황당하게 느껴졌다. 중국 무협지의 ‘사자후’를 연상시키는 코믹한 요소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속에는 깊은 상징이 숨어 있었다.
오스카가 발하는 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유리의 투명함은 순수함을 의미하고, 유리가 깨지는 것은 그 순수성이 깨짐을 상징한다. 오스카는 자라지 않은 채 어린아이의 모습을 고수하며, 순수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 인간의 이상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상이 어떻게 충족될 수 있을까? 오스카가 바라본 세상은 추악하고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가득하다. 그는 자신이 지키려는 순수함을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카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 선택은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이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오스카의 미약한 몸부림이 유리 깨짐으로 표현된다.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소극적인 몸부림을 이어가던 오스카는 이제 양철북을 두드린다. 양철북은 순응을 거부하고 한계를 넘어서는 적극적인 행위로 변모한다.
세 번째 생일날 받은 양철북을 손에 쥔 채, 오스카는 그것에 집착한다. 이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마다 찾는 돌파구와 같다. 불교에서는 이를 '집착'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지만, 때로는 집착이 생존의 유일한 길이 되기도 한다. 생명은 끝까지 살아가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즐겁든 아니든, 각자의 방식은 분명히 존재한다. 오스카에게 양철북은 생존을 위한 본능의 수단이었다. 양철북을 뺏기는 것은 자신을 잃는 것과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하며, 자기 세계에서 살아 있음을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오스카의 부모는 그야말로 복잡한 관계 속에 있다. 오스카의 어머니는 우연히 지나가던 남자의 씨를 받아 임신했다. 그녀는 독일인 요리사 마체라트와 결혼했지만, 이미 사촌 브론스키와 불륜 관계였다는 점에서 오스카는 아버지의 정체조차 명확하지 않다. 이중적인 어른들의 모습은 오스카의 외면과는 또 다른 지적인 성숙함을 대비시킨다. 누구나 이중성을 지니고 있으며, 때로는 그 이상의 면모를 갖고 살아간다. 그런 모습들은 결국 나를 지키려는 본능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자기 소멸은 자기 성장의 시작이다. 아버지 마체라트가 죽고, 그의 양철북이 함께 매장될 때, 오스카는 성장의 거부에서 성장을 원하는 자신으로 변해간다. 그림자의 어두운 뒷면에만 머물지 않으려 한 것이다. 오스카는 이후 누드 모델이 되어 마리아와 쿠르트를 지키려 한다. 이는 인간의 파괴된 모습을 정직하게 고발하는 행동이었다. 양철북의 핵심은 단순히 소리가 아니라, 자기 파괴를 통해 세상의 부정을 전하는 과정이다.
위선과 가식 속에 자신을 감추려 한다면, 결국 진정한 자신을 찾기 어렵다. 오스카는 자기를 파괴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려 한다. 세상이 아무리 타협하지 않으려 해도, 그건 세상의 소리일 뿐이다. '누구나 죽음을 맞는다'는 변하지 않는 운명 속에서, 내가 가진 떨림에 집중하고, 내 소리를 외칠 때, 비로소 삶은 나의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