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서 냄새가 나는 걸 알아챈 건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때였다. 별로 예민하지 않은 내 후각이 냄새를 감지하고 나서도 며칠이 지나갔다. 그저 어느 집에서 가을 분위기를 내는 건가?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그런데 없어질 줄 알았던 냄새가 계속 났다. 희미하게 지나갈 때도 있는데 때론 역한 느낌이 있었다. 점점 신경이 쓰였다. 날이 맑아서 거의 온종일 베란다 창문을 열어두는데도 냄새는 없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부턴 속이 메슥거리고 구역질이 났다. 무슨 망상증이라도 생겼나 싶을 정도였다.
이사 오기 직전에 살던 다세대 주택 1층에선 여러 냄새에 둘러싸여 지냈다. 건물 모퉁이 주차장에 내려와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었고, 음식물 쓰레기통이 창문에서 대각선 방향에 자리 잡고 있어서 바람의 방향에 따라 악취가 날아오기도 했다. 이웃집의 간장조림 냄새나 청국장 냄새를 맡고 나도 같은 걸 조리한 적도 있었다. 이 아파트 8층으로 입주한 뒤로는 음식 냄새든 뭐든 모르고 지냈다. 처음 입주했을 때는 친환경 마감재를 썼다곤 해도 새 건물 냄새가 꽤 났다. 하지만, 살림을 배치하고 거주하기 시작하자 금방 적응이 되었다. 그 후론 별 불편을 느끼지 않고 지냈다. 계절에 한두 번 정원수를 소독하는데, 냄새나 기체가 8층까지는 올라오지 않아서 안내 방송이 아니면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무슨 냄새 안 나? 낮엔 좀 심하게 났는데.”
“뭔 냄새가 난다구 그려?
남편이 버럭 성질을 냈다. 밤늦게 퇴근한 남편에게 며칠 동안 같은 질문을 하니까 순간 거칠게 반응한 거였다. 미안했는지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내 얼굴을 훑어보면서 말했다.
“거 아래층 때매 스트레스를 너무 받어서 그런 거 아녀? 신경 끄구 맘대루 살어. 늦기 전에 영양제두 챙겨 먹구.”
남편의 말 속에 걱정이 느껴졌다. 슬며시 겁도 났다. 정신적으로 이상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도 됐다. 아이들은 나한테는 냄새가 난다고 했다가 제 아빠가 물으면 아니라고 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며칠 동안 의식을 하면서 지켜보았다. 밤에는 잊어버렸다가도 낮이 되면 냄새가 나는 것 같고 정신 차리고 맡아보면 아닌 것도 같아서 나는 이상하다 못해 미칠 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이상한 기분을 느낀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항상 그랬던 건 아니지만 나는 정상적인 감각을 지니고 꽤 정상적인 궤도 안에 머무는 중이었다. 내 인생에서 단단히 봉인하여 기억 창고 밑바닥에 넣어둔 몇 년을 제외하면 대체로 정상적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이렇게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니 어쩌면 내가 비정상의 상태로 진입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나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인지하고도 헤어 나오지 못했다. 내가 끔찍한 자학에 빠져 숨을 쉴 수 없을 때 나를 구출한 것은 진희였다. 진희는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내가 스스로 찾아갈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상태라는 것을 알아챈 진희는 말로 강요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진희에게 이끌려 처음으로 정신과병원을 갔을 때 나는 그 곳이 죽으러 가는 곳, 혹은 내 존재가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격리되는 곳인 줄 알았다. 그만큼 물정을 몰랐고 쓸데없는 두려움에 포위되어 있었다.
의사를 만나 정해준 기간 동안 상담을 받았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을 만큼 답답했지만 상담 횟수를 거듭할수록 나와 문제를 분리시킬 수 있었다. 나중엔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영역의 문제들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을 만큼 이성적 분별이 회복되었다.
그때, 마지막까지 나를 괴롭힌 것은 일말의 책임감이었다. 정작 나보다 상담이 절실했던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존재도 되지 못하면서 인도자 역할조차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이 나를 그토록 짓눌렀다. 나는 그를 믿어주지 못했고, 견뎌주지 못했다. 나를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인데, 그처럼 따스하게 나를 챙겨준 사람도 없었건만, 나는 그가 세상을 버리도록 부추기고 미련 없이 떠나도록 기여했을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이 통째로 폐기하고 싶은 저주가 되었다. 그와의 인연은 아름답지 못했다. 순간은 찬란했으나 그 대가로 시달리고 피폐해진 시간은 너무 길었다.
“우리 잘 하고 있는 거야. 잘 될 수밖에 없어. 너나 나나 비교불급의 하드트레이닝을 통과했잖아.”
지금도 가끔 진희와 통화하다가 암시를 주고받는다. 진희의 우정과 무조건적인 지지에 대해선 평생 빚진 마음이 있다. 나도 진희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었는지는 모르겠다. 진희는 강골 기질이라 그저 옆에 붙어있거나 들어주기만 하는 걸로 내 역할을 줄여주었다. 진희가 힘들어하고 있을 때, 어떻게 도와줘야할지 몰라 미안해하는 나를 진희가 오히려 위로했다.
“니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항상 나한텐 진심인거 알고 있어.”
친구의 우정 덕분에 나는 내 처지를 비관하다 죽지 않았다. 인생이 풀리지 않는 것 같은 불행감이 찾아올 때마다 진희는 기댈 울타리가 없는 내게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주었다. 진희가 예단 갑질과 결혼반대에 부딪혀 비혼주의를 선언하고 있을 때여서 나도 상담을 끝내면서 비혼주의를 결심했던 거였다.
기억만 더듬어도 마음이 불편한 이름 최호, 나는 그 이름을 그 시절의 기억과 함께 봉인했다. 그런데도 기억 장치에 영원한 봉인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불가항력으로 치고 올라오는 날에는 피할 도리가 없으니.
호를 만난 건 대학 졸업학기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나는 트랜디한 캐주얼 의류를 판매하는 편집샵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호는 제대 후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그 샵에 들어온 신입이었다. 먼저 일을 시작했으므로 굳이 따지면 내가 선배였지만 파트가 달라 별 의미는 없었다. 그는 스포츠의류 파트였고 나는 여성복 파트였다. 매장이 1,2층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소속 매장이 달라서 판매 중에는 거의 볼 일이 없었다. 하지만 우린 함께 건물 창고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았다. 물건을 정리하거나 본사에서 보낸 의류박스들을 나를 때 마주칠 수밖에 없는 동선이었던 것이다. 아르바이트생이란 어디서든 예외 없이 소모품이라, 무거운 짐을 옮기거나 창고 정리 및 청소 등 허드렛일이 주업무였다. 하여 대량으로 새상품이 들어오거나 반품이 있는 날에는 창고 안 각자의 파트에서 일을 했다.
건물 뒤편에 복도만큼의 틈을 두고 컨테이너를 잇대어 붙여놓고 사용하던 의류보관 창고는 무척 더웠다. 매장 외의 공간엔 에어컨을 트는 법이 없었다. 의류보관실 밖으로 나오면 복도와 후문 출입구에서 곰팡내도 났다. 나는 정기적으로 답도 없는 그 공간을 청소했다. 창고 안은 의류의 색이 바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조명도 침침했다. 옷에서 날리는 먼지는 하루가 멀게 청소기를 돌려도 쥐처럼 뭉쳐다녔다. 정말이지 숨이 막히는 공간이라 작업을 하다보면 속옷까지 젖을 때도 있었다. 창고작업이 많은 날이 드물긴 했지만 여성인 나는 좀 민망해서 여름엔 갈아입을 상의 한 장을 가방에 챙겨넣고 다녔다. 일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전전하는 것이 싫어서 나는 그 곳에서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고, 매장에서 판매를 겸하고 있었다. 기온의 영향력이 큰 한여름과 한겨울만 견디면 괜찮은 일이었다.
얼굴이 말쑥한데다 태도가 공손하고 반듯해 보이는 호는 마주치는 시간이 반복되자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어느 날은 지루해보였고, 어느 날은 매우 즐거워 보였다. 때론 핀이 하나 빠진 것 같은 허술한 모습도 보였다. 나중에 호에게서 처음 들은 이야기로는 그가 군대에서 교통사고로 목뼈를 다쳐서 의가사 제대를 했다는 거였다. 재활치료는 끝났지만 전공에 대한 고민으로 복학을 미뤄놓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거였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이 많았다. 우리는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고 다른 화제를 다루는 일 없이 각자의 일을 했다. 어느 날 그가 지나가면서 말을 걸었다.
“대충 해요. 너무 열심히 하면 다른 사람들이 적응 못해요.”
나는 좀 놀랐다. 나에게 사적으로 건넨 첫 말이 ‘대충 하라’는 말이어서. 그냥 웃어넘겼다. 그리고 하던 일을 계속 했다. 그 후로 그는 가끔 뜬금없는 말을 한 마디씩 던졌다. 말의 수위를 점점 높여가면서. 놀아도 된다고, 쉬어도 된다고, 먹어도 된다고, 빠져도 된다고.
맥락 없이 던지고 가는 호의 참견을 계속 듣다보니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걱정이거나 혹은 애정을 퉁박으로 포장한 듯한. 어느새 우리는 가벼운 농담을 하는 사이로 조금씩 어색함을 털어내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창고 복도 후문으로 나갔다 오곤 했다. 후문에서 낮은 펜스를 넘어가면 편의점이 있었다.
옷 매장은 한 계절 앞서 물건을 받는다. 창고 일이 잔뜩 몰린 어느 주말이었다. 폭염의 날씨에 내 속의 열기를 후후 뿜어내면서 박스를 개봉해 상품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나갔다 돌아온 그가 내가 일하는 공간으로 불쑥 들어오더니 무언가를 건네주고 갔다. 차가운 그것은 빙과였다. 침침한 조명 속에 ‘설레임’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기억 자체를 봉인하고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울컥 올라오는 것이 있다.
따스한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누군가 나를 위해 특별히 배려해준 기억도 없었다. 그랬던 나에게 그날의 설레임은 감동 이상이었다. 가슴이 탁탁 막혀서 숨이 쉬어지지 않는 더위 속에서 꽁꽁 언 설레임의 차가움은 산소였고 구원이었다. 나는 설레임 봉지로 뜨거워진 팔과 목과 다리를 문질렀고, 끓어 넘친 땀으로 젖어버린 겨드랑이에 빙과를 끼고 열기를 식혔다. 살얼음 상태로 녹아가는 설레임의 달콤한 청량감은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너무도 빡빡하게 내 생활을 운영하고 있어서 나는 그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시기에 설레임은 호와 나 사이의 상징적인 매개물이 되었다.
“너 엄청 귀여운 면이 있어. 자신의 매력을 모르는 사람은, 그래서 더 섹시하다니까.”
어느 날 그가 열감이 느껴지는 눈으로 이야기했다. 나는 부끄러웠고 행복했다. 누군가 내게 인간적으로 매력을 느낀다고 고백한 건 처음이었다. 모태솔로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에겐 찌릿한 충격이었다. 그 여름에 창고 안에서 그와 키스를 했다. 목에 난 키스마크를 가리느라 칼라가 있는 셔츠를 입어야 했던, 온몸이 녹아 없어질 만큼 강렬한 경험이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호는 복학을 했다. 졸업학기가 시작되었고, 주말 아르바이트를 나간 매장에서 호를 생각하면서 나는 한여름 밤의 불장난이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리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만큼이나 익숙했던 외로움이 불쑥 낯설고 힘들었다. 갑자기 슬퍼지거나 헛헛함을 느끼기도 했다. 반면에 그가 남긴 짧은 행복감은 내 자신을 가꾸고 사랑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화장을 했고, 허리선이 강조되는 원피스와 스타킹을 샀고, 블라우스를 입었다.
다행히 호는 전화로 자신의 안부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연락이 잦아지면서 쫒기는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어느 날은 저녁 내내 전화를 해서 수십 개의 번호가 찍혀있었다. 나는 식품영양학과 졸업학기라 자격증 시험과 아르바이트와 졸업논문까지 써야 해서 휴대폰을 확인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주말을 이용해 나를 보러 왔다. 내가 시간을 낼 수 없었기에 한 두 시간이 전부였고, 내가 얼마나 바쁜지 확인하고 나면 호는 기분 좋은 얼굴로 틈새 데이트를 했다. 간단하게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실 정도의 여유밖에 없어서 항상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졌다. 그는 돌아서면서 몇 번이나 다짐했다.
“전화 좀 켜놓고, 보면 간단하게 이모티콘이라도 답을 줘.”
나는 계획한 일정대로 자격증을 취득하고 논문을 패스했고, 무사히 취업을 했다. 학교에서 운영하는 연구소를 통해 산학협력 프로젝트로 들어간 회사는 중견기업이었다. 드디어 품질관리사 생활을 시작한 거였다. 호가 달려와 축하해주었다. 내 오랜 친구 진희에게 호를 소개시켜 주었다. 진희는 호가 독특한 성격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무렵 공학도였던 호는 겨우 마음잡고 복학한 학업을 중단했다. 그리곤 취업을 했다. 취향에 맞지도 않는 한심한 학교생활을 계속하는 것 보다 돈을 버는 것이 낫다는 거였다.
호는 동물병원 노무자가 되었다. 그 일이 어릴적부터 가장 원하는 일이었다는 거였다. 앞으로 펫 산업이 확장될 거라며 동물학교와 동물호텔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결혼하면 정원이 있는 집에서 동물들과 아이들을 같이 키우자고 신나서 이야기했다. 호에게 있어서 우리의 결혼은 이미 확정된 계획인 모양이었다. 나는 아주 먼 훗날의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혼에 대해 환상도 확신도 없었고, 따라서 뚜렷한 계획도 없었던 것이다.
동물병원 노무자는 생각보다 일이 많고, 밤샘노동까지 빈번해서 호는 시간 여유가 없었다. 그는 그게 문제라고 항상 불평했고, 여전히 전화를 자주 했다. 그가 밤샘 근무를 하는 날에 나는 휴대폰을 꺼야만 잠들 수 있었다. 낮에는 이모티콘을 활용해 답을 했고 퇴근 후 두어 시간엔 통화를 했다. 나는 호가 나에게 집착하는 것이 싫지 않았지만 가끔은 그가 바빠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호는 자기의 부모님과 한 번 보자고 했다. 아니, 호의 부모님이 나를 한 번 보자고 한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만남은 묘하게 불편하고 어렵고 후회스러운 기억을 남겼다. 눈치를 보는 것이 몸에 밴 나는 가만히 살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말을 아끼는 호의 부모님의 표정 속에서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호의 의가사 제대에 대해 그 분들은 ‘경력에 하자 하나 생겼다’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했다. 또한 동물병원 노무자라는 호의 직업에 대해선 한 번은 경험을 하고 빠져나와야 할 낭비된 시간이라는 의견이었다. 아들보다 아들의 스펙이 중요한 분들이었다. 호의 부모님은 질문 두 개로 나에 대한 판단을 끝냈다.
“부모님은?”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요, ….”
내 대답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호의 어머니가 한숨을 푹 쉬었다. 호의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을까? 나는 당황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이 한숨을 받을 일이 될 거라곤 한 번도 예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교는?”
“MS대 식영과 졸업하고 취업했어요.”
회사 이름이나 다른 걸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지만, 두 분 다 눈을 내리깔고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 질문 이후론 단 한 번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날 차려진 한정식 메뉴 중 내가 먹은 건 샐러드뿐이었다. 식당에서 나와 헤어지는 분위기여서 인사를 드리고 머리를 들었을 땐 이미 돌아서 가고 있었다. 그들의 등 뒤에 대고 인사한 꼴이었다.
호는 부모님과 만난 일을 후회했고 매우 불안해했다. 내가 자기를 떠날까봐 두렵다면서.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헤어질 생각은 없다고 말해주었다. 사실 그랬다. 당장 결혼을 서두를 것도 아니고, 이미 진희가 겪는 일을 보고 있었으므로, 부모의 반대라는 것이 의례 있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호는 자기 부모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단 한번도 인정이나 칭찬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복종을 강요하는 엄한 아버지였고, 다른 친구들처럼 아버지와 목욕탕 한 번도 같이 간 적이 없다고 했다. 또 학교시절 내내 엄마의 치맛바람 때문에 친구다운 친구 하나 만들지 못했다고 했다.
호의 부모는 유능하고 강했다. 아버지는 만학 끝에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무직원이었다. 그들은 지식인으로서의 지조가 있었다. 굽힐 줄 모르는 자긍심이 있었고. 외아들인 호에게 기대가 컸다.
그 기대가 하나씩 어긋나자 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고생을 좀 해보라고 두고 보는 중이라고 했다. 부모님이 없는 나는 호가 부러웠지만 호는 자유로운 내가 부럽다고 했다.
우린 정말로 헤어지지 않았다. 호는 고집이 있었다. 나는 그게 사랑인줄 알았다. 그는 자기에게 계획이 있으니 자기를 믿으라고 했다. 그는 여전히 바빴고, 여전히 내가 떠날까봐 불안해했다. 어떤 날엔 내 휴대폰에 70통 이상 그의 전화번호가 찍혀있는 날도 있었다. 나에 대한 호의 집착이 다그침과 의심으로 치달으면서 매번 나의 결벽과 변함없는 신뢰를 증명해야 하는 것에 조금씩 지쳐가면서도 어떻게 하면 그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을까만 고민했다. 식품화사의 품질관리 업무는 공장의 작업과정 전반에 관여해야 하는 특수성이 있어서 업무량도 많았고, 회사에서 맡는 업무 비중에 따라 관련된 자격증을 계속 획득해야 해서 일정이 녹록치 않았다.
그 즈음 호는 스페인으로 여행이나 가자는 말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학자금 대출금을 갚고 있어서 아직 그런 여유는 없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린 가난한 여행을 계획했다. 최저가의 항공 표를 구했고, 합숙소 형태로 이루어진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호와 나는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해서 스페인 바로셀로나로 날아갔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객과 식사하고 여자 룸와 남자 룸에서 따로 지냈다. 바르셀로나에는 파밀리아성당 말고도 가우디 박물관과 FC바로셀로나 구단 박물관이 있었고 축구팬들이 모여 축제하는 광장이 있었다. 그 곳이 축구를 좋아하는 호의 해외여행 버킷리스트 1호였다는 걸 광장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들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기 위해 호텔에 묵었다. 그 날 밤의 기억은 악몽으로 남았다. 호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가학적 성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 일방적인 성욕 해소방식에 나는 성폭행을 당한 기분이었다. 애정을 표현하는 그의 이빨에 혀를 물렸고 목과 가슴까지 물렸다. 순간적으로 놀라고 두려워 밀쳐냈지만 그는 이미 짐승이 되어 있었다. 치덕거리면서 불가항력의 힘으로 억누르는 사나운 짐승. 만족한 듯 깊은 잠에 빠진 그를 밤새 지켜보았다. 그를 향한 살의와 연민을 동시에 느꼈다. 밤새 암담한 절망과 공포의 혼란스러운 감정과 싸워야했다. 감정이 흑빛으로 굳어 이후의 귀국풍경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결코 여행 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여행의 후유증으로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다.
결론은 분명했다.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면 평생 그에게서 헤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밀착해서 경험하고 나서야 그의 광적인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그의 불안증이 어느 정도로 위험한 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를 안정시키거나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나는 확실하게 깨달았고, 더 이상 어떤 것도 할 마음이 남아있지 않았다. 불행했던 엄마의 생애, 그 운명의 검은 그림자가 나에게까지 이미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아 몸서리 쳤다. 그 날 이후 여행에서 돌아온 후까지 내내 그는 나에게 사과하고 빌었다. 나는 초연을 가장하며 평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내 연기력이 형편없었는지 그는 속지 않았다. 그의 불안은 더 깊어졌다.
진희는 당장 헤어지라고 했다. 문제만 도려내면 깨끗하게 끝나는 거라면서. 짐이 될 관계를 책임질 이유가 없다고 설득했다. 나는 호와 헤어지거나 죽거나 혹은 둘 다 하고 싶었다. 답은 없었다. 고심 끝에 그에게 통보했다. 그는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의 협박을 받고 있는 동안 정말 죽고 싶었다. 극도의 불안 속에 있는 내가 불안하다며 진희가 집에서 머물지 못하게 했다. 나는 진희의 집으로 옮겨갔고, 호의 전화를 차단했다.
진희의 집에서 돌아온 날 밤에 나는 수면제를 먹었다. 하지만 연락을 받지 않는다고 택시를 타고 달려온 진희 때문에 죽지 못했다. 더 확실한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시도하기 전에 문제가 마침표를 찍었다. 호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은 거였다. 그의 부모는 폭음으로 인한 심정지라고 했지만 나는 호가 자살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누구도 죄를 묻지 않았지만, 그가 죽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나 자신은 알고 있었다. 모든 시선이 두려웠다. 그 시선을 다 피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내 안의 검열관과 싸우는 것, 그 것이 가장 잔혹한 전쟁이었다.
그 후 회사를 두 번 옮겼다. 갈수록 신념은 강화되었다. 불통의 숙제를 안고 온 이번 생애서 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였다. 그런 나를 사랑했던 호가 사랑할 줄 모르는 나보단 나은 존재였다. 그에겐 기대를 거는 부모라도 있었다. 그런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나는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넌센스였다. 그래서 실리카겔을 먹었다. 나중에 어떤 후회를 하게 될지 당시엔 생각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목숨은 생각보다 질겼다. 그 때 진희가 옆에 없었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을 거였다. 진희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대기조처럼 달려왔고, 함께 아파했고, 분노했으며 방법을 찾았다. 호의 정신병적 요소를 감지한 것도 진희였고, 그 사람에게서 빠져나오라는 결론도 진희가 내렸다. 진희는 나에게 상담을 권했다. 나는 듣지 않았다.진희의 손에 이끌려 정신과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았다.
회복은 아주 오래 걸렸다. 새로운 관계를 만들 의욕이 없어서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해가 갈수록 혼자 사는 방식을 더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짝이 있어도 결혼할 수 없는 진희와 짠 소금에 소주를 마셨다. 알코올이 체질에 맞지 않아서 소주를 마시면 1박 2일 동안 죽도록 고생하는데, 그 때가 오히려 편했다. 내 안의 검열관이 사라지는 거였다. 앞으로 그 어떤 애틋한 소망이나 계획도 없을 거라 확신했다. 명절이 되면 조카들의 선물을 사보내곤 했지만, 올케 언니의 냉대가 먼저 기억나서 오빠 집에도 가지 않았다.
몇 년 동안 감각 없이 일만 했다. 죽고 싶을 때마다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무언가 의미를 찾으려고. 말라비틀어진 정서로 일만 했다. 일이 밀릴 때는 재고식품들의 위생검사를 하고 식중독균 검출 실험을 하느라 날밤을 새기도 했다. 나는 당시 일 중독자였고, 일이 없으면 시간을 견딜 재간이 없을 정도로 일이 내 전부였다.
식욕이 없고 수면이 부족하자 시력이 저하되었다. 안압이 높아서 치료를 했다. 눈을 많이 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지 그 업무들을 위해 나는 살아있어야 했다. 다행히 중소기업의 품질관리업무는 회사의 전체 업무에 골고루 연결되어 있었고, 그만큼 내 영향력도 회사에서 공고해져갔다. 나는 밤새워 나를 혹사시킬 만큼의 업무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주말까지 출근할 순 없었다. 그 때 유일하게 위로를 얻었던 것이 책읽기였다.
처음엔 여행에세이를 읽었다. 이곳이 아닌 그곳을 체험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상처를 건드리는 책들을 피했다. 그래서 역으로 죽음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 호스피스 병동 이야기와 죽어가는 사람과의 대화를 기록한 책, 유고들을 읽는 것은 내 상처를 객관화할 수 있는 시각을 주었다. 그러다 죽음을 다룬 소설도 읽게 되었다. 제목이 『49일의 레시피』였다. 일본작가의 책이었는데 지금도 그 때도 작가 이름엔 관심이 없어서 기억에 없다. 매우 슬픈 죽음으로 시작되어 끝날 때는 한 사람의 생애 동안 일어난 일들의 의미와 가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묵직한 서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닌 연약한 한 여성의 생애가 남긴 영향력은 아름답고 위대했다. 생의 의미를 끌어올리는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진심으로 행한 사랑의 실천들이 이루어낸 뭉클한 결과일 뿐이었다. 또렷한 질문이 마음에 박혔다.
‘내 인생도, 쓸모를 가질 수 있을까?’
철사를 구부려 만든 물음표에 내 존재가 매달려 있는 형상이 어둠 속에 떠올랐다. 그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질문을 만나기 위해 죽음에 관한 많은 책들을 읽은 것 같았다.
*연작소설 <웰니스아파트 804호> 10회 차를 구독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브런치부그로 발행한 1부 <웰니스아파트 704호> 편을 보시면 연작소설의 서사와 갈등을 이해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