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원인을 말하고, 인간은 이유를 만든다.
-운디드 힐러 큐브
요즘 문득문득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불행해진 이유,
몸이 아픈 이유,
관계가 어긋난 이유,
기운이 가라앉는 이유…
그 모든 결과에는
어딘가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아니, 찾아내야만 할 것 같았다.
마치
범인을 찾는 심정처럼.
그러다 어느 날,
햇살에 말라가는 작은 들풀을 보았다.
그 풀은 말라가고 있었지만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햇빛이 너무 강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비가 부족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바람이 너무 매서웠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풀은
그저 그렇게 거기에 있었다.
스스로를 원망하지도 않고,
환경을 탓하지도 않고,
그저 그 조건 속에서
되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세상은 왜 그렇게 이유를 찾는 데 집착할까?”
그리고 깨달았다.
결과를 받아들이기 싫기 때문이다.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넘기고 탓하고 싶은 것이다.
살이 찐 것도,
몸이 망가진 것도,
관계가 틀어진 것도,
다 어떤 외부의 ‘누군가’ 혹은 ‘무엇’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를 보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연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자연에는 이유가 없다.
조건만 있을 뿐이다.
햇살, 바람, 흙, 시간
그 모든 것이
‘이유’가 아니라 조건이다.
그 조건들이
어떤 방식으로 만났는가에 따라
모든 결과는
그저 ‘되어질 뿐’이다.
자연은
말없이 원인을 드러낸다.
나무가 자라지 않으면
뿌리에 물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흙이 거칠었을 수도 있고,
햇살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자연은 말하지 않지만,
그 결과 속에
‘원인으로 작용한 조건들’을
조용히 드러낸다.
조건이 곧 원인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위에
‘이유’를 만든다.
“내가 부족했기 때문이야.”
“그때 그렇게 말했으면 달라졌을 텐데.”
“운이 없었어.”
“내가 잘못 선택했어.”
이유는
결과를 해석하기 위한 이야기이며,
대부분은 마음을 붙들기 위한
정서적 서사다.
자연은 그저
“이런 조건이 있었기에 이렇게 되어졌다”고 말할 뿐인데,
인간은 거기에
죄책감, 원망, 억울함, 후회 같은 감정을 덧입힌다.
그리고 그 감정을 견디지 못해
‘누군가의 잘못’이거나
‘내 책임’이라는 이유로
결과를 묶어버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고
햇살을 탓하거나
흙을 심문하는 자연은 없다.
햇살은 그냥 빛이었고,
흙은 그냥 흙이었으며,
바람은 그냥 지나갔을 뿐이다.
그들은
그저 자기 자리에 있었고,
함께 작용하며
결과를 허락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배운다.
자연은 원인을 말하고, 인간은 이유를 만든다.
자연은 조용히
결과의 조건을 드러내고,
인간은 그 결과를 견디기 위해
이유라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안에는,
모두가 범인이면서
모두가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걷어내면,
조건만 남는다.
모두가 조건이고,
모두가 환경이며,
모두가 하나의 흐름이었다.
그렇기에 진실은,
단 하나의 범인도 없고,
단 하나의 피해자도 없다.
모두가 이유라는 이야기의 조건일 뿐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이유를 찾다가 멈췄다.
그리고 대신,
이유라는 이야기를 걷어내고 남겨진
조건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은
늘 거기 있었던 환경이었다.
비가 오고,
햇살이 들고,
바람이 지나가듯
나의 삶도
그렇게
지나가는 자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