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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링씨티 Dec 21. 2018

먹고사는 건 싱가폴도 별다르지 않더라

싱가폴 회사생활을 그만둔 이유

2017년 한 여름의 나.

아침 출근길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얼굴을 하곤 지하철에 억지로 몸을 실는다. 지하철 안에는 나와 같은 표정을 한 사람들이 곳곳에 보인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들은 각자의 목적지에 닿으면 발걸음을 옮긴다. 터벅터벅 바이오폴리스 단지 내에 있는 오피스로 향하는 나에게 묻는다. 지금 내가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들을 하고 사는 중인 걸까?

동료들이랑 인사를 하고 오전엔 고객사와 컨퍼런스콜을 한다. 점심엔 동료들과 근처 호커센터에서 밥을 먹는다. 일 년 내내 더운 싱가포르, 야외에서 밥을 먹으면 땀이 비 오듯이 난다. 식사 후에 다시 실내에 들어오면 에어컨 바람이 너무 추워서 감기에 잘 걸린다. 의자마다 겉 옷들이 걸려 있다. 오후엔 태국과 인도네시아 벤더에 아웃 소싱할 프로젝트 트레이닝을 남겨두고 있다. 퇴근이 3시간 남았을 쯤부터는 시계가 멈춘 것 같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한주가 되고 한주가 한 달이 되고... 꽤 오랫동안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내가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면 1년 뒤에도, 5년 뒤에도 이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겠지. 매일 예측 가능한 생활 패턴이 지겨워졌다.


한국에서 타던 지하철이 싱가폴 지하철이 된 것 같고 한국 오피스에서 앉아 있던 책상을 마치 싱가폴로 그대로 가져온 느낌마저 든다. 싱가폴에서 살면 인생이 뭐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나는 왜 여기에 와서도 이러고 있는 건지, 만족을 모르는 욕심인 건지 속이 답답했다. 처음 싱가폴에 발을 디뎠었던 3년 전의 내 모습과는 너무 달라져 버렸다. 



2014년 1월의 나.

퇴사 후 6개월 정도는 싱가폴에서 생활할 수 있는 세이빙만 가지고 서울을 떠났다. 최소 3개월은 걸릴 줄 알았던 구직 활동은 운 좋게 한 달 만에 끝났다. 한국에서 일했던 경력을 쳐주지 않아도 속상해하지 않고 제로부터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더니 직업을 구하기가 수월했던 것 같다. 

구글에서 싱가폴에 있는 헬스케어 관련 회사를 검색하던 중에 영국계 한 컨설팅 회사의 홈페이지에 우연히 접속하게 되었는데 중국인 애널리스트(Analyst)를 구한다는 잡 포스팅을 보게 되었다. 내가 한 번도 해본 적은 없는 일이지만 도전해보고 싶었다. 자격이 안되지만 HR 매니저에게 이메일로 이력서를 보냈다. 중국인 애널리스트를 뽑고 있는 건 알고 있지만 나는 한국 사람이라 많이 아쉽고 그 포지션에 관심이 있으니 나중에라도 한국인이 필요하면 나에게 연락을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한 달 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다.


실낱같은 기대와 진심을 담아 이메일은 보냈지만 연락이 올리가 없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한 달 뒤에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렇게 싱가폴에서 첫 번째 면접을 보러 갔다.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멀끔하게 차려 입고 첫 외출을 했다. 하지만 마케팅에 'ㅁ'도 몰랐던 나는 면접을 완전히 망쳤다. 다시 생각해도 창피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벤치마킹'이 무엇인지에도 대답을 하지 못했을 정도로 마케팅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면접을 망치고 돌아와서 아무 기대가 없었던 나는 초조한 마음에 여기저기에 지원을 하고 있었는데 며칠 뒤가 회사에서 전화를 받았다. 지원한 포지션에는 역시나 떨어졌지만 뜻밖에 제안을 받았다. 정말 신기하게도 갑자기 한국 프로젝트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한국 사람이 필요해졌다며 필드워크 포지션을 제안하는 게 아닌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비록 한국에서 받던 연봉에 60%밖에 되지 않는 박봉이었지만 그쪽 분야에 경험이 하나도 없는 나를 믿고 들어온 기회라 감사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열심히 잘해서 내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EIU healthcare는 영국 경제잡지 'The economist'를 발행하는 이코노미스트 그룹에 속해서 헬스케어만 전문으로 맡는 컨설팅/마켓 리서치 회사이다. 이 회사는 제약회사, 의료기기 회사, 바이오사이언스 회사 등 헬스케어 관련 업체에서 프로젝트를 받아 의뢰사가 더욱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할 수 있도록 자문을 해준다. 이곳에서 처음엔 한국 필드워크(fieldwork)를 담당했는데 핵심 업무는 주요 병원의 의과대학 교수, 현직 의사, 간호사, 임상병리사, 방사선사 또는 관련 의료계열 회사의 마케팅/세일즈 디렉터와의 인터뷰를 요청하고 수행하여 그 시장에 대한 인사이트를 애널리스트들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첫 일 년 동안에는 모든 걸 스펀지같이 흡수하는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배우면서 올인했다.


생각보다 나는 그 일에 소질이 있었고 운 좋게도 한국 프로젝트들이 꾸준히 들어와서 그 회사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연봉을 높이고 싶은 의지를 보일 때마다 내 능력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프로베이션(probation)이 주어졌다. 가끔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업무가 주어졌고 그와 함께 오는 책임감 때문에 스트레스가 엄청났었지만 모든 경험이 내 소프트 스킬이 되는 게 느껴져서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마이크로 매니징의 압박이 없이 일을 맡기는 문화를 가진 회사여서 자유롭고 창의적인 환경을 좋아하는 나와 잘 맞았다. 나중에는 한국 출장도 굉장히 많아져서 두세 달에 한 번은 한국에 출장을 올 수 있었고 그때마다 그리웠던 가족과 친구들을 볼 수 있어서 추가 보너스를 받는 기분이었다. 


푸켓에서 글로벌 트레이닝

때때로 한 번에 7~8개의 프로젝트를 관리해야 했던 무시무시한 시즌도 있었다. 그런 시기도 즐길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잘만 운영하면 업무 시간 내에 모든 걸 마칠 수 있었던 뿌듯함과 모든 일을 관리하는 주체가 나일 수 있었기에 그런 자유가 좋았다. 그렇게 2년이 지났을 땐 총 세 번의 승진과 함께 만족스러운 연봉 협상도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짜릿한 성취감도 맛봤고 시간이 갈수록 삶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계속해서 원래 회사 내에 없는 포지션까지 만들어 가면서 내 입지를 다졌는데 얼마나 놀라우면 대표님이 '너 같은 애는 처음 본다'라고 할 정도였다. 


전쟁같이 바빴던 시즌이 한차례 지나가면 매년 20일의 유급휴가가 주어졌기 틈틈이 여행도 많이 다닐 수 있어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연말에 긴 휴가를 쓰고 유럽으로 장기 여행을 갔다 올 수도 있었고 중간중간 발리, 방콕, 하노이 같은 동남아 주변 도시에서 놀다가 올 수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은 일과 삶의 적절한 밸런스를 가질 수 있는 싱가폴에서의 삶에 매료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싱가폴에 왔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줄 알았다.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가는 도전을 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그곳에서 서른 살 생일도 맞았다. 싱가폴에서의 생활이 안정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안정을 찾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회사에서 얻을 수 있는 성취감과 자유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직 초반에 싱가폴에서 출근을 하던 내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3년이 지난 뒤 출근길 지하철 속 내 얼굴엔 귀찮음만이 남아있었다. 


이런 식으로 정년 때까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근을 하고 9시에서 6시 사이의 내 시간과 월급을 바꿔가며 살아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이 문제는 세계 그 어느 도시를 가서 살아도 회사생활을 한다면 달라지지 않을 거였다. 왜? 월급 받아서 렌트비도 내고, 밥도 사 먹고, 옷도 사 입고, 놀러도 나가고, 가끔 귀찮으면 택시도 타야 되니까. 편리해진 도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출근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똑같은 회사생활을 한다면 맞이할 내 미래를 그려봤다. 

회사에서 더 좋은 포지션으로 승진을 할 거고, 

그다음엔 억 소리 나는 학비를 들여 MBA이나 석사학위를 따러 가게 될 거고, 

그렇게 승진을 하고 또 이직을 하고 승진을 하면서 사다리 타듯이 올라가다가 

한 40~50세쯤 어느 회사 임원이 될 거고... 그때 나는 얼마나 행복해질까?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이 회사를 통해 내가 만났던 사회적으로 성공한 임원들의 힘겨운 얼굴들이 대답을 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직 내가 진짜 원하는 걸 모르는구나.
 
싱가포르에서 살던 콘도 /  매일 화장 곱게 하고 출근하는 싱가포르 외노자 시절


처음으로 30년 평생 남들 눈에 있어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아등바등 거리며 살아온 내가 보였다. 이후 몇 달 동안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몇 달 동안 고민을 해도 내가 원하는 걸 알 수가 없었다. 진짜 내가 원하는 걸 찾고 싶었다.


결국에 그해 말, 긴 고민 끝에 나는 4년 동안 이 악물고 만들어 낸 자리를 스스로 정리했다. 

같은 시기에 함께 일하던 누구는 더 좋은 회사로 이직을 하고, 누구는 공부하러 미국을 가고, 누구는 결혼을 하고 그렇게 각자 다른 길로 떠났다. 나는 계획이 없었다. 그냥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어렸을 때 이미 내가 했던 고민에 답을 얻었던 걸까. 좋겠다.


서른 즘에 나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르겠는데

4년간의 살림을 대부분 정리하고 짐 가방 2개와 함께 가볍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내가 원하는 것 찾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1년은 쉬면서 나를 알아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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