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비상계단을 왜 막아!
-웰니스아파트 804

연작소설 <웰니스족 2>

by 힐링가객

연작소설 8회차입니다. 이어진 서사는 여기에서 보실수 있어요~^^ -> https://brunch.co.kr/@healingsiinger/55






지원이가 넘어지던 날, 아래층 여자의 웃는 얼굴을 본 이후로 나는 또다시 복잡해졌다. 규원이의 발소리가 시끄럽다는 시비에 내가 사과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후였다. 그렇게 반박하고 먼저 끊었으니 그 여자 성격에 분노를 하고도 남았을 거였다. 그렇다곤 해도 넘어진 아이를 지나치며 좋은 일이라도 있다는 듯 웃을 수 있을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정말 이해하고 싶었다. 그 여자의 행동을.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어폰을 끼고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웃을 상황이었다거나, 아니면 심한 농담을 들었다거나. 그런 일이 아니라면,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너무도 궁금했다. 지원이가 넘어진 자리는 안에서 나오는 사람과 부딪힐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유리문 안에서는 밖이 잘 보이기 마련이었다. 여자가 지원이를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없다. 반대로 유리문 밖에선 빛 때문에 안쪽이 보이지 않는다. 미닫이문이 열리고 사람이 나오는 걸 갑작스럽게 발견한 지원이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넘어졌다면? 그 여자가 피하지 않고 다가왔기 때문에 아이가 넘어졌다면? 그건 고의성이 다분한 것 아닌가! 자기 아이는 안고, 남의 아이를 넘어지게 해놓고 일으켜 주기는커녕 외면하며 웃었다니.


어린이집 등원시간이라 서로 마주칠 수도 있었는데, 평소에 그러지 않았던 것을 보면 자차로 등원시키고 오후엔 하원차량으로 아이를 받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여자에게 사과를 건넨 나의 성의를 거절하고, 나와 마주칠 모든 가능성을 닫았던 여자가 다시 인터폰으로 따지기 시작한 날이었다. 전에 있었던 일들을 차곡차곡 모아놓고 그 날 아침의 상한 기분까지 더해서 억하심정으로 일부러 그러는 거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여전히 바투쥐고 있던 조바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아이들과 살아가면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사과조차 차단하는 여자에게 나 혼자만 예의를 지킬 이유도 없었다. 실수는 있었지만, 일부러 피해를 주려고 소음을 일으키거나 아이들의 소음이 지속되도록 방치한 적은 없었다. 빈틈없이 매트가 깔려있는데도 시끄럽다고 해서 침대용 매트리스라도 깔아야하나 알아봤을 정도였다. 아이들의 놀이 활동을 유도하기 위해 규원이의 방에 장난감들을 정리해주고, 매트 아래 러그를 한 겹 더 깔아주었다. 아이들이 정해진 곳에서만 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만.


사실 그 동안 아래층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남편에게는 시시콜콜 알리지 않았다. 외벌이로 투 잡까지 하면서 자정이 되어야 퇴근하는 남편은 항상 잠이 부족했다. 아이들 일이라면 끔찍한 그에게 층간소음 갈등을 알리는 건 스트레스나 얹어줄 뿐 딱히 도움 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악화된 것은 이웃 남자들의 모임이 있던 그 날 밤이 문제였기에 남편의 협조가 불가피했다.

주말이 되기를 기다렸다. 금요일 밤 서둘러 수면분위기를 만들어 아이들을 재워놓고 간단한 안주거리를 준비했다. 퇴근한 남편은 막 잠든 아이들부터 들여다보곤 베개를 고쳐주고 발도 한 번씩 주물렀다. 때론 선잠이 든 아이들을 깨우기도 해서 그럴 때마다 긴장이 되었다.

야채와 냉동오징어를 듬성듬성 썰어 양념 소스를 얹어 그릴에 굽고 미리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를 꺼냈다. 씻고 나온 남편이 양념이 익어가는 냄새를 들이마시며 감탄했다. 맥주는 알맞게 시원했다. 남편이 좋아하는 이 시간에 무거운 이야기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지리멸렬행성 탈출기>에서 읽은 내용을 마음속에 되뇌면서. 부부 관계에 있어 심각한 문제를 다룰 때는 최대한 가벼운 대화로 시작하고, 가장 불편한 문제는 농담처럼 전달하라는 내용이었다.

무언가 농담을 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나는 애교도 위트도 없는 성격이라 이런 사소한 일들이 힘들었다. 그러나 탈출기에서 금지한 것은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화를 내거나 딱딱한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는 거였다. 남성 호르몬이 방어기제를 작동하면 공감의 셔터가 닫히고 신념이 공격수로 나선다고 했다. 내가 원하는 것도 화풀이가 아니었다. 결혼 전에 원하는 것 한 가지만 들어달라고 청했을 때, 금연을 약속하고 지켜준 남편이었다. 나 또한 다자녀를 원한다는 그의 말을 들어주려고 여기까지 왔다. 그 때처럼 또 한 가지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나는 제로맥주로 건배를 하곤 이웃모임이 있던 1박 2일 동안 겪었던 사건을 담담하게 설명했다. 남편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아래층 여자에게 사과를 청했던 일과 거절당한 일, 그 일 이후에 있었던 갈등도 이야기했다. 지원이가 넘어지고 여자가 웃었다는 말을 들은 그는 눈썹을 치켜 올린 채 골똘히 내 눈을 바라보며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한참 말이 없던 남편은 진짜로 아래층 사람들을 만나보겠다고 말했다. 그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 말만 아흔 아홉 번 쯤 들은 것 같아서. 덕분에 웃으며 제안할 수 있었다. 내가 부탁하는 걸 들어주면 좋겠다고. 남편이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합의를 했다. 나는 휴대폰 메모장에 내용을 정리해서 남편에게 공유하고 그 자리에서 읽었다.


첫째 모임을 할 수 있지만, 집에서는 1차만 한다.

둘째 술자리를 연장하기 위해 강권하지 않는다.

셋째 아이들 앞에서 포커 등의 게임을 하지 않는다.

남편이 웃으며 동의했다. 나는 민망하거나 기분상하지 않도록 장난스럽게 잔을 들어 건배를 요청했다.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하여!”

“위하여!”


남편의 건배사에 맞장구를 치고 잔을 들이켰다. 술기운 때문인지 남편이 싱글싱글 웃었다. 탈출기에서 읽고 찔린 내용이 있었다. 스스로에게 올무를 만들지 말라는 거였다. 진중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이라거나 딱 하나만이라거나 하는 극단적 제한 조건을 정하면 지킬 수 없게 된다는 거였다. 인간이 어떤 상황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고, 약속을 지키기에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란다. 정말 찔렸다. 살아보니 맞는 말이었다.

어쨌든 남편이 동의해주어서 그나마 한시름 놓았다. 탈출기에서 읽은 대로 나는 ‘감정이 식기 전, 상황이 지나가 잊히기 전’에 남편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마음을 표현했다.


“캠핑 용품을 구입허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 전엔 우덜도 많이 다니고 좋았는디.”


맥주 캔을 구겨서 나란히 포개놓은 남편이 말했다. 하루 동안 자란 수염으로 턱 밑까지 거뭇한 그의 입가에 장난스런 웃음이 걸려 있었다. 캠핑이라는 말을 듣는데 가슴 안으로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훅 들어왔다. 옥죄고 있던 긴장이 풀어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좋지! 마음이 딱 통했네. 난 어디 농가라도 구해서 이사 가고 싶었거든. 아이들을 골짜기에 풀어놓고 텃밭에 동물도 키우면서 사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찾아보니까 그렇게 사는 사람도 많더라.”

“그게 좋긴 허지. 현실적으루 이사꺼정은 어려우니 캠핑이래두 허자는 거고.”


규원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차박 캠핑도 자주 다녔다. 규원이가 걷기 시작할 무렵에도 가족 캠핑장에서 운영하는 글램핑이나 오토캠핑 텐트를 대여해서 이용했다. 하지만 쌍둥이를 임신하고부터는 잠자리가 중요했기 때문에 리조트 숙소를 빌려서 휴가를 다녀왔고, 태어난 후로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난 번 계곡에 놀러갔을 때 찬 물에서 신나게 놀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처음이라 다녀와서 호되게 열감기를 앓긴 했지만 남편도 아이들도 모처럼 즐거워했다. 결혼 전부터 캠핑족이었던 남편이 오래 참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너무 좋아. 그런데 캠핑용품은 비싸고, 새로 구비를 하자면 끝도 없으니까, 일단 렌트해서 다녀보고 차차 마련하는 게 현실적이지 않을까?”

“그려. 내 말두 그거여. 텐트를 대여해두 필요헌건 따루 있잖어. 필수적인 것부터 구입을 헌다는 말이여.”

“우리도 몇 개는 있었지 않아? 잘 찾아봐.”

“이 사람아 벌써 잊었어? 전에 집 계약 만료돼서 이사 헐 때 봉사단 회원헌티 다 줘버렸잖어.”

“맞다. 그래서 안 보였구나. 난 연장 창고에 몇 개는 있는 줄 알았지.”


캠핑 이야기를 나누자 당장 마음이 들떴다. 어디든 나가서 자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마음을 점령해버렸다. 주말엔 숙소비도 비싸고, 미리미리 예약을 해둬야 하는데, 일단 나가면 출혈이 크기 때문에 가격만 비교하다 지나갔다. 사실 쌍둥이의 컨디션이 어떨지 걱정도 되었다. 그러다보니 주말에 조금 멀리 나가서 놀더라도 잠은 집에 와서 잤다. 찾아갈 친정도 시댁도 없기 때문에 우린 정말 집을 떠날 구실이라곤 없는 가족이었다. 그래도 캠핑 감성이 있는 남편 덕분에 갯벌이며 계곡, 수목원과 공원들을 많이도 찾아다녔다.


이젠 집을 떠나서 여행다운 여행을 하고 싶었다. 옴짝달싹도 못하게 아이들을 통제해야하는 이 끔찍한 집을 떠날 수 있다면 어디든 좋았다. 마음껏 소리 지르고 뛰어놀 수 있는 곳에 풀어놓으면 아이들이 얼마나 신날까? 그러다 아무걱정 없이 잠들면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내친 김에 소파에 누워서 캠핑장들을 검색했다. 그런데 가까운 곳들은 예약매진이었고 대기인원도 많았다. 당일에 피크닉을 할 수 있는 곳도 있었지만 예약자가 없어야 가능했다. 유능한 육아 맘은 밝은 눈으로 잘 찾아낸다는데, 유능하긴 글렀다. 터지는 하품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2주 전엔 예약을 해야겠군. 그냥 한 번 사전답사라도 가봐야 하나?”


남편도 같은 걸 찾아보고 있었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전답사라는 말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남편 성격에 저 정도면 당장 답사를 나서자고 할 거였다. 주말의 이벤트에 맛을 들인 규원이는 아빠만 보면 어디든 나가자고 채근을 해댔다. 시원이도 요즘은 하루 종일 밖에서 지내도 큰 탈이 나지 않는다. 도로만 막히지 않으면 조금 움직여도 좋을 거였다. 그런데 내일 비가 온다고 했던가. 하품을 연속으로 했더니 정신이 혼미했다. 소파에서 일어나 잠자리에 든 그의 팔을 베고 누웠다. 이렇게 잠깐 함께 눕는 것도 주말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들을 안방에서 재우고 남편은 거실에서 잘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사 왔을 때 가장 황당했던 일이었다. 요즘 새로 짓는 집들은 왜 그렇게 방이 좁은지. 규원이까지 안방에 재웠더니 남편이 누울 공간은 없었다. 투 잡으로 고단한 평일엔 잠시간 확보가 중요하기 때문에 혼자 거실에서 자는 것이 편했다.

그의 팔이 내 어깨를 감싸고 가슴을 더듬었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그의 체취를 느끼며 노곤한 몸을 맡겼다. 등을 쓸어주던 그의 손이 미끄러지면서 얕게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베개를 당겨주었더니 맥주 두 캔에 배터리가 나간 것처럼 잠에 빠진 그의 숨소리가 편안해졌다. 쏟아지는 잠 속으로 빠져들면서 생각했다. 오랜만에 달콤한 밤이라고. 한잠만 자고 아이들에게 들어가자고.


다음 날 남편이 야영장 사전답사를 가자고 아침부터 서둘렀다. 남편의 몸에는 캠핑 족의 DNA가 있는지 그렇게 피곤하게 살면서도 휴일에 늦잠을 자는 법이 없었다. 마침 월요일까지 대체휴일로 묶여 있어서 이 여름의 마지막 연휴이기도 했다. 아이들을 준비시켜 나서려는데 남편의 고향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거였다.


“으쩌냐. 장례식장 가야겄네. 동식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쓰러진지 4년 만에. 2시에 모여서 간다니께, 그 때꺼정 시간 되겄네.”


남편은 김샌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어차피 멀리 갈 수는 없고 더운 날씨에 비도 예고되어 있어서 실외 활동이 곤란한 날이었다. 일단 차에 올라 가까운 아울렛 매장에 갔다. 키즈몰 옥상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 시설이 있었다. 시원이 근육활동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가던 곳이었다.

키즈몰은 막 개장한 시간이라 한산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입장객이 많아지더니 점심 무렵엔 아이들이 바글거렸다. 아울렛 식당가는 어른을 위한 식사들이 대부분이라 시내 외곽에 있는 ‘담촌 샤브샤브’ 식당에 갔다. 잘게 썬 야채를 골고루 넣은 이 집의 소고기 샤브샤브를 아이들이 좋아했다. 특히 채수가 우러난 국물에 말아먹는 쌀국수를 정말 잘 먹었다. 이 집에서 배워서 집에서도 한동안 샤브샤브를 만들어 먹였다. 아이들이 야채와 고기와 소면까지 뭐든 골고루 잘 먹게 만들어 준 것도 고마운데, 중년의 사장님 부부가 아이들을 세심하게 챙겨주셨다. 쌍둥이가 어릴 땐 아기들 유모차도 밀어주셨다. 엄마아빠도 밥먹을 시간이 필요하다며. 점심을 먹고 나오자 흐린 하늘이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 남편은 옷을 갈아입고 혼자 나갔다. 친구들과 모여서 조문을 하고 밤을 새고 장례식까지 보고 오려면 1박 2일 걸릴 거였다. 남편은 주말에 돌아가셔서 조문도 하고 오랜만에 친구들 볼 수 있어서 잘 됐다고 했다. 마음 편히 조문할 수 있는 주말에 돌아가신 건 정말 다행이었다. 평일에 돌아가셨어도 달려가 조문을 하고 밤을 새고 올 거였다. 남편도 40대가 되자 후유증이 며칠씩 이어졌다. 출퇴근만 해도 두 세 시간은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데, 잠 못 자고 출근하면 졸음운전을 하지나 않을까, 하루 종일 조바심을 했다. 그럴 때마다 솔직히 의구심이 들었다. 세상이 달라지고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졌건만 관혼상제 풍토는 점점 더 과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지인의 인연일 뿐, 생전에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이 아닌가. 죽은 사람 조문하다 산 사람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국경일이 주말과 겹쳐 대체 휴일로 보내는 날이었다. 장례식에 다녀온 남편은 업어가도 모르게 자고 일어나 피로를 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규원이에게 사우나를 가자고 했다. 나는 내친김에 아이들 데리고 가보자고 제안했다. 매일 샤워를 해도 따끈한 물에 목욕하는 건 또 다른 개운함이 있어 한 번씩 갈 만했다. 남편이 워낙 온천이나 사우나를 좋아해서 피로를 푸는 방법이라는 걸 경험한 후로 쌍둥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꽤 자주 온천여행을 다녔다.


밤마다 세 녀석의 목욕을 시키던 나는 지원이랑 단출하게 들어가서 모처럼 지원이를 집중 케어 할 수 있었다. 엄마를 씻어준다고 물바가지로 연신 물을 퍼부어주는 지원이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지원이랑 미지근한 풀에서 놀다가 점점 더 따스한 물로 옮겨가며 체험을 시켰다. 웬만한 말은 다 표현하는 지원이는 사내아이들 속에서 커서 씩씩했다. 아무래도 아빠와 닮은 행동성향인 모양이었다. 지원이랑 실컷 물놀이를 하고 나와서 메시지를 보냈는데 남편이 답이 없어서 밖에 나와서 식혜랑 수정과를 사먹으면서 기다렸다. 시원이와 규원이를 데리고 들어간 남편은 두 시간 동안 목욕을 말끔히 시켜서 데리고 나왔다.


“와, 치사허게 엄마랑 지원이만 맛있는 거 먹고 있었네. 느네 진짜 그러는거 아니여. 우리도 맛있는거 먹자.”

지원이를 보면서 장난스럽게 말하는 남편은 신나게 놀고 나온 악동 같았다. 그런데 어째 피곤이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슬며시 미안해졌다. 두 녀석이나 데리고 들어갔으니 특히 시원이가 넘어지기라도 할까봐 사우나 찜질도 못했을 것 같아서. 이열치열이라는 말처럼 오후 내내 더운 줄 모르고 하루가 지나갔다.


오후에 남편이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수거 한다고 베란다를 청소했다. 세탁실로 사용하는 뒤 베란다가 점점 좁아져서 불편했는데, 몇 달 만에 비울 수 있게 되어서 나도 거들었다. 솔직히 자정이 되어야 들어오는 남편이 오밤중에 끌고 나가기에 시끄럽고, 내가 나서면 아이들까지 총출동을 하기 때문에 미뤘던 거였다.


남편의 지인들을 집들이하면서 모아두었던 술병들이 꺼내놓고 보니 정말 많았다. 내가 정리를 한다고 했지만 술병들은 유리로 되어 있어서 무겁고 부피도 크다는 것이 문제였다. 남편이 들어 옮기기 쉽게 위아래로 정리하고 일주일이면 산더미처럼 모이는 재활용 종이들과, 일반쓰레기까지 엘리베이터에 싣고 내려갔다. 어린이집에서 환경보호를 위한 재활용쓰레기 활용법을 배운 규원이가 자기가 먹은 음료 페트병이나 우유팩을 물로 헹궈서 내놓는데, 기특해서 두고 보지만 잘 안 닦인 팩에서 냄새가 나기도 했다. 눈에 띄는 대로 다시 씻어서 말려놓는데, 그래도 꿉꿉한 냄새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에서 아래층 여자와 마주친 모양이었다. 남편이 인사하고 남자들끼리 한 번 만나고 싶다고 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자가 쌀쌀맞게 무시하더란다. 남편 말이 바퀴벌레라도 본 것처럼 혐오스러워 하더라는 거였다. 여자의 표정이 어땠을지 알만했다. 그나저나 그 여자의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본 적이 없었다. 송이의 얼굴이 그 여자와 조금도 닮지 않은 걸 보면 송이의 아빠는 분명 호남일거였다. 그러나 우리 아파트에서 인물이 두드러진 사람은 보지 못했다. 모두 다 본 건 아니지만, 연예인급 인물은 우리 앞집 803호 여자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위층 언니랑 나눈 적이 있었다.


미용실 원장이라는 앞집 여자는 늘 바빠서 오가며 겨우 두어 번 눈인사만 나눴을 뿐이다. 볼 때마다 흠잡을 데 없이 예뻐서 놀라곤 했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딸이 하나 있는 앞집 부부는 딱 봐도 나이차이가 꽤 많아 보였다. 추어탕 인연으로 아이들 때문에 알게 되고,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게 되자 궁금증이 더 커졌다. 남편은 집에 있고 여자는 미용실을 한다니까 상상력을 부채질 하는 거였다. 하지만 아직 그 정도로 친해지지 않아서 물어보지 못했다. 기회가 되면 꼭 물어보고 싶었다. 사랑하는데 나이가 뭔 상관이랴. 사랑이라는 무지개 같은 감정에 사로잡히면 국경도 나이도 신분도 초월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앞 집 여자에겐 애정결핍을 모르는 이에게서 흘러나오는 윤기 같은 게 느껴졌다. 뭐지? 앞집 남자가 능력자인가? 특별한 러브스토리가 있는 건가?


나도 그런 감정을 모르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애정은 중요하다. 사랑을 포함하는 인간적인 애정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모진 러브스토리를 써가고 있는 커플이 있다. 내 친구 진희의 이야기다, 진희는 내 아픔을 함께 나눈 둘도 없는 나의 절친이다, 우린 서로의 첫사랑 연애부터 실연을 함께 나누었고 내가 비혼주의를 선언하고 솔로시절을 보낼 때도 함께 했다. 그 시절 진희는 다른 이유로 비혼주의를 선언하고 솔로시절의 동병상련을 나누었다. 사정은 다르지만 비혼주의였던 우리는 둘 다 결국엔 결혼을 했다.


진희야 말로 이 시대의 로맨스의 주인공이었다. 진희의 남편 현서씨 또한 대단한 사랑을 견지하고 사랑을 이뤄낸 주인공이었다. 진희와 현서씨는 정말 오래 사귀었다. 하지만 원만하게 이루어질 줄 알았던 결혼은 난제를 만났다. 대대로 갑부였던 현서씨의 아버지는 현서씨가 고등학생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 현서씨의 조부가 현서씨 앞으로 유산을 분배하고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죽고 힘든 시절을 보낸 현서씨네 어머니는 현서씨 앞으로 분배된 꽤 많은 유산을 관리하고 있었다.


현서씨에겐 누이가 둘 있었는데, 그녀들은 유산을 분배받지 못해 유감을 품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도 원만한 분은 아니었다. 어머니와 누이들이 현서씨의 진로에 깊이 간섭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현서씨가 진희를 만나기 전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모두 자신을 위한 간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현서씨가 항상 이견 없이 손 위 누나들의 의견과 어머니의 말을 수용해왔던 거였다. 그러나 진희를 만나 결혼 이야기가 오가면서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예비 시누들과 예비 시어머니가 진희에게 특별한 조건을 제시한 거였다.


진희는 예단으로 롤렉스시계 3개를 요구받았다. 진희에겐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예단 갑질에 부딪힌 진희의 상처는 컸다. 현서씨는 분노했다. 그 일을 겪으면서 현서씨는 딜레마에 빠졌다. 진희에겐 빌었고 어머니와 누이들에겐 비혼 주의를 선언했다.

결혼하지 않고 교제는 계속하면서 의견이 관철될 때까지 기다렸다.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두 사람은 결속했다. 그 세월이 11년이었다. 그 사이에 큰 누나는 결혼했고, 작은 누나는 본인이 했던 것과 비슷한 예단 갑질로 결혼에 실패한 후 수년이 지나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누이들이 결혼하고 현서씨가 어머니와 거리를 두자 진희에게 제발 헤어지라고 사정했다.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오염되었고, 신념은 굳어졌다.


10 년을 기다리는 동안 어렵게 사는 큰 누나에겐 전세자금을 대주었고, 작은 누나가 결혼할 때는 예단 값을 대주었다. 그의 어머니는 뇌졸중질환으로 치료받다가 요양원에 들어갔다. 그 즈음부터 현서씨의 어머니는 두 손을 들었다. 현서씨에게 제발 결혼하라고, 인생 망쳐서 미안하다고 사정했다. 진희를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현서씨는 진희에게 전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소식을 들은 진희가 어머니한테 전화를 하고 담당 요양사의 안내를 듣고 찾아갔다. 현서씨의 어머니가 진희에게 결혼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들의 마음을 돌리는 건 그 뿐임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씁쓸한 허락이었다.


진희는 어머니에게 그러마고 약속하곤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진희는 요양원에 계신 ‘불쌍한 노인네’가 된 어머니를 찾아다니며 수발을 들었다. 1년 후, 그 토록 원하던 손자는 보지 못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진희는 다음 해에 서준이를 낳았다. 이야기는 짧지만, 과정은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는 세월이었다. 그래도 진희는 복이 있었다. 진희를 믿어주는 현서씨가 있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리 있는 친구였다. 오해로 관계를 부서뜨릴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고 잘 견뎠다. 부러운 해피엔딩이었다. 그들 부부에겐 질긴 신뢰가 있다. 건축가인 현서씨는 진희 이야기라면 지금도 다 믿는다. 지금 살고 있는 상가주택도 진희의 소망을 반영해 직접 건축해서 진희 이름으로 등기를 내 준 것이다. 진희도 한결같이 현서씨를 존중한다. 진희를 볼 때마다 존경스러운 마음이 드는 이유다. 내 친구지만 참 대단하다. 진희 부부의 결혼이 내가 목격한 러브스토리 끝판왕이다.





그 다음 주 수요일 오후였다. 하원한 규원이가 울면서 올라왔다. 물어봐도 대답을 못해서 잊고 지나갔는데, 두부를 사려고 슈퍼에 갔다가 1층 여자를 만나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조금 전에 웬 여자가 소리를 질러서 내다봤더니 규원이가 야단을 맞고 있었다는 거였다. 슈퍼 주인도 손님이 있어 자세히는 몰랐지만 얼핏 봤다며 맞장구를 쳐줬다. 규원이가 뛰어가는 바람에 자기 딸한테 모래가 튀었다나. 혹시 704호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 막혔다. 유치원 차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잠깐의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침 목격자가 있어 말을 해줘서 알게 된 거지 그 여자가 규원이에게 무슨 생트집을 잡았대도 알 수 없었을 거였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아이를 학대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래층 여자를 만나보기로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비상계단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승강기를 타고 내려갔다. 분한 마음에 녹여버릴 듯이 초인종을 눌러댔지만 반응이 없었다. 계단을 올라가 대체 비상계단 문이 왜 열리지 않는지 확인했다. 문은 녹색 박스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여서 열리지 않도록 고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문에 뭘 뿌렸는지 독한 냄새가 났다. 소독을 한 걸까?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나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계단을 봉쇄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게 무슨 일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테이프로 고정된 문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서 곧바로 관리실로 가서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규원이에게 사실을 확인했다. 혼내는 거 아니니까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는데도 규원이는 잔뜩 긴장을 하곤 꾸중을 듣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게 더 기가 막혔다.


“얘들아 오늘부터 아래층에서 인터폰이 오든 말든 받지도 말고 상대하지도 마. 엄마는 더 이상 너희들 혼내지 않을 테니까 마음껏 놀아. 어차피 조심할 필요 없어.”


내 목소리가 너무 비장했던지, 혹은 너무 공허했던지, 아이들은 풀 죽은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아래층 여자에게 지금까지는 물렁하게 대했지만, 더 이상 당해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똑같이 유치해진대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한테야 뭐래도 상관없지만 아이들한테 그런 짓을 하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아래층 인터폰은 걸 때만 쓰는 건지, 아래층 여자는 받지 않았다. 없는 것이 아니라 안받는 것이고, 집에 있으면서도 안 열어주는 거라는 걸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참으로 일관성 있는 그 여자만의 일방통행이었다.


관리사무실 직원이 아래층에 찾아가서 여자를 만나보고 비상계단 문을 개방시켰다. 다음 날 아침에 확인해보니 문이 열려 있었다. 그런데 얼마나 뭘 발랐는지 문에는 검은 얼룩이 남아있었고, 문 틀에도 지저분한 본드자국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나는 아파트 공용계단을 막는 것에 대해 법 규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아보았다. 적재물을 방치하거나 통행이 불가하게 만들 경우 최대 300만원의 범칙금이 부과되는 중죄였다.

‘아파트 관리사무소가 아니라 경찰을 불렀어야 하는 거였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곤 아차 싶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인가?’


나도 점점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래층 여자가 협박할 때마다 경찰을 부른다고 했던 것이 소화되지 않고 걸려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똑같은 복수를 무의식중에 생각하다니. 사람을 미워하는 건 내 인성까지 뒤틀려야 지속가능한 일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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