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신고를 당했다 - 웰니스아파트 804호

연작소설 <웰니스족>

by 힐링가객

* 전편의 이야기는 여기에있어요 -> https://brunch.co.kr/@healingsiinger/57




옷이야 어차피 젖을 텐데, 바람막이나 하나씩 챙기면 되는 거 아닌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초여름에 입혔던 쌍둥이의 바람막이를 찾는다. 말복은 지났지만 여전히 더워서 좀 젖는다고 체온이 금방 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일삼아 비를 맞는 건 처음이라 살짝 걱정도 된다.


“호호랑 비맞이 갈 건데 규원이 데려갈까? 신발이랑 옷은 젖어도 되는 걸로 입혀.”


위층 언니의 전화에 때는 이때라고 흥분해서 외출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번에 아이들 데리고 ‘비맞이’ 하고 왔다는 언니 말에 규원이도 같이 갔으면 좋아했을 텐데 아쉽다고 했더니 연락을 준 것이다. 달맞이나 해맞이는 들어봤어도 비맞이는 처음 들어봤다.


쌍둥이까지 대동하면 귀찮아하려나, 살짝 걱정도 된다. 요즘 들어 규원이는 동생들을 떼놓고 혼자 호호 형들과 놀러 가는 걸 좋아한다. 그럴수록 동생들은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아이들의 밀당 심리가 만만찮다. 웬만하면 규원이만 보낼 텐데, 모처럼 언니가 데려가는 놀이라 따라나서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만약 큰 애들 노는데 방해되면 쌍둥이는 맛보기만 하고 들어올 생각이다. 비 오는 날은 정말 무료하고 갑갑하다. 습기 들어올까 봐 문도 열어두지 못하니 더 그렇다.


우산을 들고 내려온 호영이와 호민이를 보고 규원이도 우산을 챙겨든다. 마음이 들뜬 아이들은 지붕이라도 뚫고 날아갈 기세다. 현관문을 붙들고 소란을 피우는 규원이와 호호에게 들어오라고 재촉해 집안으로 끌어들인다. 쌍둥이도 신이 나서 형들에게 달려가 참견을 한다. 지원이는 분홍 리본 백을 챙겼고 시원이는 형의 우산을 뺏으려고 잡아당긴다. 큰소리가 나려는 순간 다행스럽게도 언니가 와서 문을 두드린다.


“쌍둥이도 가는 거야? 잘 됐네.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허락도 안 받고 따라나서려고 준비했어요. 기회 있을 때 맛을 봐야죠. 비맞이가 뭔지.”


나도 비닐 백에 쌍둥이의 모자를 넣고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묶어서 팔에 걸었다. 아파트 산책로의 젖은 풀이 싱그러웠다. 공원으로 이어지는 후문으로 나갔다. 비는 잦아들어서 이슬비처럼 내렸다. 산책로 갈림길에서 언니가 비닐봉지를 열더니 투명한 플라스틱 컵을 꺼내서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누가 누가 빗물을 많이 받아서 컵을 빨리 채우는지 겨뤄 볼 거야. 고인 물을 퍼 담으면 안 되고 떨어지는 빗물이면 뭐든 받을 수 있으니까 찾아보자.”


언니가 먼저 하늘을 향해 컵을 들었다. 아이들이 따라 했다. 풀잎 끝에 맺혀있는 빗물방울을 컵에 털어 넣는 언니를 보고 아이들이 쪼르르 앉아서 풀잎에 컵을 댔다. 언니가 투명한 플라스틱 컵을 흔들어 보이자 컵 속에 담긴 맑은 물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갑자기 아이들이 바빠졌다. 우산을 쓰고 나무들을 찾아다니며 빗물을 받았다. 쌍둥이는 놀이를 이해하지 못해서 컵을 들고 따라다녔다. 아기용 우산이 따로 없어서 시원이에게 좀 작은 접이 우산을 펴서 주었더니 두 손을 벌려 우산대를 잡았다. 옆으로 들고 있는 우산에 시선이 막혔는데도 무작정 걷는 시원이가 어딘가 부딪힐까 봐 조마조마했다. 무의식 중에 좀 전까지 쫓아가며 우산을 씌워주다가 아차, 하고 멈추고 지켜보는 중이었다. 시원이와 지원이의 작은 머리통으로 비가 내렸다. 젖으러 나왔으니 실컷 비맞이를 경험해 봐야지, 하면서 지켜봤다.



“우샨, 우샨, 저젓더 저저 저저.” 시원이는 신기한지 내가 하는 말을 부지런히 한 마디씩 따라 했다. 그러다 물웅덩이를 발견하고는 다가가 발을 집어넣었다.


“시원이 신났네. 찰방찰방 웅덩이 물놀이 신나게 한 번 놀아보자!”


언니가 시원이를 보곤 발을 굴렀다. 시원이가 화답하듯 힘차게 발을 굴렀다. 지원이도 합류해서 찰방 댔다. 순식간에 쌍둥이의 신발이 흠뻑 젖었다. 시원이는 물웅덩이에 첨벙 앉아서 컵으로 물을 퍼서 뿌렸다. 말릴 새도 없었다. 물만 있으면 욕실이었다.


빗줄기가 굵어지는가 싶더니 빗소리가 소란해졌다. 나뭇가지를 흔들던 아이들이 우산살에서 줄줄 흐르는 빗물을 받았다. 물 컵은 금방 차올랐다. 호영이는 가로등 기둥에 모여 흐르는 빗물을 받아서 먼저 채웠다. 호민이 컵도 차올랐다. 곧 규원이 컵도 채워졌다.


“이번엔 우산 돌려 빗방울 튕기기 할거야. 자, 이건 다른 사람이 있는 길에선 하면 안 되는 거니까, 오늘 여기서만 하는 거야. 시작! 안전거리 유지해야 되니까 우산 놓치지 말고, 서로 가까이 가지 않기.”

쓰고 있던 우산을 돌리며 언니가 물을 튕겼다. 아이들도 돌렸다. 호민이 우산이 제일 신나게 돌아갔다. 우산살 끝에서 방사되는 물방울이 현란한 무늬를 만들며 멀리 퍼져나갔다. 그 바람에 아이들 옷이 순식간에 다 젖어버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산을 내려놓고 얼굴에 비를 맞으며 하늘로 손을 뻗었다. 아이들이 빗물을 맞으며 뛰었다. 언니도 아이들과 함께 젖었기 때문에 멀쩡한 건 나뿐이었다. 굵어진 빗줄기 때문에 삽시간에 물웅덩이들이 생겨났다. 아이들이 시원이 지원이 처럼 찰방찰방 물을 튕겼다. 언니가 새로운 미션을 주었다.

“떨어진 나뭇잎으로 배를 만들어서 물웅덩이에 띄워볼까? 떨어진 나뭇잎과 가지들만 사용해서 만드는 거야.”

아이들이 흩어져 달려가서 나뭇잎을 주워왔다. 언니가 끝을 접고 풀의 줄기로 고정시켜 나뭇잎 배를 만드는 걸 보여줬다. 다 같이 한두 개씩 만들어서 물웅덩이에 띄웠다. 지원이는 공원 주변에 피어있는 강아지풀에 마음이 팔려 빗물을 잔뜩 머금은 씨방을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내리쳤다. 물방울이 후드득 흩어지는 게 재밌는 모양이었다. 웅덩이를 휘젓던 시원이는 끝도 없이 물탕을 튕겼다. 물이 움직여 퍼졌다가 다시 모여드는 것이 재밌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나뭇잎배를 입으로 불면서 노를 젓는 동안 지원이에게 달려간 언니가 물에 젖은 나무 조각과 모래알과 떡잎이 진 이파리로 펼쳐놓은 우산에 눈코입이 있는 사람 얼굴을 만들었다. 형상의 테두리가 없어도 솔잎을 얹으면 눈썹이 되고 나무껍질을 얹으면 입이 되었다. 지원이가 꽃밭에서 젖은 조약돌을 주워 우산에 붙이는데 시원이가 다가가더니 손으로 쓸어냈다. 지원이는 올리고 시원이는 쓸어내자 우산이 지저분해졌다. 결국 지원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느라 시원이가 딸꾹질이 나는 것도 몰랐다. 바람막이 생각이 나서 꺼내 입히고 모자까지 씌웠다. 지원이도 목을 움츠렸다. 아이들이 뭘 하고 놀지 너무 궁금했지만 쌍둥이는 이미 한계였다. 입술이 파래진 시원이가 감기에 걸릴까 봐 데리고 들어왔다. 언니랑 아이들은 더 놀겠다고 남았다.

들어오자마자 계란을 찜기에 얹어 타이머를 맞춰놓고 따스한 물로 쌍둥이를 씻겼다.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고 와서 또 물놀이를 하는 줄 알고 좋아했다. 옷을 입혀놓고 데운 우유를 빨대 컵에 쥐어주자 곧바로 졸린 듯 쿠션을 타고 엎어졌다. 비맞이하고 들어오면 따스하게 먹이려고 냉동 만두를 꺼냈다. 이렇게 비 오는 날 먹기에 냉동만두는 나름 괜찮은 간식이었다. 달궈진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앞뒤로 노릇노릇하게 구웠다. 잘 구워진 만두에 물을 몇 숟갈 뿌리고 뚜껑을 덮은 뒤에 불을 줄였다. 물이 졸아서 없어질 즈음에 뚜껑을 열고 간장과 식초와 물엿을 1:1:1로 섞은 시럽을 만두 위에 고루 뿌려놓고 불을 껐다.

쌍둥이를 먹이려고 접시에 만두를 꺼내고 있을 때 언니랑 아이들이 들어왔다. 현관 앞 거실에 야외용 비닐 매트를 깔고 젖은 아이들이 옷을 벗기 전에 둘러앉혔다. 방금 찐 계란과 따끈한 구운 만두를 보곤 언니랑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음료 대신 낮에 만들어 둔 콩나물국을 떠주었다. 비맞이를 하느라 출출했는지 식욕이 제대로 터진 아이들이 순식간에 다 먹어치워서 언니도 나도 겨우 하나씩 맛을 봤다. 놀이터 젖은 모래에 발자국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호호 형제는 커다란 배를, 규원이는 고래를 그려놓고 왔단다. 고래 눈은 누군가 놀이터에 두고 간 공으로 장식하고 이빨은 정원수에서 떨어진 꾸지뽕 열매로 장식해서 상어가 되었단다.

“상어가 헤엄쳐서 미끄럼틀 먹어버릴라 그랬는데, 형아가 만든 배가 미끄럼틀 싣고 갔어. 그치 형아?”

규원이가 흥분해서 이야기하는데 내용이 너무 황당했다. 아이들의 스토리텔링에 언니가 마술을 부린 것이 분명했다.





비맞이를 하고 다음 날은 기침이라도 할까 싶어서 긴장했다. 시원이도 지원이도 별 탈 없이 지나갔다. 비는 이틀 동안 줄기차게 내렸다. 3일째 아침까지 내리고 구름이 옅어졌다. 언니 덕분에 비맞이를 경험하고 나서 내가 얼마나 경직된 인간인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유연성 없는 양육자를 만난 내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창의적으로 많은 것을 경험시킬 방법은 찾아보면 쌔고 쌘 거였다. 비싼 놀이프로그램을 찾아다니지 못한다고 애 닳을 일이 아니었다. 반성을 하면서도 한 편으론 위층 언니를 이웃으로 만난 것에 안도했고 감사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곳곳에 물웅덩이가 남아 있었다. 물웅덩이를 찰방대는 아이들의 모습이 생각나서 쌍둥이를 데리고 나갔다. 놀이터 앞 차도에서 물웅덩이를 만난 아이들은 이미 놀아본 전적이 있는지라 무작정 달려가서 발부터 담그고 찰방 댔다.


“얘들아 발만 적시는 거야. 지난번처럼 엉덩이랑 손 젖으면 집에 가는 거야. 계속 놀고 싶으면 발만 적시고 놀아야 해. 알았지?”


쫓아다니며 열심히 설명했다.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새로운 물웅덩이를 찾아 뛰어다니며 물탕을 튕겨댔지만 웅덩이에 앉지는 않았다.지원이랑 부딪혀서 시원이가 기우뚱하면서 웅덩이에 손을 짚는 바람에 결국 젖어버렸다.


관리실 화장실에 들러 시원이와 지원이의 손을 씻기고 나오는데 힐을 신은 여자가 관리실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여자의 뒷모습이 눈에 익었다. 관리실 창문들이 열려 있어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건물 안에서, 그것도 주민 전체가 이용하는 공용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규정이 없다는 게 말이 돼요? 그럼 차라리 흡연실이라고 주차장에 써 붙이세요. 간접흡연 방기하는 몰상식한 아파트에 이름만 웰니스면 다예요? 이런 식으로 관리할 거면서 관리비는 왜 받죠? 이제부터 난 관리비 안내요. 아니 못 냅니다. 그렇게 아세요. 입주민의 권리와 안전도 보호해주지 못하는 아파트니 방송국에 제보라도 해야겠어요.”


감이 왔다. 아랫집 여자의 목소리였다. 논리적으로 따져대는 말들은 다 일리가 있었다. 속이 시원했다. 그걸 저렇게 따질 수 있는 거구나. 겨우 남편 하나 금연시키는 것에 만족했는데. 정말 차원이 다르네! 나는 정말 혀를 내둘렀다. 관리실 뒤편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에서 아이들 손을 붙잡고 서성대며 여자를 설득하는 관리실 직원들의 변명을 들었다. 입주민 불편사항으로 접수해서 동 대표 회의에서 규제화하겠다는 거였다.

“관리 문제로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굵은 목소리의 사내의 목소리가 상황을 정리하듯 말했다. 여자가 한 풀 꺾인 목소리로 타일렀다.


“입주민의 건강을 해치는 중요한 문제니까 책임지고 꼭 처리하세요.”


명령하는 말투였다. 잠시 후에 시멘트 계단에 힐이 찍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관리실 뒤로 더 들어갔다. 잠시 후에 차 시동을 거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내밀어 확인했다. 관리실 앞에 세워져 있던 흰색 승용차가 거칠게 달려 나갔다. 뭔가 다급한 일이 있는 모양, 아니면 화가 안 풀렸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처럼.


멀어지는 여자의 차를 바라보는데 기분이 묘했다. 여자를 향해 180도 달라진 마음의 온도를 느꼈다. 사실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뛰어 올라가 응원하고 싶었다. 논리적으로 따지는 당찬 요구가 얼마나 통쾌한지 그동안 쌓였던 불편한 마음까지 순간 다 잊어버릴 정도였다. 당장 여자와 한 편이 되어 잘못된 관행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당위가 자질구레한 감정을 덮어버렸다. 입주민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적어도 저런 정도의 성질머리가 필요한 거였다. 내겐 없는 여자의 장점이었다.







쌍둥이를 데리고 들어가는 길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처럼 슈퍼 앞에서 아이들이 발을 멈췄다. 당연한 것처럼 지원이가 내 손을 잡아끌었고, 시원이도 할 줄 아는 말을 총동원하면서 나를 설득시켰다.

“여기 가까? 냠냐 냠냐.”


시원이가 방향까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냠냐를 사달라는데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슈퍼 주인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쌍둥이를 맞이했다. 내가 허락하는 두유를 들고 시원이가 카운터로 갔다. 지원이는 또 장난감이 포장된 중간 길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두유 하나를 더 집어 들고 지원이의 손을 잡았다.


“다둥이 엄마 요즘 별일 없어요? 거 왜 요즘엔 아래층 여사님과 별일 없냐고.”


늘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슈퍼 여자가 빙빙 돌려 질문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늘 그렇죠 뭐. 위층에 사는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일이 없어도 있다고 하면 있는 거잖아요. 요즘엔 그냥 뭐라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요.”

슈퍼 여자가 개운찮은 얼굴로 뭔가 말을 하려다 참았다. 나는 얼른 베지밀 값을 치렀다. 당장 뚜껑을 열어달라고 발을 동동 구르는 시원이에게 베지밀 뚜껑을 열어서 쥐어주었다. 주인 여자가 빨대를 꺼내서 꽂아주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데 등 뒤에서 주인 여자가 이야기를 꺼냈다.


“소음문제 관할하는 무슨 기관에 다둥이네를 신고한다고 하던데, 했나 모르겠어서.”

“그래요? 저희를요? 무슨 신고를 한데요?”

“뭔 말 없었나 보네. 바퀴벌레 알레르기가 있어서 그 집 아이가 천식 발작으로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있었다고 하더라고. 여사님이 엄청 흥분해서 이 아파트가 바퀴벌레 소굴이 되기 전에 신고를 할 거라고 했는데. 황당해서 내가 소음하고 바퀴벌레 하고 뭔 상관이냐고 물어봤더니 위층이 불결해서 그렇다는 거야. 남의 집을 들여다보기라도 했나, 무슨 근거로 그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거 같았거든. 아이가 몸이 엄청 약한가 봐. 천식 발작으로 119에 실려 갈 정도면. 자세히 물어보고 싶어도 그렇게 흥분하는 거 첨 봐서 뭔 말도 못 붙이겠더라고.”


이건 또 무슨 말인지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신고라니. 내가 그런 일까지 당하게 되는 건가? 정말 다른 타협점이 없는 걸까? 찜찜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이질적으로 뒤섞여 머릿속이 와글와글 복잡했다.

송이를 그렇게 끔찍하게 감쌌던 이유를 이제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아이가 아프면 그럴만하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뭣 때문에 우리 집을 흠잡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재활용쓰레기 버리던 날에 남편과 마주친 날 쓰레기를 보고 그러는 건가 싶었다. 짚이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집안이 자주 어질러지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도 죽도록 열심히 치운다. 주말마다 대청소도 하고 화장실과 베란다는 청소할 때마다 락스 세제로 소독을 한다. 하지만 그 여자가 알 리가 없는 일이었다.


송이의 알레르기 증세가 그 정도라면 누구도 그 여자가 유난 떤다고는 말할 수 없을 거였다. 어떻게든 오해가 풀어지면 좋을 텐데, 신고를 당하고 법적으로 싸워서 좋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낮에 지하주차장 담배 냄새에 관리실을 찾아가 그렇게 난리를 친 것도 송이 때문이었다는 걸 이해했다. 나에게 우리 아이들이 안타깝고 귀한 것처럼, 그중에서도 시원이가 아픈 손가락처럼 더 마음 쓰이는 것처럼, 그 여자에게 송이도 그런 존재인 거였다. 어려움을 풀어가는 길은 역지사지인데, 도대체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 융통성이 없는 내 머리론 아무런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바퀴벌레는 매달 꼬박꼬박 소독을 받는데도 가끔 한 마리씩 출몰했다. 하나만 보여도 백 마리가 서식 중이라는 말이 있어서 긴장이 되었다. 그래서 식탁 밑이나 개수대 주변에 유기물이 떨어진 채 방치되지 않도록 신경 써서 치운다. 우리 집에 출몰했으니 아래층이라고 무사했을 리 없다. 그 여자도 본 적이 있을 거였다. 아마도 아이들이 많은 우리 집이 진원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억울하지만 소통이 안 되면 변명할 기회도 없었다. 한 편으론 답답하고 또 한편으론 조급했다.

알레르기 천식 기관지염 환자의 환경 개선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검색해 보았다. 좋은 제품들이 있었다. 공기청정제는 기본이고, 환풍장치나 필터들도 있었다. 공기정화를 위한 산소 발생기에 관심이 있어서 자세히 알아보았다. 백일 동안 실내공기를 정화하는 소모품이었다. 나는 정기 소독 외에 바퀴벌레를 관리할 수 있는 퇴치제와 함께 산소발생기도 여러 개 구입했다. 송이에게 나눠주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아이들을 위해 협력하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고. 지하주차장을 흡연금지 구역으로 지정하기 위해선 내 협조도 필요할 거였다.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다.


신속배송 서비스 상품이라 그런지 다음날 바로 물건을 받았다. 뜯어서 꼼꼼히 살펴보니 쓸 만해 보였다. 시범적으로 거실에 하나 열어놓았는데, 조용해서 신경 쓰이지 않아 좋았다. 솔직히 내가 그리 민감한 편은 아니라 공기가 정화되는 느낌은 잘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아이들의 호흡기 건강에 나을 것 같았다. 이런 물건이 있는 줄 알았으면 미세먼지 심한 날에 사용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층 여자도 좋아하길 바라며, 산소발생기를 깔끔하게 포장해서 정성껏 쓴 편지와 함께 아래층 현관문 앞에 가져다 놓았다. 이전에 거절당했던 일들이 생각났지만, 이 번 만은 내 진심이 통하길 바랐다. 그만큼 공들여 사과와 공감과 제안의 편지를 썼으니까. 말하자면 송이엄마를 향한 내 마지막 노력이고 소망이었다.


그날 밤, 퇴근한 남편의 손에 들려있는 박스를 보고 바로 눈치챘다. 남편은 식탁에 물건을 내려놓고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리곤 헛웃음을 터뜨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내가 포장한 박스 위에 포스트잇 메모장이 붙어있었다. 내가 쓴 편지는 없었다.


‘웰니스아파트에 살려면 웰니스가 뭔지부터 파악하세요!’


정중한 문구에서 조롱이 느껴졌다. 내 글을 읽었을까? 편지가 없는 걸로 봐서는 읽었을 거였다. 내가 진심으로 써 내려간 편지를 읽었다면, 이럴 순 없었다. 진심을 거부당한 것은 생각보다 타격이 컸다. 이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없이 든 생각이지만 자괴감이 덮쳐왔다. 송이의 천식발작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공감의 감상에 빠져있던 현실감이 돌아왔다. 무슨 과대망상증도 아니고, 며칠 동안 혼자 낭만적인 상상에 빠져 이심전심을 기대하고 있었던 거였다. 줏대도 자존심도 없는 똥멍청이가 바로 나였다. 통렬한 반성과 함께 원망스러웠다. 다른 곳에서 다른 일로 만났다면 이런 악연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여자는 정말 벽보다 더 단단했다. 사이보그를 상대해도 이보단 나을 거였다.

될 대로 되라지. 체념하는 마음과 함께 씁쓸한 열패감이 몰려왔다. 내가 웰빙의 기본도 모르면서 웰니스아파트에 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무슨 특별한 철학이 있어야 하는 건가. 그런 건 없어도 나 역시 나름대로 건강과 행복을 얻기 위해 살고 있건만, 자기 기준에 안 맞는다고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는 건가?

공동주택에 들어온 이상 좋게 살고 싶지 누가 눈치보고 싸우고 싶을까. 웰빙인지 웰니슨지가 저만 위하는 그런 거라면, 왜 하필 공동주택에 들어와서 이웃을 괴롭히면서 해야 하는 건지, 왜 함부로 내 아이들의 자유를 통제하면서 자기의 라이프스타일을 강요하는 건지 모르겠다. 웰니스아파트에 살려면 웰니스가 뭔지 부터 파악하라니!


내 기분을 충분히 긁었으니, 사람을 무시하고 가르치려는 그 여자의 의도는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하지만 ‘웰니스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 여자의 기준에 찬성할까? 아니라고 본다. 순전히 해석하기 나름 아닌가! 사람은 본래 어울리며 살아야 하는 거다. 멀쩡한 아이들을 밤이나 낮이나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그 여자가 내 눈엔 괴물로 보였다.





그 주 금요일이었다. 늦은 퇴근을 하면서 남편이 우편물을 가지고 올라왔다. 대출안내용지와 관리비명세서 와 함께 반듯하게 접힌 A4 용지가 있었다. 국가소음분쟁위원회에 민원을 접수했다는 아래층 여자의 경고였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순간 온몸에 힘이 빠졌다. 결국 송사에까지 휘말리게 되는 건가? 아홉 시 뉴스에 나오고 싶지는 않은데, 내 맘 같지 않았다. 남편은 시간을 보더니 한 번 만나 봐야겠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이들이 잠든 시간이라 현관문을 열고 아래층 동향을 살폈다.


내가 수차례 내려갔지만 아래층 여자는 한 번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날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여자가 문을 열고 응대를 한다면 다행이었다. 오랫동안 영업을 해온 남편은 사람 관계를 편안하게 풀어가는 편이었다. 어떤 경우라도 모나게 굴지 않는 그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별 부딪힘은 만들지 않을 거였다. 어쨌거나 문은 열리지 않을 거였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초인종을 누르고 오래지 않아 아래층 문이 열린 거였다. 만약 여자가 언성을 높이면 내려가서 중재를 하려고 집중해서 들었다. 그런데 남편의 목소리만 들렸다. 반응 없는 여자의 모습이 너무 궁금했으나 확인할 재간이 없었다. 결국 불편한 침묵의 시간을 끊고 남편이 할 말을 일방적으로 전하고 올라왔다. 거칠게 닫히는 아랫집 현관문 소리가 공용계단을 꽝 울린 것이 다였다.


집으로 올라온 남편은 문을 열고 현관에 서있는 내 눈빛을 쓱 지나쳐 집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고 따라 들어가 남편과 함께 소파에 앉았다.


“차라리 잘 됐어. 달라는 보상금 던져주고 이제 맘 놓고 살면 돼. 그깟 보상금 기껏해야 얼마 안 나올 거니까 괜히 걱정하지 말고.”


남편의 말에 즉시 거부감이 들었다.

‘남 말 하듯,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어?’

그러나 불길에 기름 붓는 꼴이 될까 봐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그리곤 진심인지 아닌지 남편을 지켜봤다. 노기를 위장하는 건 아닌지. 하지만 남편은 여유 있어 보였다. 그만 씻고 자야겠다며 옷을 벗어놓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남편의 뒤 꼭지를 영혼 없이 바라보았다. 방금 삼킨 말의 꼬리를 물고 먼지 사이로 사라질 말들이 흘러나왔다.

‘뭐지? 나만 괜히 중간에서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건가? 내가 쫄보라서?’













*연작소설 <웰니스아파트 804호> 9회 차를 구독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브런치부그로 발행한 1부 <웰니스아파트 704호> 편을 보시면 연작소설의 서사와 갈등을 이해할 수 있어요.

*라이킷과 텍스트 공유 및 댓글에 감사드려요.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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