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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링씨티 Jan 19. 2023

세상에서 가장 최악의 연인이 되어볼 용기

악역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니까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원제목 : Verdens verste menneske)"라는 영화를 추천받았다.


'좀 특이하지만 네가 좋아할 것 같다'는 지인의 한 줄 평만 믿고 힌트 없이 영화를 봤는데... 결론적으로 잠 못 들게 하는 영화였다. 생각이 많아져서... 나는 킬링타임용 영화를 싫어한다.


시간을 죽인다는 어감 자체가 싫다. 시간은 내게 가장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내가 2시간이란 시간을 투자했다면 적어도 내게 작은 영감이던 일말의 영감 한 조각 정도는 남겨줬으면 한다. 이런 면에 있어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큰 성공을 거뒀다.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 이 시간에 글을 써보는 건 처음이다. 이 영감이 자고 일어나면 증발할 것 같아서 날 것의 아이디어들이라도 몇 자 남겨보기로 마음먹었다. 내 생각이 오염(?)될 수 도 있을 것 같아 영화 리뷰도 보지 않았다. 영화감독과 평론가들의 의도만 정답은 아니니까... 내게 있어선 내가 발견한 게 항상 최선이니까. 다르고 싶지 않아 대중의 의견의 편승하는 건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버리는 행위라 생각한다.


가끔 남에게 최악의 영화가 나에겐 베스트일 때가 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가 그 마음이 변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대로 누가 나를 가슴 아프게 떠나간 경험이 있다면 공감하면서 볼만한 영화다. 가끔씩 자유 분방한 외국인들의 정서가 불편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겐 추천하지 않는다. 북유럽 영화여서인지 확실히 동양권의 정서와는 많이 다르다.



20대, 30대, 40대 나이에 따라 다른 사랑에 대한 관점을 참 잘 담아냈다.


나이가 10살이 넘게 나는 여주와 남주는 각자의 인생 스테이지에서 원하는 것은 다르지만 잘 지내간다. 40세 초반에 결혼과 아이를 원하는 남주와 20대 후반에 아직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언인지 모르는 여주. 여주는 남주와 나누는 대화가 좋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그의 옆에서 상대적으로 초라함도 느끼지만 그를 존경한다.


나이가 들어도 사랑이란 진리는 변함이 없다. 경험에 따른 사람의 생각만 변하는 거니까. 여주인공의 20대의 모습에서 내 20대의 모습이 투사되어 보인 부분도 있었다.


남주 인생의 들러리같이 느껴지지만 관계를 지속하던 그녀. 어느 날 우발적으로 초대받지 않은 파티에 갔다가 처음 본 남자에게 강렬한 호감을 느낀다. 둘은 밤새도록 함께하며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아이같이 놀면서 잊히지 않는 감정적 교감을 나눈다. 각각 파트너가 있는 그들은 서로의 정확한 이름도 연락처도 교환하지 않고 헤어진다. 임팩트 있는 한마디와 함께.


우린 바람피운 거 아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러 우연히 마주친 둘은 결국 운명의 힘을 거스르지 않는다.

특히 여주가 남주에게 헤어지자고 하는 장면이 정말 인상 깊었다. 여느 때 같이 일어나 아침에 커피를 내려주는 자상한 남주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오묘한 감정이 올라온 그녀. 망설이다가 스위치를 누르고 모든 것이 멈춘다. 파티에서 만난 남자가 일하는 카페를 향해 세상 설레는 표정으로 뛰어가는 그녀의 얼굴... 둘은 상상만 했던 재회의 데이트를 한다.


그렇게 좋을까? 그때는 좋은 것 같지...


원하는 것이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 각자 인생 스테이지에 서 있는 위치가 다르기에 자신에게 물질적,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남주를 떠나기로 결정한 여주. 이별을 고하는 그녀에게 매달리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애쓰는 남주를 보며 이별하는 모습은 세계 어디나 비슷하구나 했다. 그리고 솔직하고 과감한 그녀의 결정을 보면서 20대의 내 모습도 겹쳐 보였다.


나도 이런 이별을 해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더 이상 설레지 않다는 이유로 7년간 만난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했었다. 그때는 사랑이 끝난 줄만 알았다. 그리고 헤어진 뒤 알게 되었다. 사랑이 끝난 게 아니라 호르몬의 영향이 끝났었던 걸. 그렇게 평생 사랑한다고 약속했었는데 수년동안 공들여 쌓아 올린 신뢰를 저 버린 게 나였다. 이별 후에도 그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었다. 그는 나 다음에 만난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때로 돌아가도 나는 똑같은 결정을 할 거다. 왜냐면


그를 잃음으로 인해 사랑에 대해 배운 게 훨씬 많아서


새로운 남자친구와 새 집에서 새로운 인생 챕터를 만들어 가는 여주. 전 남자친구와는 다르게 여주를 있는 그대로 품어준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게 그녀를 채워준다고 느낀다. 그런 안정감과 만족감도 또 잠시. 카페에서 알바를 하는 게 생업인 남자 친구와 미래를 그리기가 어렵다. 이 타이밍에 실수로 임신을 하게 되는데 그때부터 현실적인 고민과 함께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지내던 터에 우연히 전 남자 친구가 췌장암 말기로 투병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의 병원을 찾아간다. 항암치료로 앙상하게 마른 전 남자 친구. 둘은 예전같이 친밀한 대화를 이어간다.


현재 남자 친구의 아이를 가졌음을 알리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여주는 잔인하게 솔직하다. 그런 여주에게 죽음 앞에서 인생을 회고하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남주. 결국 여주는 남주가 죽을 때까지 곁에서 친구로 남아 준다. 평생 가장 사랑했던 여주 곁에 남아 함께할 수 없음을 애통해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거스를 것 없이 솔직해지는 둘의 농도 짙은 대화가 인상 깊었다.


전 여친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배를 저렇게 쓰다듬어 줄 수 있는 남자. 사랑이란...


사랑하면서 가슴 아픈 경험들을 겪고 나면 분명해지는 게 하나 있다.

내가 진짜 사랑을 배우고 정착하는 중대한 결정을 하기 전까지 심각하게 고민을 해 보라고 힘든 경험들도 갖는구나. 첫 번째 연인을 만났을 때보다 두 번째 연인을 만났을 때, 또 세 번째 연인을 만났을 때의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성숙해져 있었다. 선물 같은 인연들로 인해 사랑을 배우고 성장하면서 이제 조금은 더 성숙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과거의 나는 엄청나게 특별한 사람과 사랑이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길 기대했다. 이제 안다.


진짜 사랑은 인생만큼 긴 시간을 통해 믿음도, 추억도, 싸움도, 섭섭함도 쌓이면서 그렇게 함께 만들어지는 거라고. 과거의 나는 사랑을 너무 쉽게 얻으려 했다.


마치 미술 기초 지식도 없는 사람이 아주 완성도 높은 작품을 사려는 것처럼.



내가 완성이 안 됐는데 어떻게 완성작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람은 사랑을 할 때 정말 최악이 되는 경험을 한다.

나도 지금까지 내 연애를 통해서 나의 최악에 나의 모습을 봤다.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도 올라온다.

나는 누군가의 최악에 모습을 한 번이라도 그냥 받아준 적이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다시 사랑에 빠진다면 난 또 어떤 내 최악에 모습을 보게 될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어떤 모습까지도 감싸 안아줄 수 있을까?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게 만든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불완전한 둘이 만나 같이 서로를 완성시켜 나가는 게 얼마나 큰 기쁨임을 느낄지 기대가 된다.

언젠가는 사랑을 주는 게 더 쉬운 사람이 되고 싶다. 그때까지 내가 나를 꽉 채워주기로 결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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