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치유하는 진짜 해결방법
마음을 치유하는 텍스트테라피
자연스럽지 못한 건 아프고 병든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내 마음이 아프다면 자연스럽지 못함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 또한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의 섭리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질병이나 증상을 해결하기에 급급하기보다는 증상의 원인을 찾는 데 집중하는 것이 기능의학입니다. 원인을 밝힌다는 것은 곧 해결책을 찾아낸다는 뜻입니다. 겉에 보이는 것만 수습하느라 속은 방치하는 가짜해결이 아닌 진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전 글을 쓸 때 기능의학 관점에서 글을 씁니다. 왜냐하면 기능의학 관점에서 쓴 글들은 텍스트테라피가 되기 때문입니다. 글 자체가 치료제가 되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근사하고 멋지죠. 물론 기능의학 관점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글자 그대로 원인을 통찰하여 밝혀야 합니다.
원인과 이유는 관점이 완전하게 다릅니다.
원인은 시작과 현상에 집중한다면 이유는 결과와 추론에 집중합니다. 결과와 추론에 집중한다는 것은 결국 질병과 증상에 집중해 추리하듯 소설을 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증상인 결과에 집중하기에 자신도 모르게 증상이 생겨난 근거나 까닭인 이유를 찾게 됩니다.
이유를 찾는 건 추리를 통해 범인을 잡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추리가 잘못되었을 때 범인이 아닌 엉뚱한 사람을 잡아 누명을 씌우기도 합니다.
가령 한 아이에게 과도한 스트레스 상황과 긴장할 때마다 몸을 떠는 습관이 하나 생겼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아이는 과도한 스트레스 상황과 긴장하더라도 몸을 떠는 증상이 사라지기를 원한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현대에서는 이런 증상을 틱이라고 합니다.
1) 단순 근육 틱: 눈 깜박거리기, 얼굴 찡그리기, 머리 흔들기, 입 내밀기, 어깨 들썩이기
2) 복합 근육 틱: 자신을 때리기, 제자리에서 뛰어오르기, 다른 사람이나 물건을 만지기, 물건 던지기, 손 냄새 맡기, 남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기, 자신의 성기부위 만지기, 외설적인 행동하기
3) 단순 음성 틱: 킁킁거리기, 가래 뱉는 소리 내기, 기침소리 내기, 빠는 소리 내기, 쉬 소리 내기, 침 뱉는 소리 내기
4) 복합 음성 틱: 사회적인 상황과 관계없는 단어를 말하기, 욕설 뱉기, 남의 말을 따라 하기 특별한 이유 없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나 목, 어깨, 몸통 등의 신체 일부분을 아주 빠르게 반복적으로 움직이거나 이상한 소리를 내기
냉정하게 보면 과도한 스트레스 상황에 긴장을 하더라도 몸을 떠는 증상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제가 잘못되어 있음을 모르고 증상만 사라지게 만들려 하면 억지를 부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억지가 몸과 마음을 더 크게 병들게 만듭니다.
7세에서 11세 사이에 잘 나타나는 소아들의 틱 증상은 대부분 아이에게 생긴 증상을 보호자가 잘못된 거라 오해해서 발생합니다.
가령 아이가 잘못해서 혼을 내는데 무서워서 떨고 있다면 무서워서 떠는 아이를 더 크게 혼내고 떠는 아이를 더 잘못한 걸로 몰아 혼낼 때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유를 찾는다는 것은 범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은 이미 몸이 떨리는 증상이 범인이라고 마음을 먹고 시작한 것입니다.
아이 입장에서는 몸을 떨었기에 더 혼이 났고 몸을 떨지 말아야 덜 혼날 수 있다 오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떨리는 몸을 떨지 않으려고 억압하고 억제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마치 아파서 우는 건데 운다고 더 맞게 되어 아픈데도 울지 않고 참으려다가 병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혼나는 상황에 떨리는 몸에 집중하며 침착하게 가만히 있어야 된다. 몸을 떨지 말아야 한다, 몸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하며 자신을 압박합니다.
평소에는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몸이 떨리니까 더 신경 쓰고 예민해지면서 몸과 마음을 더 긴장시키고 몸의 긴장이 커지니까 긴장을 풀게 하려고 몸이 더 심하게 떨리게 됩니다.
그래서 틱이 있는 아이에게 증상을 지적하며 혼낼수록 아이의 틱은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이건 증상이라면 모두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울함도, 불안함도, 걱정도, 고민도 증상이 커지는 원리는 같습니다.
몸을 떨어 긴장을 풀어주고 릴랙스 시키려는 의도를 알아주지 못하고 오히려 억압을 키워 증상을 키운 거죠.
진짜 범인은 자연스러운 것을 잘못했다 판단하고 긴장과 스트레스를 만드는 사고습관이지만 진짜 범인은 나 두고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한 떨리는 몸을 범인으로 만들어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이때 자연스러운 치유의 관점은 아이의 몸 떨림이라는 증상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현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몸 떨림이라는 증상"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긴장하게 되고, 어떻게 하면 긴장을 풀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즉 몸 떨림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가 혼나는 상황이 무서워 발생한 긴장과 스트레스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줘야 몸 떨림이 사라지는 겁니다.
자연은 거짓말을 못합니다. 사람의 몸과 마음 또한 자연의 일부이기에 몸과 마음에서 생기는 증상은 거짓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증상이 생기는 이유는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 찾기를 계속하면 증상은 점점 더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범인을 나 두고 엉뚱한 범인을 잡아 지속적인 누명을 씌우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유를 찾는다는 것은 증상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을 부정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움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러움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입니다.
가령 자신이 우울한데 우울한 이유를 찾는다면 그건 우울함을 치유하려는 목적이 아닌 우울함을 인정하지 못해서 생기는 자기 부정과 합리화입니다. 난 문제가 없는데 우울함이 문제라 여기는 것이죠.
내가 날 비난하면 비난받는 내 마음은 아픕니다. 하지만 비난을 멈추지 않으며 아픈 게 문제라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날 때리면서 아픈 게 문제라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고는 무척 위험한 발상입니다. 왜냐하면
때리거나 다친 게 원인이 아니라 아픈 게 원인이라는 착각으로 인해 때리거나 다치더라도 안 아프면 된다가 만들어지고 아픔을 느끼는 신경을 죽이는 방향으로 사람 마음도 치료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매우 부자연스럽고 인과 관계에 어긋난 위험한 방법이기에 응급처치는 가능해도 근본적인 치료는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데 이 방법으로 마음을 치료하고 마음의 병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안타 깝게도 증상을 키우고 있다면 위험한 방법을 자신에게 하고 있던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에게 하는 건 괜찮을 거라는 착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과거의 권위적인 시대에 부모가 자녀를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고 믿는 것과 비슷합니다. 내 자식 내가 좀 때리는 대 어때, 내 자식 내가 좀 비난 좀 하겠다는 데 좀 어때, 내 자식 내가 좀 무시하는데 좀 어때하는 위험한 부모의 태도를 학습한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남이 때리던 부모가 때리던 자신이 자신을 때리던
누군가 날 때리면 아픕니다. 내가 날 때려도 아픕니다.
그 누구도 날 때리지 않는데 내 마음이 아프다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때리고 있다는 겁니다.
인정하기는 싫겠지만 범인은 자신입니다.
무섭죠...
그렇기에 마음 치유는 자신 먼저 자신에게 행하고 있던 권위적인 태도를 점검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울함을 회복하고 싶다면 우선 마음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바르게 아는 만큼 바르게 보이고, 바르게 보인 만큼, 바르게 치유할 수 있습니다.
우울함 매우 힘들지요, 모든 마음의 병의 시작은 우울함을 방치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우울함이 그냥 안 좋은 것, 나쁜 것, 병의 원인이라는 왜곡된 인식들이 역설적으로 우울증이라는 마음의 병을 키우게 됩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실패, 좌절, 불합격, 사고, 이혼, 병, 헤어짐 등을 만나게 되면 감정적으로 고통, 미움, 분노, 시기, 질투, 외로움, 불안함, 우울함 등이 생성되고, 마음이 힘들어집니다.
이때 너무 힘든 나머지 병원을 찾아가 침을 맞고 약 먹으면 해결가능하다는 믿음에 약물에 의존하기도 합니다.
우울증 약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항우울제라는 이름의 우울증 약은 정신의학계에서는 "기분조절제"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기분을 조절하는 약이죠. 우울한 기분을 조절할 수 있다니 어떻게 보면 대단한 약입니다.
대표적인 우울증 치료제에는 SSRI계열(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약물이 있습니다.
SSRI란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라는 뜻으로, 뇌 속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의 농도를 높여주는 약물입니다.
주로 우울증 치료제로 쓰이며 공황장애나 강박장애 등 다양한 질환에 쓰이고 있어요. 현재 국내에서 처방되는 SSRI 종류로는 플루옥세틴, 파록세틴, 설트랄린, 에스시탈로프람, 벤라팍신등이 있고 대부분의 병원에서 많이 쓰이는 건 위 다섯 가지 중 한 가지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신과 약물은 중추신경계에 작용하기 때문에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흔한 부작용으로는 입마름, 변비, 시야 흐림, 성기능장애, 불면증, 어지러움, 두통, 구역질, 구토, 설사, 피로감, 무력감, 식욕부진, 불안, 초조, 악몽, 환각, 망상, 공격성, 충동성, 집중력 저하, 졸음, 수면장애, 극단적 충동 등이 있습니다.
우울한 기분을 조절하려고 약을 먹었을 뿐인데 부작용이라는 리스크가 엄청나죠. 약 먹지 말라는 게 아니라 알고 드시라는 겁니다.
이러한 부작용은 대부분 용량 의존적이며, 일정 기간이 지나면 대부분 사라지기에 너무 겁 안 먹어도 됩니다.
용량 의존적이 무슨 뜻이냐 하면요.
술 용량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량이 소주 1병인 사람이 3병을 먹으면 그 사람은 정신 못 차릴 겁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술병 나서 죽을 거 같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 술이 깨고 속이 가라 않으면 멀쩡해집니다.
용량 의존적이라는 건 이걸 뜻합니다. 술기운 사라지는 순간 술병 사라지듯 약 기운 사라지는 순간 부작용도 사라집니다. 대신 기분 조절을 하는 효과도 사라지기에 다시 약이 필요해집니다.
그래서 약 처방받을 때 자신에게 맞는 최적의 용량을 찾는 거죠. 마치 소주 한잔, 두 잔, 세잔, 마시면서 기분을 조절할 수 있는 용량을 찾는 겁니다.
우울함이라는 기분이 적당히 조절될 수 있게 약을 조절하며 몇 달간 실험하듯 찾는 겁니다.
하지만 술이 기분을 푸는데 효과가 없는 사람이 있듯 30% 정도는 약의 효과가 없기도 합니다. 그럼 몇 달간 실험하듯 찾은 게 리셋되고 다른 약으로 또 실험하듯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술이 중추신경을 건드려서 기분 좋아지는 효과가 있듯 항우울제 중추신경을 건드려서 우울감을 줄여주는 진통제 역할은 할 수 있습니다.
중추신경을 자극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약으로 기분을 달래 주는 것과 술로 기분을 달래주는 것에 본질적 차이는 크게 없습니다.
이처럼 항우울제를 통해 우울한 기분을 달래줄 수는 있어도
우울증을 치료할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안 그러면 불행해집니다.
왜냐하면 항우울제는 치료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약이 치료제라고 주장하는 건 소주가 우울증 치료제라고 주장하는 것과 맥락상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우울증을 정말 치료하고 싶다면 마음치유를 통해 우울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이해하고 수용하여 상처 입은 자신을 품어줘야 합니다.
우울함과 불안만 억제하는 진통제 역할의 약물만 복용하다 보면 몸도 마음도 모두 병들게 됩니다.
슬프지만 마음이 병드는 시작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부정이 출발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부정했는지는 오직 자신만 알지만 그것 또한 방어기제로 인하여 무의식의 영역에 봉인을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도, 이유도 없는데, 이 고통의 원인을 모르겠다며 하소연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결론만 간단하게 이야기한다면 모든 마음의 병의 원인은
있는 그대로의 나 "심리적 현실" 그 당시의 지금 여기를 부정한 결과입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싶어 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면 매우 시야가 좁게 되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면 분별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 결과 편견과 색안경 낀 상태에서 세상은 내 맘대로 못하지만, 내 마음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는 오해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 증상을 통제하려다가 마음의 병을 키우게 됩니다.
마음이 어둡고 가슴이 답답한 상태인 우울함의 상태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을 때 우울함이 병으로 진행됩니다.
살다 보면 실패와 갈등으로 인한 좌절과 절망,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등이 예고도 없이 찾아오며 그것을 피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무력함이 나를 지배하며 자신이 무가치한 사람처럼 느껴져 가슴에 답답함이 밀려옵니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그 울분을 어디다 토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울하다 보면 멈춰 서게 됩니다.
경쟁사회에서는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을 패배라 여기고 이러한 패배의 중압감은 멈춰 서 있는 것에 좌절감을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울함을 문제로 바라봅니다. 더 나아가서 수치스럽게 바라봅니다. 수치란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자신이 남들보다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즐겁고 유쾌하며 긍정적인 척 연기를 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자신이 남들보다 행복한 사람이라고 증명하려면 우울함은 숨겨야 합니다. 우울함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게임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하고 술을 통해 즐거움을 맛보려 합니다. 우울함도 날려버리고 즐거움도 맛보는 일석이조라 생각에 더 욱 더 몰입하기도 합니다.
만약 위 방법을 본인도 비슷하게 하고 공감이 된다면
마음은 필연적으로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병은 진짜 사실을 부정했을 때 생겨나게 됩니다. 이해하기 쉽게 자신이 자신의 존재를 속였을 때 마음의 병이 생기게 됩니다.
무시당하기 싫어서, 남들이 깔볼까 봐, 불쌍한 처지가 되기 싫으니까 애써 명랑한 척한 것 아닐까요?
자신이 정말 행복하다면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자신을 속여 연기를 하고 자신이 더 행복하고, 우월하며, 잘 나가고 있다는 것을 어필할 필요성이 있을까요?
사람들은 우울함이 문제인 것처럼 알고 있지만 우울함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증상을 부정하며 애써 무시하며 자신을 속이려 했던 것이 원인입니다.
속이면 숨고 싶고, 속이면 두렵고, 속이면 창피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계속 속이면 자신이 싫어지고 결국 우울증이라는 병에 걸리고, 마음이 병들게 됩니다.
우울함은 지금 가는 길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잠시 멈추고 삶의 의미를 재탐색하고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여 삶의 목적을 다시 한번 찾아 마음을 점검하라는 신호입니다.
더 큰 성장을 하기 위한 마음의 성장통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성장 통을 격기도 전에 우울증으로 진단을 내어 버립니다. 우울증은 말 그대로 병입니다. 아주 위험한 병이지요.
역설적으로 우울함을 감추다가 우울증이라는 병에 걸리고, 불안, 강박, 공황, 죽고 싶다는 충동에 빠지게 됩니다.
단지 나에게 피해 준다 생각했던 것을 외면하고 쉽고 편한 것을 선택했을 뿐인데 내가 원하는 것과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함과 우울증을 잘못 인식하여 우울함을 우울증으로 확대 해석하고 잘못된 진단을 내립니다. 정보의 홍수에 빠진 사람들이 선택한 지식의 혼란 때문인데요. 이러한 크고 작은 문제들이 우울함을 키워 정말 우울증으로 만들게 됩니다.
우울함은 우울할 만한 해석이 생길 때 우울합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우울하지 않습니다.
우울함은 마음의 경고 이자 마음을 점검하라는 유익한 신호입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면 이전과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지금 우울함이 주는 마음을 점검하라는 신호를 무시하지 마시고,
자신의 생각과 삶을 점검해 보고, 인지의 오류를 바로 잡아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