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녹차 향미 - 하동세계야생차박람회

by 힐링가객

5월은 다인들에게 바쁘고 설레는 달이다. 제다인들은 곡우 무렵 첫 찻잎을 채엽하여 살청하고 건조시켜 햇차 상품을 출하한다. 세작은 곡우 이후부터 5월 초까지, 중작은 5월 중순까지 채엽하여 생산한다. 이 때 다농의 차실에 가면 막 생산된 햇 차를 맛볼 수 있다.

5월엔 국내 최대의 차 생산지인 보성과 하동에서 다투어 차 문화 축제를 개최한다. 소비자와 생산자가 산지에서 만나 햇 차를 매개로 축제를 즐기는 자리다. 올해는 하동에서 세계 차 박람회를 개최하였다. 팬데믹으로 3년간 열지 못했던 축제인지라 특별한 기대 속에 기획되었다.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로 분주한 달이다. ‘가정의 달’이라고 묶어서 말하기엔 챙겨야할 일들이 많은데, 쉴 수 있는 주말은 한정적이라 기다리던 축제며 행사라 할지라도 다 챙겨보기 어렵다. 함께 여행을 하거나 가족모임을 계획할 때 축제 관람을 끼워 넣는 지혜가 필요하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곳, 축제 진행이 짧은 곳부터 챙겨보고 가장 일정이 긴 세계야생차박람회를 나중에 보았다. 하동에서 열린 행사이기 때문에 최소 2박은 필요한 일정이라 행사의 끝을 붙들 수밖에 없었다.

- 하동세계야생차박람회 - 2023. 5.4 ~ 6.3



“야생차 박람회 끝나기 전에 화개에 가게 될까요?”

5월이 한 주 또 한 주 지나가면서 마음이 조급해져 짝꿍에게 두어 번이나 물었다. 예전 같으면 혼자라도 가서 실컷 보고 오라고 했을 거였다. 실제로 강의며 작업시간을 조절하면 1주일 정도는 비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3월부터는 조금 더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18개월짜리 손자를 하원시간에 데려와서 몇 시간 돌봐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에 서너 시간이지만 손자를 돌보는 일은 경이로움의 연속이다. 겨우 18개월 인생이 왕성한 호기심으로 만나는 모든 사물에 반응한다. 만지고 맛보고 해부하고 알게 된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적용하는 것이 놀랍다. 잊었던 육아의 기억을 떠올리며 행복해진다. 일신우일신을 원한다면 자라나는 아기를 본보기로 삼으면 틀림없이 귀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얼어붙은 마음도 무료도 비관적인 생각도 단번에 날려버리는 말랑말랑한 인간본성의 원본 회복력을 아기가 선물한다. 아기를 돌보는 건지 아기에게 케어를 받는 건지 모를 정도로 아기에게 배우고 얻는 것이 많다. 진짜 힐링은 아기를 바라볼 때 얻어진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생후 4살까지 부모에게 평생의 효도를 다 한다는 말에 진심 고개를 끄덕이게 된 것이다. 아기의 반응에 집중하다 보면 늘 시간의 순삭을 경험한다.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어찌어찌 조율이 되어 지난 주말에 짝꿍과 화개로 출발했다. 그리운 다원들의 이미지는 순간의 기억으로 지나가고 사람이 어찌나 간사한지 단골 맛집들의 힐링 요리들이 긴박하게 떠올랐다. 예약을 해야 이용할 수 있는 녹차요리는 갑자기 정해진 일정이라 접어두어야 했다. 하동군에 들어가자 축제를 안내하는 이정표와 플래카드가 환영이라도 하는듯 펄럭이며 맞아주었다.

화개에 도착하자마자 팔모정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늦은 점심인데도 사람이 가득해서 놀랐다. 옆 테이블에 식사 후 분장을 하는 여인들이 보였다. 한복차림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박람회 공연자들이라고 했다. 팔모정 요리사님이 반갑게 맞아주어 행사가 진행되는 한 달 동안 바빴던 소식을 전해주었다. 버섯전골에 산채요리들을 흡입했다. 야생의 맛이란 어찌 그리도 신선하고 향기로운지 감탄을 하면서. 박람회 1일 입장권까지 챙겨준 덕분에 예약한 숙소에 입실 등록만 하고 바로 박람회장으로 걸어갔다. 1행사장은 하동군 적량면의 공설운동장에 있어서 다음날로 미뤄놓고 2행사장으로 입장했다. 차 시배지에서 내려다보이는 화개동천 옆에 매년 박람회가 열리는 행사장이 있었다.


하동군에서 130억의 예산을 들여 기획한 이번 박람회는 한국에선 처음으로 개최하는 국제적인 차 축제였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술대회와 녹차 경연대회 등 중요한 일정들이 초반에 잡혀있어서 지나가 버린 것이 아쉬웠다. 그동안 모니터링 하면서 소식만 확인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가까워질수록 어두워지던 하늘이 점심을 먹는 동안 빗줄기로 바뀌었다. 우산을 쓰고 들어가자 행사 마스코트인 주전자가 찻잔이 포토 존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눈에 익은 화개의 대표적인 다원들이 나란히 설치된 부스에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비워놓은 부스들도 눈에 띄었다.


부스들을 돌면서 의아했다. 기대와는 달리 제다인 보다는 행사 도우미들이 부스를 지키고 있었다. 반갑게 맞아주며 차 시음을 권하는 요산당 부스에 짝꿍과 함께 들어가 앉았다. 올해의 햇차를 시음할 다원이라 기억을 떠올렸다. 뒷산으로 통 창을 설치한 요산당은 차 자리에서 차밭의 풍경을 내다볼 수 있는 멋진 다원이었다. 차를 우려 주는 청년이 중국 절강 대에서 차 학문을 전공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요산당의 후계자로 다원의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요즘엔 전통을 이어 후계자로 나선 젋은이를 만나면 먼저 절을 올리고 싶어진다. 그만큼 가문의 기술전통이 끊어지는 속도가 가파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랑하는 녹차 다원의 후계를 잇는다니, 앞으로 오래 사귀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관에 차를 담기 위해 햇차의 봉투를 여는데 주룩주룩 비가 내려서 마음이 쓰였다. 보통은 차호를 받아 햇차의 향기를 음미하는데 날이 너무 습해서 청할 수가 없었다. 과연 청년 팽주가 우려 주는 차 맛이 예사롭지 않았다. 우전은 여리고 고소한데 잎이 작았다. 올해는 겨울에 춥지 않았는데도 봄의 평군기온이 낮고 가물어서 찻잎의 새싹이 늦어 작황이 좋지 않다고 한다. 채엽의 양이 너무 적어 우전이 귀하다고. 말을 듣고 마시니 더욱 귀하게 느껴졌다. 이어 우전의 감미로움과 대비되는 발효차를 우려 주었다. 잭살의 향기와 쌉쌀하게 찌르는 맛이 경쾌하고 맑아서 감탄했다. 마지막으로 백차를 우려 주었다. 백차에서 여린 감로의 향미가 느껴졌다. 아미노산 함량이 최고로 높다는 백차의 밀도에 반해버렸다.

“백차가 진정한 감로인 줄 새롭게 알았네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짝꿍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청년이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하동군에서 5개의 우수한 차를 뽑아 대외적으로 품평과 홍보를 하는데, 요산당의 백차가 뽑혔다고. 웃음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과연 그럴 만 하다고 공감했다. 입맛만큼 정직한 것이 또 있을까.


“차의 본산지에 가서 차를 전공하고 돌아와 다농가의 후계자가 되었는데, 비전이 뭐에요?

내가 궁금했던 것을 짝꿍이 질문했다. 뭔가 야무진 대답을 듣게 될 것 같아 기대가 되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차를 좋아하는데, 티백 말고 좋은 잎차를 어디서 구입해야 하는지, 뭐가 좋은지 몰라서 어렵다고 그래요. 요산당 녹차가 젊은 친구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알려져서 한국의 녹차 하면 바로 요산당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동생이 아버지 뒤를 이어 차 농사를 맡고 있어서 제가 지금 주력하는 건 마케팅이거든요.”


기대 이상의 비전을 확인했다. 아들은 다농의 전통을 잇고, 딸은 다원의 마케팅을 맡는다니. 요산당은 희망을 걸만한 다원이라 생각했다. 축복의 말로 덕담을 건네고, 우전과 홍차를 구입했다. 산지에 와서 시음을 하고 구입한 녹차는 제다인과의 친분과 다원의 분위기를 품고 있어 돌아와 차를 마실 때마다 마음을 풍성하게 한다. 이번엔 새로운 차를 만나 또 기대가 된다. 백차에 욕심이 났으나 워낙 소량생산이라 다음기회로 미뤘다.


튀르키예관에서 홍차다도 시연을 참관했다.


행사장 중앙에 마련된 해외 차문화관을 관람했다. 미처 예약하지 못했는데 튀르키예 관에서 홍차 시연에 참여하는 행운을 얻었다. 공식적으로 세계에서 차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가로 알려진 나라였다. 튀르키예 전통복장을 입은 시연자의 설명을 듣고 튀르키예인들의 차 문화와 가치관을 배웠다. 은제품의 다관을 불에 얹어두고 홍차를 담아 가향과정을 거친 다음에 홍차를 추출하자 향기가 훨씬 더 진하게 변하는 것을 음미했다.

천연 각설탕을 물고 홍차를 머금었더니 단맛과 떫은맛이 혀 안에서 녹아들면서 황홀한 향미를 일으켰다. 단맛의 매력을 음미하는 시간이었다. 곁들인 티 푸드 로쿰은 마치 녹말로 만든 인절미나 절편 같은 느낌이었다. 튀르키예인들의 홍차문화에서 배운 것은 ‘개인의 기호와 취향을 존중 한다’는 거였다. 실제로 튀르키예인들은 차를 우릴 때부터 마시는 모든 과정에서 각자 자신의 취향대로 차의 농도와 가미할 품목을 결정한다고 한다. 또 놀란 것은 튀르키예의 전통 차도구가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거였다. 은이나 동으로 만든 다관에 염료와 장식품을 붙여 장식하는 방식이었다. 불 위에 물주전자를 놓고 물 주전자 위에 티포트를 올려 가열하는 것이 특이했다.


상설전시장 3층의 한국 다례 체험관에서 다례강사의 지도에 따라 차 시연을 하는 짝꿍

한국다례 체험관에서도 다도 시연을 하고 있어서 즉석에서 신청하고 참여했다. 내 방식과 다른 것이 없어서 익숙한 다도의 모습이었다. 시연 장에서 제공되는 햇차도 훌륭한 세작이었다. 짝꿍이 시연하는 차를 마셨다. 집에서 아침마다 차를 우려주는데, 짝꿍이 시연에 참여하는 건 처음이라 실수를 하면서도 즐거워했다. 다례 강사님의 설명 중에서 허브차를 마실 때 녹차를 블랜딩하면 차맛이 싱겁지 않다는 말에 공감했다.


다음날 일본관에서 말차 시연에 참여했는데, 직접 해보지 못하고 시연자가 격불 해서 주는 말차를 대접받았다. 시종일관 단아한 모습으로 시연하는 모습이 행사장의 소란함과 대비되었다. 황토색 다완에 담긴 말차의 고운 녹색 거품이 아름다웠다. 입안에 머금을 때의 고소한 향기와 쌉쌀한 후미는 정신을 깨울 만큼 강렬했다. 시연이 끝나자 시연 자가 시창을 들려주었는데, 가사가 귀한 인연을 환영하고 감사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내년 행사에 오게 되면 부채에 그림을 그려서 증정하겠다고 약속의 말을 하면서 마쳤다. 일본관은 시연자의 품위와 섬기는 모습이 특별했다. 젊을 때 일본다도를 배웠다고 한다. 가진 재능과 수련의 결과를 나누면서도 참으로 따스하고 극진한 모습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일본관 다도 시연장에서 말차를 시연하는 모습



부스를 지나가다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야생 차나무들을 찾아다니며 기록으로 남겨 책을 엮은 [차신]의 저자 정소암 선생이었다. 그 사이에 발간한 [잭살학개론] 사인 본을 증정하여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목차를 살펴보니 한국의 전통 발효 홍차 덖음에 관한 책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절멸되다시피 했던 차 덖음과 발효기술의 전통을 복원하는 과정이 선생의 가업전승 과정과 맞물린 듯했다. 찻잎마술 차실에 초대를 받아 소암선생 부부와 반갑게 조우하고 햇차를 대접받았다. 쌍계사 입구의 ‘쉬어가기 좋은날’에서 더덕 정식을 먹고 다시 차실로 돌아와 수수부꾸미에 잭살차를 마셨다. 저녁이 늦도록 소암선생과 나눈 이야기가 다농가의 어려움과 박람회 진행과정의 후일담이었다.


현재 다원을 이끌고 있는 세대가 이미 노년을 바라보는데, 다농가의 자녀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나 도시의 삶을 선택했다. 그들은 죄가 없다. 강요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타지인들이 다농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찻잎을 채엽하던 분들이 노환으로 일을 놓아 인건비는 몇 배로 비싸졌지만 전처럼 소출을 낼 수가 없다는 말을 심각하게 들었다.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해외에서 노동력을 부를 수는 없는 건지 고심하고 있었다. 한국이 처해 있는 예고된 인구절벽의 고통을 다농가라고 피해갈 수 있을까. 낮에 요산당 후계자청년을 만나지 않았다면 근심에 눌렸을 거였다. 한국의 차 산업에 희망도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 동안 4~5일간 진행되던 야생차박람회를 한 달이라는 긴 시간동안 끌고 가는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고충이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한 주일을 앞두고는 서울에서 열리는 차 박람회가 겹쳐 부스를 비우고 올라갔다는 소식도 들었다. 낮에 보았던 빈 부스들이 이해되었다.


1행사장의 차천년관에서 캡쳐한 차료들


햇차를 마시고 산자락을 그득 채운 천년 차밭을 원 없이 보고 다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어 새로운 다원을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 축제를 통해 녹차의 다양한 활용성을 접할 수 있었다. 다른 나라의 이색적인 차 문화 시연에도 참여하고, 다양한 전통 티 푸드를 만들어볼 수 있어서 나름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무엇보다도 일일 입장권을 구입하면 참가하는 모든 체험이 무료였다는 점이 좋았다. 아마도 차문화를 확장시키는데 체험프로그램이 좋은 기회를 제공했을 거라고 기대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야생차박람회를 보고 차문화를 전하는 다인의 입장에서, 또 야생차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관람자의 입장에서 크게 아쉬운 점이 있었다.


다원을 중심으로 축제를 기획하면 좋겠다는 거였다. 행사장이 둘로 나뉜 것은 장소의 협소함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해도 2 행사장의 배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생동하는 다원은 땡볕아래 작은 부스를 차지하고 차 문화와 역사적 기록물은 박물관에 다 있는 내용인데, 거대한 전시관을 차지하고 부연을 하고 있었다. 행사의 본래 취지가 드높고 야망찬 기획에 자리를 내줘버린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낯설지 않은 모습에서 관료적 전시행정의 그림자를 보는 건 씁쓸한 일이다. 국제적 행사를 치르기 전에 다원들과 행정기관의 조율이 선행될 순 없었던 걸까?


야생차의 생산자들이 주인공이 되어 소비자를 직접 만나고 차 문화를 확장시켜 가야하는데, 그러자고 한다면 다원들이 오일장의 판매자나 리버마켓 셀러처럼 취급 받아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잡화와 먹거리를 파는 부스나 행사 도움을 위한 민원복지 기관들이 배치되어야 마땅한 행사장 주변이 다원의 자리여야 했을까 의문이 남았다.


야생차박람회를 보고 돌아와 기록을 남기고 있는 지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행사장의 주변의 좁은 부스에서 비를 맞으며 관람객을 구경하던 다원들의 모습이, 우중에 습기에 민감한 차 상품이 급조한 판매대에 초라하게 쌓여있던 모습이 체한 것처럼 마음에 걸려있다. 행정과 실제 현장이 협업하여 만들어가는 일이라 서로의 이해가 다르고 처음 치르는 국제적 행사인지라 내부의 사정과 외부의 평가를 다 만족시킬 수는 없었을 터였다. 게다가 야생차박람회를 통해 농산물 수출협약 등의 괄목할 성과를 이루어온 하동군의 행정가들의 고심 또한 깊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왕에 시작된 야생차의 국제적 행사가 앞으로 더욱 뻗어나가 한국의 차 산업이 흥행을 맞이하면 좋겠다.



숙소에서 내려다본 제 2행사장. 지붕이 뾰족한 흰색의 부스들이 다원이다. 오른쪽에 박물관, 티푸드부스, 중앙에 해외관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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