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이 없는 커뮤니티
공~ 공~
아침 5시 30분이, 공명한 공소리에 눈을 뜬다.
기상을 알리는 공이 울리기 전부터 텐트 안으로 살짝 들어오는 따뜻한 햇빛이 들어 온다. 텐트 안으로 들어오는 새소리에 잠에서 깼지만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이불 안에서 밍기적거리는 느낌이 좋아서 가만히 누워 있는다.
숲 속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일어나는 건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마인드풀니스 프로젝트에 들어온 지 일주일 정도 지나니 이 곳의 새로운 일상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처음 며칠은 제대로된 시설이 하나도 없는 정글 생활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모기, 거미, 지렁이, 지네, 나방, 반딧불이, 전갈 등 내가 아는 모든 곤충들과 함께 살아간다. 처음엔 벌레가 나올 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질색 팔색을 해댔지만, 일주일 만에 얘네들이 내 잠자리만 침범하지 않는 이상 괜찮아졌다. 얘네랑도 같이 살아간다. 생각해보면 이 곳에 주인은 얘네들이고 불쑥 침범한 외부인이 나니까.
아침에 일어나는 순서대로 이를 닦고 화장실을 갔다가 공동생활공간으로 향한다. 먼저 일어난 부지런한 친구들은 늦게 일어나는 친구들을 위해 요가 매트를 펼쳐 놓는다. 일찍 일어난 사람들의 배려 덕분에 매일 아침 6시, 이 곳의 첫 번째 스케줄인 요가 클래스가 시작된다.
Good morning
요가 티처가 웃으면서 인사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아침을 먹을 때까지는 침묵을 지켜야하는 룰이 있다. 새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 모두 요가 동작을 따라한다.
설립자 부부인 안야가 아침 요가를 가르치는데 그녀만의 특유의 온화한 미소와 엄청나게 긍정적인 에너지는 전염성이 너무도 강해서 그녀를 보고 앉은 모두를 편안하게 만든다. 그녀의 친절한 가이드로 한 시간 반의 젠틀한 요가는 스무스하게 진행된다. 이어서 크리스찬이 20분간의 아침 명상을 가이드하면 첫번째 스케쥴이 끝난다.
Morning silence의 룰은 많은 사람들과 붙어 지내면서 의도치 않게 생길 수 있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고 서로의 공간을 지켜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가끔 입이 근질근질해도 침묵을 깨는 시간 전까지는 서로를 위해 최대한 말을 아낀다.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다같이 대청소를 한다. 정원에 물 주기, 정원 잡초 정리, 공동생활공간 청소, 화장실 청소, 마당 청소, 텐트 청소, 아침식사 준비같은 일들이다. 매일 당번을 바꿔서 돌아간다. 이 시간은 카르마 요가라고 불리는데 무슨 일을 하게되든 그 활동에만 집중해서 해야하기 때문이다.
삼삼오오 흩어져 30~40분 정도 맡은 일을 조용히 완수한다. 모두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일은 단연 맛있는 아침식사 만들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원에서 잡초를 뽑고 물을 준다. 농사의 절반은 잡초 뽑는 일이라고 매일 무성히 자라나는 잡초 때문에 아침부터 땀을 흘린다. 아침식사 준비를 끝낸 팀이 공을 울리면 모두 키친으로 모인다.
아침 식사는 신선한 열대과일 한 그릇에 날에 따라 오트밀, 초콜릿 무슬리, 팬케이크, 스크램블 에그가 준비된다. 모두가 배식을 할 때까지 먼저 먹지않고 기다려준다. 동그랗게 둘러앉아 이 음식들이 우리에게 오는 과정까지 수고해주신 농부, 기사, 상인들에게 감사하는 짧은 기도를 올린 뒤 먹기 시작한다. 아침 식사도 고요한 침묵 속에서 마인드풀 잇팅(mindful eating)을 한다. 새소리, 풀벌레 소리만 가득한 곳에서 그릇과 수저가 부딪히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린다.
아침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순서대로 사용한 그릇과 식기는 각자 설거지하러 일어난다. 부탁하지 않아도 치우러 가는 김에 옆에 있는 사람의 그릇도 치워준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돌아가면서 서로의 일을 덜어주는 작은 배려를 해준다.
설거지 후에는 다시 모두가 공동생활공간에 동그랗게 모인다. 드디어 모닝 사일런스가 끝나는 시간이다. 매일 아침 침묵을 깨는 방법이 새롭고 재밌어서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그 날의 인원 수의 딱 절반 숫자에 맞춰 한 사람당 하나의 번호를 받게 되는데 같은 번호를 받은 두 사람이 서로를 찾아 꼭 껴안아준다. 한 15초 정도는 온마음을 담아 꼭 껴안아 준다. 따뜻한 포옹과 함께 그 날 처음으로 입을 열어 인사를 한다.
'잘 잤어?', '오늘 기분은 어때?'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게되거나 서로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는 기회가 된다. 반가움에 달려가는 사람, 수줍어서 주저주저하는 사람, 어디 있는지 몰라서 찾는 사람들때문에 이제서야 공동생활공간이 시끌시끌해진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아무 이유없이 안아본 적이 없었기에 낯설었지만 아침마다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 참 좋았던 것 같다.
침묵을 깨는 허그타임 뒤에는 마인드풀니스 프로젝트의 메인 활동이 시작된다. 하루에 약 4~5시간을 강도 높은 노동을 하며 보낸다. 40도는 가뿐하게 치솟는 태국의 한여름 땡볕에서 일하려면 중무장을 하고 나가야 한다. 친환경 농사와 점심식사를 준비하는 몇 명을 제외하곤 모두 공사장으로 향한다. 망가져도 괜찮은 헌옷더미에서 누더기 같은 옷으로 갈아 입고 다 헤진 모자를 쓰면 준비 완료!
이런 육체적 노동에 익숙한 사람은 없었다. 대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거나 공부하는 학생들이 모인 터라 다 초보 일꾼이었다. 친환경으로 건물을 짓는 방법을 배우는데 제일 먼저 벽돌을 만드는 법부터 배운다. 퍽퍽한 진흙을 양동이에 가득 담아 웅덩이로 나른 뒤 그 곳에 물을 부어 다같이 발로 밟는다. 벽돌을 만들기 적당한 점도가 되면 반듯한 벽돌을 만드는 곳으로 다시 옮긴다. 운반하는 팀, 머드 밟는 팀, 벽돌만드는 팀 삼삼오오 나눠서 반복적인 육체노동을 하다보면 시간이 금방 간다. 눈치껏 일하고 눈치껏 쉰다.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필요한거 있어? 내가 도와줄게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었을까. 힘들어 하는 게 보이면 어떻게 알았는지 누군가 나타나서 손을 내민다. 도시에 살면서는 학교든 회사든 경쟁적인 분위기에 길들여져 있었는데 여기에선 바라는 것 없는 친절함이 아주 낯설었지만 정말 좋았다. 적이 하나도 없는 느낌이랄까.
올해 초부터 지었다는 샤워시설과 화장실은 시간이 지나면서 완성이 되었다. 일련의 과정들이 크리스찬의 지휘에 따라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크리스찬은 정말 친절한 똑똑하게 우리를 지도했지만 같이 일하면서 독일인 특유의 빡셈을 몸소 맛볼 수 있었다. 현대판 나치 강제수용소(Konzentrationslager)를 만든게 아니냐며 그를 놀릴 정도였으니까.
오후 2시가 넘으면 멀리서 공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점심을 먹으라는 알림이다.
그 때즘이면 요리하는 팀을 빼곤 모두 몸과 머리까지 온통 땀과 진흙 범벅에 얼굴은 빨갛게 그을려 상기되어 있었다. 모두가 모여 배식하는데까지는 30분이 걸린다. 그 날에 셰프가 어느 나라사람이냐에 따라 메뉴가 달라지는데 점심은 보통 배를 채울 수 있는 밥 위주의 음식들이었다. 고된 노동 후 먹는 음식은 누가 뭐를 내어주던 정말 맛있었다. 이 곳에서 먹는 음식은 모두 채식이었다.
내가 처음 주방팀이 되는 날엔 남은 재료들을 살펴 보다가 잡채를 하면 좋겠다 싶어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레시피를 받았다. 싱가폴에서 살면서 가끔 친구들이 놀러오면 요리를 해주는 걸 좋했는데 거의 50인분이나 되는 요리를 하는 건 진땀 나는 일이었다. 엄마가 알려준대로 어찌어찌해서 잡채 50인분과 가져간 고추장으로 볶음밥을 해줬는데 반응이 너~무 좋아서 그 다음날 주방팀에 또 보내졌다.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잡채를 성공한 뒤 자신감이 붙어서 김밥에도 도전했는데 이번에도 성공! 숨겨져 있던? 요리 실력을 보여준 나는 덕분에 땡볕에서 일하는 날보다 주방에 있는 날이 늘어나서 정말 감사했다.
점심 식사 후에는 샤워를 하고 자유시간을 가진다.
비록 지붕도 없는 공간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서 부어 하는 샤워지만 그 물이라도 쓸 수 있어 정말 감사했다.
자유시간에는 도란도란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카드놀이, 그림 그리기, 독서, 외줄 타기 연습, 빨래, 공놀이, 기타 연주 등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따로 또 같이 보낸다. 인터넷이 되지만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라별로 다른 문화와 사회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나누다 보면 배우게 되는게 참 많았다. 서로 다른 곳에서 자라왔지만 도시생활에서 경험하는 고민들이 비슷해서 놀라웠다. 거기선 시간이 한 템포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무엇을 위해 아둥바둥하고 살아갔던 걸까?
초저녁이 되면 모두가 다시 한자리에 모여 마인드풀니스 프로젝트 스케쥴의 하이라이트인 '토킹 서클'이 이어진다. 둥그렇게 둘러 앉아 중요한 의식을 치르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말이 귀를 귀울인다. 사람들이 많아서 한 사람이 한마디씩만 해도 거의 30분이 금방 지나간다.
토킹써클 후에 배가 고픈 사람들은 점심에 남았던 음식을 먹고 주방을 정리한다. 간단한 저녁 시간 후에는 거의 매일 밤 크리스찬이 불교 사상에 기반한 티칭을 줬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겪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자신의 경험에 녹여 조근조근 이야기하면 마치 동화책을 읽어 주는 아빠를 바라보는 어린 아이들처럼 모두 귀 귀울여 듣고 있었다.
이렇게 프로젝트에서의 하루 일과가 마무리 된다. 오후 9시쯤 공동텐트에 잠을 자러 들어간다. 해가 지면 잠이 들고 해가 뜨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암막 커튼이 필수였던 도시를 떠나 처음으로 지구의 리듬에 맞춰 지내는 일상이 점점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