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신茶神을 알현하다

by 힐링가객


지난겨울 귀한 책을 선물 받았다. 하동군 화개지역에서 수대를 이어온 다농 가문의 후손 정소암 선생이 보낸 거였다. 그 자신도 차를 덖고 있지만, 부군과 함께 차의 효소성분을 연구하는'다오영농조합'을 세운 분이다.다. 차 씨에서 추출한 엑스트라버진 오일과 꽃과 잎에서 얻은 효소와 식초의 약리작용을 이용한 차요리 전문점 '찻잎마술'을 운영하고 있었다. 차 시배지 여행에서 인연을 맺은 후 선생에게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차요리 선집이나 제다법에 대한 기록이었다. 내 시간을 나눠드리고 싶을 만큼 바쁜 선생이기에 그의 요리 레시피를 널리 공유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오던 터였다.


책의 제목은 [차신茶神]이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즉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동안 천년 대차수로 이름을 알린 한국의 최고령 차나무가 냉해를 입은 사건을 두고 그 얼마나 애통했던가! 화개면 정금리 도심다원에서 보유한 천년차나무는 2008년 한국기록원으로부터 한국 최고의 차나무로 인증을 받았다. 2006년 당시에 천년차나무에서 수확한 녹차 100g이 경매에서 1300만 원에 팔렸던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2010년에 한파와 40여 일의 가뭄 속에서 냉해를 입었고, 이후 회복되는가 싶었으나 최고령 차나무를 보려고 몰려오는 사람들의 소망과는 달리 말라서 죽어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손실이었다.


2008년 한국 최고령 차나무로 고증받고 세운 비석 주변을 현재는 야생차나무들이 두르고 있다


소식을 듣고 찾아간 도심다원에서 7대손인 오시영 제다명인으로부터 최고령 차나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들었다. 현재는 천년 차나무의 후계나무 군락이 전설을 계승하고 있다는 거였다. 비슷한 급의 차나무들이 있지만 인위적 관리로부터 고차수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도록 하여 최대한 자연의 이치에 맡기고 있다는, 매우 다행스럽고도 궁금증을 부채질하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숨겨진 고차수를 발견했다는 것일까 궁금해서 식사시간도 잊어버리고 책에 빠져들었다. 책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야생 녹차나무의 뿌리였다. 암산의 지형 위로 드러난 그것은 바위처럼 보였다. 직근이라고 알려진 차나무의 뿌리라기보다는 근육질의 갈근에 가까운 형상이었다. 수천 년 묵은 차수왕도 흔하다는 중국의 윈난 성도 푸젠 성도 아닌 하동 지리산에 이런 차신이? 경외감에 마음이 떨렸다. 고온 다습한 반음반양의 환경에서 땅 속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려 광물질의 영양소를 흡수해 여린 찻잎으로 그 정기를 뿜어내는 것이 녹차가 아니던가!




KakaoTalk_20230319_001909662_02.jpg p492. 범왕리 차밭 군락지에서 고사되어 가는 뿌리를 바위에 지탱하고 있는 차신



지리산 화개지역 암산에서 수세기를 넘기며 생존한 차신을 대하는 마음이 가벼울 수 없었다. 더구나 험지를 더듬어 한국 최초로 영상과 기록을 진행한 분이 제다명인과 부사수를 자처하는 부군이니 그럴 만도 했다.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역사적 실록을 대하는 거였다.


표지를 넘겨 날개를 펼치자 벌써 마음이 발동을 걸었다. 얼마나 마음이 근지럽던지, 야산과 깊은 지리산 골짝을 더듬어 소암선생이 찾아낸 차신들의 모습을 나는 밤마다 야금야금 아끼며 보았다. 수백 년 묵은 적송이나 은행나무 앞에 서면 저절로 숙연해지지 않던가. 인명을 훌쩍 넘어 세월을 목도한 차나무들은 전지로 좌절된 등걸에 무수한 옹이를 품은 채 버티고 있었다.


사실 차나무는 수령이 묵었다고 해도 다른 나무들처럼 우람하지 않다. 성장이 매우 더디기 때문이다. 천년 차나무가 높이 420cm 둘레 57cm, 수관 폭이 560cm에 불과했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일반적 기준의 거목은 아닌 것이다. 차신의 기록들을 읽어가면서 점차 실망했다. 마을 어귀의 가로수 역할을 하는 차신과 차밭의 둑을 지키는 차신, 계곡의 암석과 잡목들 틈에 숨어있는 야생차나무들은 고행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새긴 채 고사되어가고 있었다. 죽은 뿌리에서 돋아나온 옥빛의 새순을 보자 씀벅 눈이 시렸다. 수령이 높은 차신의 여러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잎의 종류와 형태, 나무의 수형과 특징뿐 아니라 현재의 관리상태까지 꼼꼼히 관찰해 기록한 이 작업의 진의가 저릿하게 느껴졌다.


비로소 깨달았다. 녹차를 사랑하지만 나는 정작 내 입으로 들어오는 잎차의 감미에 사로잡힌 얕은 소비자일 뿐이었다. 그저 햇차가 나오면 작설, 우전이 그리워 달려가고 하차계절엔 잭살 발효차를 구하러 달려가고 차꽃이 피는 가을이 오면 여행이랍시고 달려가 입과 눈을 호강하고 서둘러 돌아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농도 제다인도 아닌 나는 그저 차애호가 이상이 될 수 없는 관찰자의 자리에 서성이고 있었다.


그걸 깨닫자 한없이 낮아졌다. 그리고 감사했다. 차로 인해 내가 누린 즐거움과 건강은 신이 허락한 선물이었다는 걸. 그래서 생각했다. 이 아름답고 청아한 차 이야기를 혼자 품고 있지 말자고. 좋은 이들과 더불어 나누고 소소한 이야기로 풀어보자고.


화개 야생차, 10월의 녹차꽃


신농씨 설화가 떠오른다. 동양 상고사 [신농본초경]에 농사의 신이 약초를 연구하기 위해 수백 가지 식물을 섭취하다가 72가지 독에 중독되었는데 녹차 잎을 먹고 해독이 되어 인간에게 전했다고 한다. 육우의 [다경]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다. 옛날 중국의 또 다른 문헌 [차보]에는 "차는 모든 병을 낫게 하는 약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계 3대 음료를 꼽으면 그 첫 번째를 차지하는 것도 녹차다. 세계보건기구에서 발표한 '인간에게 좋은 음료'에도 녹차는 으뜸으로 들어간다. 조선시대 다농가의 아낙네들이 부른 노동요에서 좋은 차는 국가와 관리에게 납부하고 가족의 비상약으로 남은 차를 따서 덖는다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녹차는 인류가 발견한 가장 좋은 해독제라고 알려져 있고 그 효능을 아는 이들이 애용하는 귀한 음료다.


차신을 읽는 동안 나는 생애를 걸고 차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감염되었다. 몇 주를 벼르다가 화개로 날아가 정소암 선생과 마주했다. 차신을 찾아 영상작업을 하면서 뱀과 곤충과 조우하는 것은 일상이요, 암산의 지형을 더듬다가 낙상을 해서 고생했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야생진드기가 몸에 옮아 곤욕을 치렀다는 소식은 알레르기에 민감한 내게는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작업 후일담을 들으며 책의 공동저자이자 소암선생의 부군인 조영덕 선생이 우려 주는 차를 한나절 동안 마시고 산책을 나섰다.


입 안에 차향을 품은 채 잇새로 공기를 마시면 박하를 머금은 것처럼 시원하고 향기롭다. 그 기분으로 운수리 차시배지로 걸어가 차신을 알현했다. 굵은 차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역사적인 시배지 차나무 앞에 서자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고급 수제차를 만드는 시배지 차나무의 잎과 수형이 농사를 짓는 차나무와는 확실히 구별되었다. 또한 차나무 사이사이 빼낼 수도 옮길 수도 없는 바위들이 수도 없이 박혀있는 것도 보었다. 대나무 방풍림에 둘러싸인 차신들이 겨울 햇살과 미풍에 온몸을 내맡기고 묵은 잎과 열매들을 말리고 있었다.


화개면 정금리 도심다원, 10월



감염병이 창궐해 일상이 마비되었을 때였다. 이천 도자기마을 예스파크를 방문한 정소암 선생을 집으로 초대했다. 소암 선생은 내가 고대하던 햇차와 18년 전에 덖은 발효차를 선물로 내주셨다.


너무 떨려. 18년이나 보관했으니 포장지 안에서 삭아버리지 않았을까, 변질됐으면 어떡하지!


자그마한 다실에서 18년 묵은 발효차를 개봉하기 직전에 소암 선생이 긴장하며 속삭였다. 차는 갓 덖은 것처럼 상태가 좋았다. 무엇보다 향기에 놀랐다. 발효차에 블랜딩 한 해당화는 꽃빛은 어두웠으나 향기가 그윽했다. 묵은 차를 시음하면서 우리는 발효차의 상미기간에 의심을 품었다. 잘 관리할 수만 있다면 역사적으로 보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확인한 것이다. 화개지역의 제다인들과 연구모임을 통해 잃어버린 발효차를 복원하고 잭살이라 명명한 역사적인 기념차라고 했다.


그때부터 마음속에 생각 하나가 들어앉았다. 소암선생의 책을 보고 차신을 알현하면서 다시 떠오른 생각이었다. 차나무만 신이 아니었다. 차농사를 짓고 차를 덖는 사람들, 차문화 전통을 계승하는 사람들이 내겐 모두 차신이었다. 차신이 빚은 차들을 조석으로 조우하고 있으니 나는 참 부요한 사람이었다. 오늘은 다구에 잭살을 담았다. 황금빛으로 우러나는 잭살의 향기가 차신의 기억을 불러낸다. 목 넘김이 부드럽고 깔끔한 황금 잭살은 이런 시간에 혼자 음미하기에 좋은 차다. 하지만 발효차 특유의 황홀한 후미에 다다르면 생각이 달라진다. 함께 나누고픈 차벗들이 줄줄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대들의 오늘도 향기로 채워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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