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웰니스족 1> 12. 포커페이스

- 웰니스아파트 704호

by 힐링가객


오후에 밖이 시끄러워 내다봤더니 윗집 아이들이 계단을 올라가면서 떠드는 소리였다. 뭔 일인가 싶어서 계단 위쪽을 살펴보는데 그 위층 집으로 들어간 듯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벽을 타고 울리는 발망치 소리가 나의 오후를 헝클어뜨리기 시작했다. 아래 위층 아이들이 모여서 노는 건가? 바로 위층이 아닌데도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조만간 9층에 찾아가 8층의 실태를 설명하고 내가 작성하고 있는 설문지에 사인을 받기로 했다. 모든 걸 설명하기에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설문지가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8층의 실태가 제대로 알려지면 망신스러워서라도 이 아파트에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뻔뻔한 인종이니 어쩔지 모르겠지만.


현실의 층간소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감시간으로 정한 그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환경분쟁조정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아 작성하고 있는 양식들을 하나하나 챙겼다. 다양한 소음분쟁의 상황들과 비교했을 때 내 경우도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그 동안 틈틈이 채워 넣은 구비 서류의 내용을 읽어보는 것만도 시간을 잡아먹었다.


이틀 후, 내가 정한 디데이에 드디어 신청서 접수를 끝냈다. 이 정도를 실행한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졌다. 혹시 추가로 증명할 내용들이 있을지 몰라 녹음과 기록은 계속 남길 거였다.


위원회에 신청한 사실을 위층에 알리는 것이 좋을지 궁리했다. 인터폰으로 이야기하면 위층 여자의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게 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가 기관에서 연락을 받으면 갑자기 나에게 해코지를 할 수도 있었다. 남편이 귀국할 때까지 기다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 때까지 기다린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그리고 왠지 남편이 있다고 해도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면으로 부딪쳐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남편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분명 합리적인 방법이라며 갈등 없이 상황을 종료하기 위해 피할 방법부터 고려할 것이 뻔했다.


고민해봤지만 옥신각신 하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고지를 하는 것이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얼굴을 대면하는 건 더 끔찍했다. 이런 건 피차 알아먹을 수 있게 명확하게 글로 전달하는 것이 좋을 거였다. 나는 A4용지를 반으로 접고 공동주택인 웰니스아파트 주민으로서 위층의 층간소음 때문에 내가 당한 피해상황을 국가소음분쟁위원회에 고발했음을 간단히 적었다. 그리곤 지체하지 않고 나가 804호 우체통에 넣어두고 돌아왔다. 누군가 일부러 폐기하지만 않는다면 메모는 읽힐 거였다.






밤이 늦었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현관을 비추는 비디오폰을 보니 위층 남자다. 남편 없이 맞닥뜨리는 것이 불편해서 잠깐 망설인다. 하지만 법으로 대응하기로 한 이상 언쟁에 휘말릴 일은 없다. 나는 눈에 띄는 고무망치와 스마트 폰을 들고 현관으로 나간다. 휴대폰을 녹음모드로 설정해 현관 앞 콘솔에 고무망치와 함께 올려놓고 문을 연다.


“바깥 분은 안 계신가요? 어디 멀리 가셨나 봐요. 사내들끼리 만나서 술이나 한잔 하면 해결될 일을 가지고 이웃끼리 참 성가시게 됐네요.”


남자가 느린 말투로 이야기하곤 힐끗 집안을 들여다본다. 나는 대답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린다. 남자가 내 얼굴을 똑바로 보더니 입을 연다.


“신고를 하셨다고요? 소음 측정 해 보고, 피해보상금 내라면 냅니다. 얼마든지요. 그런데, 이제부턴 딴 소리 마세요. 아주머니도 하고 싶은 대로 했으니, 우리도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팔짱을 낀다. 마음대로 하겠다니, 제발 그래주길 바란다. 당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녹음하고 기록할 테니까.


치밀어 오르는 말들을 불굴의 의지로 입막음한다. 어차피 말상대는 하지 않을 거였다. 속으론 심장이 납작해지는 기분이지만, 표정 없이 남자를 쏘아볼 뿐이다. 송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대치중인 이 상황에서 물러설 순 없다. 전화라도 울리면 좋으련만 이 시간에 그럴만한 사람은 생각나지 않는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남자를 쏘아본다. 윗집 남자는 알지 못할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이 VIP를 향한 포커페이스 작전이란 걸.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내 무기는 포커페이스 밖에 없다. 대답을 기다리던 남자가 눈을 부라리면서 말한다.


거 좀, 이웃끼리 이해하면 안 됩니까? 사람답게 삽시다. 좀, 사람답게.


그리곤 돌아서더니 계단을 쿵쿵 울리며 올라간다. 나도 현관문을 있는 힘껏 당겨 건물이 쾅 울리도록 닫는다. 사람답게 살잔다. 그깟 보상금은 나도 원치 않는다. 사람을 뭐로 보고 그 따위 보상금 이야기로 위협을 하는가! 보상금이 문제가 아니다. 이 불명예를 어떻게 보복하나. 당장엔 옆에 없는 남편에게 부아가 치민다. 집안에 나와 송이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위협을 당해도 속수무책인 내 상황이 원통하다. 저 쓰레기 족속을 당장 처벌할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이럴 순 없다.


저런 더러운 족속은 쫒아내야 마땅하다. 맹세한다. VIP가 나가든 내가 죽든 둘 중 하나다. 소음뿐 아니라 저 집의 비위생적인 상태를 만천하에 알려 망신이라도 줘서 내쫓을 것이다. 증거를 수집해서 그 더러운 환경에 아이들을 방치하고 학대해온 사실을 고발할 것이다. 망치질을 한 것도 아닌데 주먹을 쥔 손이 후들후들 떨린다. 협탁에 놓아두었던 고무망치를 들어 현관문을 향해 던진다. 낭랑공주의 자명고처럼 현관문이 울린다.

“엄마 그러는 거, 무셔어”

말소리에 돌아보니 울음을 참고 있는 송이의 얼굴이 보인다.

“어 송이야 왜 나왔어? 뭐가 무서워?”

다가서는 나에게서 한 걸음 물러선 송이가 현관에 있는 거울을 가리킨다.

“엄마 얼구울, 여귀 가타아.”

울음을 터뜨리며 송이가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송이에게 다가가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인지 현관이 기우뚱한다. 그 바람에 몸의 중심을 잃고 신발장에 기댄다. 일그러진 입술에 충혈 된 눈을 번득이는 얼굴이 거울 속에서 나를 마주보고 있다. 송이 말대로 요괴가 따로 없다. 요괴가 발음이 안돼서 여귀라고 하는 송이의 말에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신발장에 기댄 몸이 스르르 흘러내려 현관 바닥에 주저앉은 꼴이 된다. 그러는 중에도 송이의 발음을 똑바로 고쳐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웃기다. 너무 웃겨서 버둥대다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얼굴이 벌겋다. 어쩌다 붉은 여귀가 되어버렸나. 생각하면서도 웃음이 제어가 안 된다. 너무 웃어서 숨쉬기가 힘들다. 답답한 가슴을 틔우려고 소리를 질러본다. 기대했던 것보다 옥타브가 높은 고음이 나온다. 음성 배틀을 하듯 마구 소리를 지른다. 막혔던 가슴이 뚫린다. 저런 천박한 인종들은 너끈히 몰아낼 자신감이 솟는다.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여기는 어딘가. 송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연작소설 <웰니스족 1> 웰니스아파트 704호 스토리를 읽어주신 독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웰니스족 2> 웰니스아파트 804호 스토리는 6월 마지막 주부터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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