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된 기억을 기어코 풀어보게 만든 냄새의 근원지를 확인한 건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관찰력 있는 위층 언니 덕분이었다. 안 그랬다면 내가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잘못된 진단 속에서 불안한 시간을 보냈을 거였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그날 베란다 외벽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정체모를 액체의 분무 자국을 확인한 나는 극도의 혐오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랫집 여자의 소행을 잡아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눈에 불을 켜고 방범용 기기를 검색했다. 과몰입으로 구역질을 해가며 장바구니에 넣어놓은 초소형 감시 장비들이 열 종류가 넘었다. 그걸 비교하여 고르는 동안 며칠이 지나갔다. 쓸 만해 보이는 건 수십만 원을 호가했고, 내세운 기능은 비슷한데 값이 십분의 일인 것도 있었다. 뚜렷한 기준도 없이 그저 어떤 기능인지,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인지, 촬영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부품과 리더기 사용은 어떻게 해야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지 궁금증을 풀기 바빴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쫓기듯 분석하다보니 조금씩 실감이 생겼다. 세상은 내가 육아에 매진하는 사이에 참 많이도 변해있었다. 무언가가 발전한다는 말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수요가 있다는 것인데, 대체 이런 감시용 장비들을 누가 구입해 사용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충전과 연결단자와 촬영물 확인 방법을 열심히 익히면서도 과연 그걸 사놓고 내가 제대로 작동시킬 수나 있을 것인지 의문과 걱정 사이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래윗집 사이에 이런 방범 카메라까지 설치하며 갈등을 심화시켜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 그러는 사이에 그냥 아래층 여자한테 뭘 뿌려대는 건지 물어볼까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도 했다.
몹시 다행인 건 벽처럼 소통이 안 되는 아래층 여자를 생각하면 확실한 증거물이 필요하니 결국 감시 장비가 있어야 한다는 초심이 저절로 회복된다는 거였다. 과대광고로 보일 만큼 많은 기능을 내세우고 있지만, 화소와 촬영시간이 관건일 것 같았다. 우선 방범 기능이 강조된 걸로 결정했다. 십만 원이 넘는 거금을 결제하기 전까지 마음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그 돈이면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떠올랐다. 이런 짓을 하게 만든 아래층 여자에게 저주를 퍼붓고는 최종적으로 결제 창에 클릭을 했다.
감시 장비를 기다리면서 나는 아침저녁으로 안방 쪽 베란다 외벽을 확인했다. 혹시 아래층 여자의 범행을 목격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베란다를 둘러볼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분무 자국은 있는 날도 있고, 없는 날도 있었다. 냄새도 심할 때도 있었고 거의 없을 때도 있었다. 날은 점점 선득해지는데, 이러다 아래층 여자가 그 짓을 그만두면 영원히 오리무중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걱정까지 되었다. 냄새도 더 악독한 냄새였던 것 같은데 점점 더 옅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알아챘다는 사실을 혹시 들킨 것이 아닐까? 그래서 여자가 분무기의 내용물을 바꾼 건 아닐까? 이 것이 범죄라면 먼저 신고해서 증거물 확보부터 해야 했던 건 아닐까? 생각이 무성해졌다.
3일째 되는 날 배송 안내 문자를 받고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내다보니 커다란 박스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들여놓고 배송정보를 확인하는데 남편이 전화를 했다. 택배 온 것 확인하고 들여놓으라고. 쌍둥이에게 태워줄 2in1 킥보드라고 했다. 추석 연휴에 여행가서 태워줄 거라고 했다.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말도 없이 일을 저지르다니! 이제 대화도 상의도 하지 않는 부부가 된 건가? 캐럿 마켓에 올라오는 걸 눈팅만 하고 있었는데, 주문했으면 어쩔 뻔!’
순간 남편 몰래 주문한 감시 장비가 생각났다. 피장파장이었다. 마음이 찜찜했다. 일단 내 이름으로 배송한 것이 아니라 남편이 풀어보도록 뒤 베란다로 옮겨놓았다.
밤 9시가 되어서야 내가 주문한 장비가 도착했다. 혹시 남편 퇴근과 겹칠까봐 노심초사 했다. 나는 아이들을 재워놓고 박스를 풀어 카메라를 작동해보았다. 상품 광고주가 올려놓은 비디오영상을 몇 번 시뮬레이션 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작동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퇴근할 남편 때문에 설치는 하지 못했다. 장비를 눈에 띄지 않도록 주방 하부 장에 넣어두었다.
곧 후줄근한 얼굴로 퇴근한 남편은 킥보드 박스를 확인만 하고 뜯지 않았다. 규원이만 데리고 인라인과 보드를 태워주러 다녔는데, 쌍둥이보다 작은 아이들도 킥보드 타는 걸 봤다며 변명인지 설명인지 모를 말만 했다. 나중에 아이들과 박스를 풀고 다 함께 보드를 타러가기로 했다. 어차피 씻고 잠만 자기에도 남편의 평일 밤 시간은 바듯했다.
잠들기 전까지 이야기 해버릴까? 그게 상황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까? 고민했다. 투잡을 감당하느라 고단한 남편에게 괜히 스트레스를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남편의 성격상 대면해서 따지는 스타일인데 아래층 여자의 만만찮은 성격과 부딪치면 결과도 없이 일만 그르칠 것이 뻔했다. 다시 생각해도 그건 아니라는 결론만 확인했다. 거실에서 잠든 남편이 낮은 소리로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피곤한데 눈꺼풀이 뻑뻑하고 눈물이 나면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감시 장비가 손 안에 들어오자 현재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들이 새로운 각도로 조명이 되었다. 층간소음으로 고발을 하고도 성에 차지 않은 아래층 여자가 우리 집을 향해 무언가를 뿌려대고 있었다. 그것은 성인인 내가 맡아도 머리가 아플 만큼 독한 냄새를 풍기는 물질이었다. 이것 때문에 우리 아이들의 호흡기에 질환이 생긴다면 그것은 범죄였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심각한 질환을 입고 사망에 이른 사람이 수천 명이었던 걸 보면 화학적인 분무 물질의 위험성은 말할 필요가 없는 거였다. 나와 아이들을 독살하려는 명백한 테러행위에 다름 아닌 거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보고 응징하는 것이 양육자인 나의 의무였다.
다음 날 쌍둥이가 낮잠에 들었을 때 카메라 장비를 꺼내서 에어컨 실외기에 설치했다. 냄새의 진원지를 파악한지 일주일 만이었다. 카메라의 방향을 분무한 자국이 남아있는 외벽을 향해 조절해놓았다. 그 쪽에 가서 의자를 놓고 올라가 휴대폰 카메라를 최대한 분무자국 가까이 내려서 실외기 쪽을 찍었다. 육안으로 봐서는 카메라가 회색 실외기와 같은 계열의 색상이라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아래층 여자는 훨씬 더 아래쪽에서 볼 테니 그 방향에선 어떨지 알 수 없었다. 밖으로 내밀었던 팔을 당기다 팔꿈치를 창틀에 부딪쳤다. 손끝에 힘이 풀리면서 순간적으로 휴대폰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놀라서 나도 모르게 괴성을 지르며 휴대폰 모서리를 잡아 베란다 안쪽으로 당겼다. 손톱에 휴대폰 케이스가 걸려 가까스로 베란다 안쪽으로 떨어졌다. 마땅히 잡을 것을 찾지 못해 의자 위에서 균형을 잃고 버둥거리던 나는 가까스로 창틀을 잡고 의자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휴대폰 잡다가 8층 창밖으로 떨어질 뻔했다는 자각이 그제야 들었다. 머리만 나가면 다 나간 거라 하지 않던가. 머리뿐 아니라 상반신이 반은 나가있는 상황이었으니 한 끗 차이로 죽음을 면한 거였다. 머리카락이 곤두선다는 말이 이런거구나 싶었다. 내가 지른 소리에 아이들이 깨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집 안에서 기척이 들렸다.
‘설치했음 된 거지 뭘 확인까지 한다고 탐정 코스프레를 하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냐?’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고 들어왔다. 예상과 달리 아이들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쩌면 그 기척은 아래층에서 난건지도 몰랐다. 아래층 여자도 내 소리를 들었을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지금 내가 무사하다는 것만으로 다행스럽게 여길 일이었다. 잠시 아래층의 동향을 살폈다. 더 이상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보도를 훑고 지나가는 차량의 바퀴소리만 들려왔다. 휴대폰을 들고 작은 방으로 건너가 위층 언니한테 전화했다. 드디어 감시 장비를 실외기에 성공적으로 설치했다고 보고하듯 털어놨다.
“근데 규원엄마, 목소리가 왜 그렇게 불안정해? 조금 전에 뭔 소리가 나서 내다봤었는데, 아무 일 없는 거지?"
언니가 걱정스레 물었다. 안전을 확인하려는 언니 목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아하, 언니였구나. 실외기에 설치된 거 확인하려고 분무기 자국 있는 창문 밖으로 휴대폰 카메라 내놓고 사진 찍었거든요. 그런데 팔꿈치가 창틀에 부딪쳐서 휴대폰 떨어뜨릴 뻔했어요. 간신히 잡아서 베란다로 당겨 넣긴 했는데, 의자 위에서 중심을 잃는 바람에 허우적거리면서 소리를 지른 거죠. 아직도 진정이 안돼요.”
“하악, 큰일 날 뻔 했네. 규원엄마 꼼짝 말고 있어봐.”
놀란 언니가 전화를 끊었다. 혹시 내려오려나 싶어 현관문을 열었더니 언니가 계단으로 내려와서 현관문 안으로 들어오면서 나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얼른 먹어. 청심환이야. 놀랬을 때 방치하면 병 되니까 먹고 진정해.”
언니가 등을 떠밀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서 건네주었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받아서 먹었다. 입안이 아리고 쐐한 한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가 괜히 냄새 진원지를 찾아내서는, 규원엄마를 위험에 빠뜨렸네. 생각이 짧았다 내가. 말을 하고 같이 할 것이지, 왜 혼자 하느라고 위험을 무릅쓰고 그랬어? 아님 규원아빠랑 상의를 하던지. 아홉시 뉴스에 나올 뻔 했잖아! 규원엄마 때문에 십년감수 했다. 아유, 나도 올라가서 한 알 먹어야겠어.”
언니의 눈이 붉어졌다. 그 와중에도 아홉시 뉴스에 나올 뻔했다는 언니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아이들 잘 때 잠깐이라도 누워서 진정하라고 당부하고 언니가 올라갔다.
언니를 배웅하고 현관문을 닫자 몸이 무거워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소파로 다가가서 드러누웠다. 청심환의 반응 때문인지 몸이 축 처지면서 팔다리에 힘이 빠졌다. 눈을 감고 잠깐 공중부양상태를 느끼며 턱과 미간의 긴장까지 풀어버렸다. 아래층 여자의 반응에 뭐 그리 신경 쓰느라 이 난리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을 밝혀내 아래층 여자를 입막음하고, 더 이상 엮이지 않길 바랐다. 원하는 건 그 뿐이었다.
다음날은 목요일이라 남편 모르게 영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영상을 빠르게 돌려보고 리셋해서 다시 설치했다. 해상도가 선명한 HD카드로 촬영할 경우 최대 녹화가능시간이 24시간이었다. 연속 녹화시간이 너무 짧아서 즉시 후회했지만 다시 구입할 수도 없었다. 2일간 체크할 때까지 아무 일 없었다. 기운이 쭉쭉 빠졌다.
아래층 여자는 여행 중인지 조용했다. 주말 지나고 드디어 월요일. 다시 체크했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혼자서 마음이 졸였다, 이번 주말부터 명절기간이라 어차피 체크할 여유가 없을 것 같아서 옵션으로 들어있는 마이크로 SD카드를 넣어 다시 설치했다. 해상도는 봐야 알 수 있겠지만 30일 연속촬영이 가능하다고 해서 일단 한두 주일 동안 지켜보기로 했다. 그걸로 확인이 가능할지 장담할 수 없지만,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추석연휴에 남편이 굵직한 계획을 세웠다. 3박 4일간 글램핑장 숙박을 예약한 것이다. 드디어 벼르던 캠핑을 가게 되었다. 쌍둥이를 데리고 숙박캠핑은 처음이라 기대와 걱정이 번갈아 밀려왔다. 숙박에 꼭 필요한 도구는 다 있다고 했지만 남편도 들떠서 준비물을 챙겼고 나도 챙겨갈 것들과 구입할 식재료를 생각날 때마다 기록했다. 혹시라도 밤 기온이 낮아질까 싶어서 전기요와 야외용 매트도 찾아놓고 아침저녁으론 쌀쌀할 것 같아 초가을 실내복과 바람막이도 준비했다.
글램핑장 주변에 이용할 수 있는 시설들을 검색해 보았더니 공방들이 모여있는 공예의 언덕이 있었다. 열 개의 공방을 하나하나 분석했다. 아이들이 체험할 공예프로그램들이 있었다. 내가 해보고 싶은 가죽공예는 접어놓고, 아이들에게 가능한 도자기 물레 돌리기와 소품에 그림장식 새겨 넣고 곤충 굿즈 만들기, 한지와 대나무로 연 만들기를 예약했다. 오랜만에 아이들에게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아서 마음이 들떴다.
사실 명절이란 달갑지 않은 날이었다. 며칠의 휴가를 가족이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명절이라는 제목을 달고 흘러가는 그 며칠간 나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결핍감을 느끼곤 했다. 나도 남편도 찾아갈 고향이나 부모님이 없고, 방문해서 함께 보낼 친척이 없다보니 아이들도 명절이라는 특별한 분위기를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엄마는 아버지와 합장하는 걸 원치 않았고, 유골이 남겨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짐이 되지 않게 단 번에 처리하라고 당부했기 때문에 막상 장례식에서 오빠와 나는 곤혹스러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화장장에서 유택동산을 안내받고 다른 망자의 유골과 합장하여 지자체에서 땅에 묻어주는 절차에 대해 알게 되었다. 오빠도 나도 엄마의 유언을 거스를 다른 길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이렇게 공허감을 안고 살아가게 될 줄은 몰랐지만, 다시 그 상황이 온다고 해도 곤혹스러울 뿐 다른 길은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남편 또한 아버님의 유언으로 부모님을 합장하여 해양장으로 보내드렸기 때문에 마음으로만 기릴 뿐이었다. 어쩌면 나와 남편이 비슷한 공허감을 안고 있어서 공명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각자의 슬픔이나 공허를 건드리지 않고 적절한 이벤트를 만들어 아무렇지 않은 척 보내고 있는 거였다.
ㄱ시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야영장 안에 있는 캠핑장에 도착했을 때, 첫 인상은 실망 그 자체였다. 강이 가깝다고 했는데, 산골짝에 자리 잡고 있었고, 연못이 있다고 했는데, 올라오면서 차창 밖으로 본 연못은 개구리나 드나들 만큼 작았기 때문이었다. 숙소를 배정받고 입실했는데, 텐트만 상상했던 내 눈엔 정말 넓었다. 침대가 두 개 있는 타입이라 피곤하치 않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변을 돌아보니 쑥부쟁이와 국화꽃들이 야영장 주변에 가득 피어있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위쪽엔 오토캠핑장이 있어서 캠핑카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며칠이지만 함께 살 이웃이 많아서 든든한 기분이었다.
우리는 짐을 대강 풀어놓고 아이들과 함께 주변 탐색에 나섰다. 야산 봉우리 전체를 조각공원으로 가꿔놓아서 사진에 담을 것이 너무 많았다. 야영만 기대하고 왔다가 야외 미술관과 공유놀이터를 덤으로 누리는 격이었다. 특히나 도자기 타일로 꾸며놓은 벤치들과 분수대가 마음에 들었다. 아이들도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남편은 규원이와 함께 시원이를 따라다니고, 나는 지원이를 따라다녔다.
잠시 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잔뜩 기대하면서 곤충 굿즈 만들기를 체험하러 갔다. 의외로 시원이가 관심이 없었다. 지원이만 그림을 그리면서 크레파스의 색감에 몰입해 잠깐 주의를 기울였다. 낯선 곳인데다 밖에 놀 거리가 너무 많아서 그런 것 같았다. 시원이는 공방 안에서 잠시도 기다리지 않았다. 불편한 공간에 갇힌 것처럼 나가려고만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어두워졌다. 앞으로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는데, 과연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그나마 규원이가 충실하게 참여해서 내 마음을 보상해주었다. 규원이는 장수하늘소 굿즈를 완성했다. 지원이가 그린 걸로 내가 무당벌레 굿즈를 완성했다. 돌아오면서 남편이 말했다.
“집 나왔으니 자연 속에서 본성대루 뛰어놀게 해 주자구. 그러려고 나온 거잖어.”
남편의 말에 마음으론 동의했으나 예약하면서 참가비를 완불했기 때문에 아직도 두 개의 프로그램이 남아있었다.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못해준 것 같아 욕심을 부렸던 마음을 반성했다. 서두른다고 한 번에 채워줄 수 있는 것도 아니건만, 결핍의 테두리만이라도 가리려고 미련을 떨고 있는 내 모습을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확인했더니 예약 프로그램을 취소할 수 없다고 적혀있었다. 규모가 작은 공방들이니 당일 취소하면 예약대기자도 없을 거였다. 아깝지만 안하면 할 수 없다고 포기했다. 남편이 아이들을 위해 요리한 연어구이와 내가 맵지 않게 재워간 갈비찜으로 풍성한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식사 후에 아이들과 보드 박스를 개봉했다.
시원이는 연두색 킥보드를 고르고 지원이는 은회색을 골랐다. 혹시 몰라 분홍색을 탐내다가 포기했는데, 좀 아쉬웠다. 규원이도 트라이스케이트 롤러블레이드를 받고 신이 났다. 킥보드를 실컷 탄 규원이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싶어 한다고 전하자 남편이 서둘러 알아보고 바퀴가 세 개로 안전하게 구성된 것을 구입한 거였다. 이래저래 명절 선물비가 많이 나갔지만 아이들의 활동을 위한 도구를 마련한 거여서 남편과 손바닥을 마주치며 자축했다.
내일 신청한 프로그램을 마치고 타러가자고 약속한 아이들은 각자 자기 물건을 머리맡에 두고 쓰다듬다 잠들었다. 우리 부부는 설거지를 마치고 오랜만에 하늘을 보면서 와인을 한 잔 했다. 별을 기대했지만 오후에 구름이 끼더니 하늘이 흐렸다. 구름 위로 보름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 사이에서 달빛이 선명해졌다가 다시 흐려졌다. 남편도 나도 말없이 간혹 반짝이는 인공위성인지 비행기인지를 보았다. 둘 다 피곤해서 머리만 대면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설레고 아쉬워서 차가워지는 밤공기를 느끼며 어깨를 붙이고 앉아있었다. 순간의 소중함을 마음에 각인하면서 깨달았다. 숲의 적요함은 풀벌레소리로 인해 극대화 된다는 걸.
머리카락이 당겨지는 느낌에 의식을 차렸다. 머리를 밟고 침대를 내려가는 시원이의 기척이었다. 피곤해서 아이들의 채근이 짜증으로 바뀔 때까지 버텼다. 남편이 먼저 일어나서 아이들에게 옷을 입혀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멀어지는 걸 잠결에 들으며 이불을 끌어다 덮고 삼십분을 달게 자고 일어났다. 숙소 근처에서 노는 아이들 소리를 들으면서 삶은 계란에 오트밀 죽과 과일을 준비했다. 엄마엄마, 부르는 소리에 내다보니 시원이가 비눗방울 건의 트리거를 당기고 있었다. 방울방울 끝도 없이 솟아나 날아다니다 흩어지는 것이 재밌는 모양이었다.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를 내서 나도 손뼉을 쳐주고 웃었다.
“이제 들어와서 손 씻고 아침먹자!”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아이들은 노는데 팔려서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보이지 않아서 규원이를 불렀다. 반응이 없었다. 쌍둥이만 놓고 어딜 갔나 싶어 나가던 나는 그대로 미끄러져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텐트 입구에 머리가 걸려서 뇌진탕은 피한 것 같은데, 뭔일인가 잠시 정신이 없었다. 어딘가 크게 다친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요즘 들어 왜 이렇게 내가 중심을 잘 잃어버리는 거지? 얼마 전에 베란다에서 떨어질 뻔했던 기억이 겹쳤다. 요란한 소리에 남편이 뛰어왔다. 규원이랑 아이들도 들어왔다. 남편의 얼굴이 납빛으로 변해있었다.
“왜 그러는 게여? 일어날 수 있겄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천천히 허리를 비틀면서 몸을 굽혔다. 일어나려는데 허리가 뻐근하면서 날카롭게 찌르는 느낌에 아, 소리를 질렀다. 남편이 부축해서 상체를 일으켜 겨우 일어나 앉았다. 앉은 채 다리와 팔과 몸통을 흔들어보았다. 왼쪽 허리만 뻐근하고 다른 곳은 괜찮았다. 내 발에 신겨진 슬리퍼 바닥이 발등 쪽을 향해 있었다. 그 와중에 웃음이 나왔다. 남편이 웃음을 참으면서 신발을 벗겨주었다.
“신발에 비눗방울이 떨어져 있었네벼. 이녀석덜 즈그 엄마 잡을 뻔 혔네그려.”
그러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신발을 받아서 만져보니 비눗물이 아직도 흥건했다. 비눗방울 건을 슬리퍼에 조준해서 쏜 것이 틀림없었다. 내 발에도 물기가 남아 있는 상태였는데, 확인도 않하고 서두르다 일을 당한 거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곤,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알아들었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그래도 단단히 일러두긴 해야 했으니까.
아침을 먹고 가져간 전기매트에 누워 찜질을 했다. 그리곤 하루 종일 뻐근한 허리를 붙잡고 다녔다. 프로그램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이 웃으면서 가보자고 해서 다함께 공예의 언덕으로 또 올라갔다. 제 아빠가 참견을 해서 그런 건지 영상을 보여줘서 그랬는지 웬일로 연 만들기에 세 녀석이 집중했다. 아빠가 방패를 연결해 주었더니 규원이가 용 모양으로 만든 연을 들고 냅다 뛰어나가 언덕 아래로 띄웠다. 떠오르던 연은 방패를 다룰 줄 몰라서 연신 곤두박질 쳤다. 하나씩 방패를 연결해서 완성한 연을 들고 다함께 동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목표가 있으니 지원이랑 시원이도 뒤처지지 않고 올라갔다.
나는 연을 날릴 줄 모르면서 프로그램만 신청했는데, 남편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연날리기를 해본 경험이 있다고 했다. 연은 구조가 좋지 않은지, 꼬리의 길이가 균형이 안 맞는지 잘 날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하지만 조금 바람을 타자 지원이의 연이 먼저 떠올랐다. 규원이 것도 띄워올리는데 성공했다. 시원이의 연도 떠올랐는데 방패를 풀자 바람을 타고 날아가서 규원이 연과 얽혀버렸다. 그 바람에 규원이가 짜증을 폭발시켜 잠깐 연을 푸느라 남편이 애를 먹었다. 결국 연은 풀리지 않은 채로 고꾸라졌다. 아이들과 가을바람이 불면 더 멋지게 만들어서 다시 날려보자고 약속하고 내려왔다.
동산에서 하산하면서 시원이가 두 번이나 넘어져서 남편이 안고 내려왔다. 지원이도 칭얼거려서 내가 업고 숙소로 갔다. 한나절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아이들에게 끌려 다녀서 그런지 피로가 몰려왔다. 남편이 나가서 점심을 사가지고 왔다. 근처에 맛집으로 후기가 좋은 돈가스집이 있어서 주문했는데, 야영장 입구까지만 배달을 해주는 모양이었다. 아이들과 돈가스와 우동, 메밀국수를 나눠먹고 쌍둥이 옆에 누워 낮잠을 잤다.
일어났을 땐 남편이 규원이를 데리고 나가서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돌아오면서 캠핑장 매점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규원이 입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아주는 남편에게 슬며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달린 남편이 안쓰러워서였다. 엄마도 그렇지만, 아빠도 극한직업이었다. 한동안 잊었던 감정이 솟았다. 남편은 사실 캠핑을 나오면 쉬지않고 움직였다. 좋아서 하는 일이라 오히려 마음도 편안해지고 제대로 노는 기분이라고 하는데, 그 말을 믿기엔 내가 너무 철이 든 것인지 자꾸만 안색을 살피게 된다.
약속대로 쌍둥이와 함께 킥보드를 타러 나갔다. 야영장 입구에 드넓은 운동장이 있었다. 주말에 한두 시간 규원이를 데리고 킥보드를 타러 다닌 남편은 신이 나 있었다. 차에서 규원이가 타던 킥보드를 꺼내주자 규원이가 숙달된 조교역할을 맡았다. 먼저 안전모와 무릎보호대, 팔꿈치 보호대를 하고 준비체조를 했다. 남편이 평소에 가르쳐준 대로 하는 거였다. 규원이가 천천히 본을 보여주었다. 쌍둥이는 보조의자를 설치해서 일단 앉아서 발을 굴렀다.
나는 걱정이 많아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면서 따라다니다 시원이가 기우뚱 거릴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남편이 나에게 숙소로 돌아가 있으라고 했지만 아이들이 걱정되어 돌아설 수가 없었다. 지원이와 시원이는 생각보다 빨리 킥보드에 적응했다. 보호자가 잡아줄 안전대는 운동장이 넓어서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다. 보드를 구르며 운동장을 삐뚤빼뚤 달리는 지원이와 시원이가 너무 신기했다. 소리를 지르며 달리는 아이들 머리 위로 햇살이 쨍한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세 번째 날 위층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명절 지내고 돌아와서 안부를 묻는 거였다. 남편이 전화를 뺏더니 놀러오라고 초대를 했다. 상의해보겠다며 장소 좀 공유해달라고 했다. 언니에게 야영장 주소를 보내주곤 호호의 보드도 챙겨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언니가 온다면 이보다 좋을 순 없을 거였다. 그러나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래서 남편에게 말했다.
“명절 지내고 와서 피곤하고 귀찮을 텐데, 여기까지 오겠어?”
내 기우를 보란 듯이 뒤엎고 두 시간 후에 언니네 가족이 도착했다. 고기와 새우를 사들고 호호랑 형부랑 총출동을 한 거였다, 규원이가 제일 좋아했다. 마침 공예의 언덕에 갈 시간이라 호호가 쌍둥이 대신 도자기 물레 돌리기에 참여했다. 언니가 너무 좋아해서 예약한 보람을 느꼈다. 세 아이들이 도자기를 만들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쌍둥이를 데리고 조각공원을 산책했다. 지원이 시원이도 언니를 만나서 신이 났다. 형부가 시원이를 그렇게 안아보고 싶어서 쫓아가는데 시원이가 한사코 도망쳤다. 오히려 지원이가 형부에게 안겼다. 형부는 공주님을 안아 영광이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역시 지원이는 사랑을 받을 줄 아는 아이였다.
언니는 글램핑장 경험은 생전 처음이라고 했다. 이런 시도를 하는 우리 가족이 너무 신기하고 부럽다고 했다. 세상에 언니의 부러움을 사다니! 내가 더 놀랐다. 내가 캠핑족과 결혼해서 일반인으로 진화시켰다고 했더니 언니가 왜 그랬냐고, 이렇게 자연 속에서 멋있게 살도록 해줘야한다고 남편을 편들어 주었다. 이렇게 멋진 이웃을 두어 자랑스럽다면서. 남편의 어깨가 한층 올라간 걸 보니 자꾸 웃음이 났다.
도자기 만들기를 끝내고 나온 아이들은 새로운 체험을 한 것에 무척이나 고무되어 있었다. 특히 물레를 돌려본 것이 재밌었던 모양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아이들은 킥보드를 타러 나갔다. 시원이가 한사코 따라 나서서 남편과 형부가 같이 갔다. 모여 놀면서 가을 하늘이 쨍쨍 울리도록 소리를 질러대는 아이들 소리를 들으니 잘 왔다 싶었다. 흠이라면 호민이를 따라가던 시원이가 요령부득으로 킥보드와 함께 연못에 빠져서 돌아온 거였다. 시원이를 꺼내주느라 남편과 형부도 발이 빠져서 왔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는데,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놀랐는지 시원이가 내 품으로 파고들면서 울었다. 형부랑 남편이 잘못한 사람처럼 서있었다. 바짓단을 걷어부친 채 남편의 슬리퍼를 신은 형부는 이제 진짜 캠핑을 온 사람처럼 보였다. 시원이를 씻겨놓고 이른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언니네가 사온 고기를 형부와 남편이 굽는 동안 팬에 소금을 담아 새우를 구웠다. 내가 준비한 버섯탕과 함께 밑반찬을 꺼내놓고 저녁을 먹었다. 야외에서 벌인 잔치는 입맛이 한없이 좋아서 과식을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만찬에 아이들도 포식을 했다. 형부가 새우 껍질 까는 방법을 가르쳐주자 아이들이 경쟁하듯 골몰했다. 규원이도 형들과 함께 앉아 열심히 까서 먹었다. 맥주를 따서 마시면서 형부가 야영도 할 만하다며 감탄했다. 언니네 다섯 식구가 너무 좋아해서 후일을 기약했다.
정리를 해놓고 밤늦게 언니네가 출발하려고 했는데 호민이가 가기 싫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규원이도 시원이도 덩달아 울었다. 바쁜 일도 없는데 뭘 가냐고 붙들어 앉혔다. 언니가 가져온 보드게임과 내가 챙겨온 블록을 가지고 아이들이 놀았다. 남편이 맛난 간식을 만들어 주었다. 형부는 남편의 캠핑감성과 불을 다루는 능력에 감탄했다. 언니가 연신 칭찬을 퍼부어서 남편의 어깨도 한껏 올라갔다.
남편이 형부랑 한 잔 더 하고 근처 찜질방에서 자고 오겠다고 나갔다. 덕분에 나는 언니와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다 단잠을 잤다. 내가 챙겨온 야외매트와 전기요도 요긴하게 쓰였다. 그 밤에 우리가 함께 외쳤던 말들은 추억이 되었다.
돌아와서도 그 날을 추억할 때마다 언니랑 농담처럼 외친다. 캠핑은 진리지! 캠핑 나오면 새우는 진리지! 야외에서 컵라면은 진리지! 진리 시리즈는 끝도 없이 이어붙일 수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이 다닐 테니까. 언니는 그날 밤에 호일에 감싸서 ‘불멍’ 하면서 구워 먹었던 닭다리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닭꼬치 야식도 인기가 최고였다. 옛날 실력을 되살린 남편의 야심작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후회를 남기면 안 된다며 언니가 아이들을 깨워서 다함께 산책을 나갔다가 조각공원 작품들을 배경으로 아이들 사진을 찍어주었다. 마지막 날의 아쉬움을 축복하듯 햇살이 맑았다. 남편이 센스 있게 갈비탕을 포장해 와서 아침식사도 따스하게 잘 마쳤다.
캠핑의 마지막을 언니네랑 보내는 바람에 또 하나의 의미있는 추억을 만들었다. 짐을 싸는 동안 언니가 매점에 가서 쓰레기봉투와 집게를 아이들 숫자만큼 사왔다. 그리곤 이건 꼭 하고 가야 한다면서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언니의 제의로 우리는 나란히 서서 평생 환경운동에 기여하겠다고 선서를 했다. 집게와 봉지를 받은 아이들이 이건 또 무슨 게임인가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언니가 외쳤다.
“캠핑의 피날레는 그린 플로깅!”
“캠핑의 피날레는 그린 플로깅!”
언니의 선창을 따라 다함께 외쳤다. 우리는 야영장을 돌고 밖으로 나와 공예언덕과 조각공원까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각자의 쓰레기봉투를 채웠다. 경쟁을 하니까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호호랑 규원이가 야영장 밖 공원 주차장까지 내려가 봉투를 채웠다. 언니랑 나랑 지원이는 핑계도 좋다며 공원 왼쪽의 사회체육 시설로 가는 길에 조성해놓은 코스모스 꽃밭까지 돌면서 플로깅을 했다. 그리곤 다 함께 모여서 집게와 봉투를 머리위에 흔들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첩에 아이들이 생애 첫 ‘그린 플로깅’ 샷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언니가 재빠르게 쫒아 다니며 사진을 찍어준 덕분이었다.
쌍둥이의 영유아 정기검사를 받은 건 명절 직후였다. 6세까지 6개월에 한 번씩 받는 검사는 빨리 돌아오는 것 같았다. 지원이는 키와 몸무게가 조금 미달이었다. 한참 잘 크더니 두어 달 동안 몸무게가 정체되어 신경이 쓰였는데, 역시나 결과에 반영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성장 발달에 문제가 될 만 한 건 아니라고 해서 마음이 놓였다.
미숙아 망막병증을 치료하면서 산소요법을 받았던 시원이의 눈이 가장 신경이 쓰였다. 사시는 더 관찰이 필요하기 때문에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약시 때문에 항상 주시하고 있었는데, 검진 결과 안압이 높게 나왔다. 재검사를 받기로 하고 날짜를 잡았다. 가슴이 조여들고 무릎에 힘이 풀리면서 온 몸이 떨렸다. 재검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병원에 다녀오던 날 슈퍼에 들렀다가 주인 여자랑 1층 여자가 나누는 소릴 들었다. 개똥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1층 여자가 슈퍼주인에게 맞장구를 치고는 나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갔다.
“안 그래도 그 아래층 여사님 얘기 중이었는데, 다둥이 엄마도 그 얘기 알고 있어요?
“아래층은 왜요? 무슨 이야기인데요?
“아유,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한데, 다둥이네 위생문제가 심각하다며 무슨 탄원서인지 동의서인지에 도장을 받는다던데, 몰랐구나!”
“그래요? 저희 집 위생문제가 어떻다고요?”
“아이들 베란다에서 물장난 했던 날, 기억나요? 그 때 찾아갔었는데, 애들만 있고, 집이 좀 그랬나 봐. 나한테도 그 얘길 몇 번이나 하더라고. 할 때마다 그렇게 흥분을 하더라고.”
그건 몰랐다. 그 날 집에 들어왔었다는 말은 아이들도 하지 않았는데, 정신이 팔려서 못 본건가? 그렇더라도 허락 없이 남의 집에 들어왔다면, 가택침입을 한 것 아닌가? 생각이 복잡해졌다. 일순 이해되는 면도 있었다. 내가 봐도 놀랄 지경이었으니 그 날 거실을 보고 갔다면 그 여자 성격에 놀라긴 했을 거였다. 그런데 하필, 왜 그 날이람?
“그런데, 아까 개똥 이야긴 또 뭐에요?
“아하, 개똥사건 몰라요? 관리실에 차량 등록하러 갔다가 때마침 사건을 목격하신 사모님이 옆 동 1층에 살거든. 그 분 때문에 그 날 관리실에서 벌어졌던 상황이 다 알려진 거지. 그 아래층 여사님이 관리실에 쫓아가서 cctv 돌려보고 개똥을 공용현관에 방치한 범인을 잡아내라고 난리를 쳤다는 거잖아요. 관리실장을 쥐 잡듯 잡으면서 말이야. 덕분에 여사님이 이 아파트에서 유명인사가 된 거지. 나이도 자기보다 적지 않으신 분한테 그렇게 몰아붙이는 건 첨 봤다고 하던데. 그래서 동대표고 뭐고 다 쫄았다잖아.”
알만하다. 담배 사건이 있던 날 나도 반은 목격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 성격에 눈앞에서 개똥을 봤다면 또 얼마나 난리를 쳤을까! 애먼 관리실 직원들이 뭔 죄를 지었다고. 세상에 함부로 해도 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한 편으론 체증이 내려간 듯 시원하다. 개선을 위해서는 그런 적극적인 행동파가 나서야 해결이 되는 법이니까. 산책로에 방치된 개똥을 나도 여러 번 봤다. 쌍둥이가 밟거나 만질까봐 질색을 하면서도 관리실에 찾아가 민원을 제기할 생각은 안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뜰히 챙겨서 처리한다. 눈이 어두워 못 봤을 수도 있고, 휴대폰을 받느라 놓칠 수도 있는 거지, 일부러 그랬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공용현관이라면 놀랄 만도 하다. 언젠가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토사물을 본적이 있었다. 냄새에 비위가 상해서 내려가는 동안 고역스러웠지만 관리실에 찾아가거나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 성격으론 절대 하지 못하는 일이다. 안면몰수하고 쫓아가 면전에 대고 따지고 다그칠 사람이 필요하긴 한 거였다. 나의 딜레마는 그렇게 지독한 망치녀가 하필 내 아래층에 산다는 거다. 배배 꼬인 것도 같고, 뭔가 심각한 회피성향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 여자는 한 번 과녁이 정해지면 죽도록 쏜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유명한 여자에게 신고를 당한 상태다. 그걸로 끝도 아니고 이제 내 집 위생 문제로 탄원서인지 동의서인지를 받으러 다닌다니, 그걸로 나랑 어쩌자는 것인가!
아래층 여자의 행동이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내가 조용히 있으니까 더 우습게 여기는 건가 생각하니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그러다 잠시 잊고 있던 시원이 안과 재검 문제를 떠올리자 심란해져서 골머리가 뜨끈하게 아파왔다. 시원이랑 지원이는 좀 전에 슈퍼에서 영혼 없이 사준 과일 음료를 먹고 있었다. 슈퍼 여자가 빨대를 꽂아준 모양이었다. 계산은 한 것 같은데, 다른 건 기억에 없었다. 어떻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는지 어느새 집 안에 들어와 있었다. 순간이동이라도 한건가 싶었다. 아이들은 외출 끝이라 고단한지 늘어졌다. 낮잠 시간이 두 시간이나 늦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선잠이 들던 시원이가 깜짝 놀라 다시 깨어나 칭얼대는 바람에 한참을 안고 누워 있었다. 두 아이가 깊은 잠에 빠진 걸 확인하고 나와서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았다. 곧바로 실외기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를 빼서 부품 연결 단자를 찾아 스마트폰에 연결했다. 어차피 명절엔 집을 비울 일이 많으니 한 일주일 두고 보자고 마음먹고 캠핑을 갔었다. 돌아와서도 평일 일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슈퍼에서 들은 이야기 때문에 오기가 나서 집념을 가지고 영상을 점검했다.
드디어 카메라에 무언가 찍힌 것이 보였다. 아래층 창이 열리고 머리와 팔이 창밖으로 나오더니 팔을 쭉 펴서 창문 위쪽의 외벽에 무언가를 뿌리는 거였다. 그러나 분무기는 손아귀에 쥐어있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영상을 멈춰서 다운 받기로 했다. 리더기가 고속이 아닌지 시간이 걸렸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어쨌든 증거를 잡았으니 목적은 달성한 거였다. 아쉬운 건 화면이 흐려서 아래층 여자인지 선명치 않고, 분무기의 내용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연작소설 <웰니스아파트 804호> 12회 차를 구독해 주시고 지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804호 스토리는 마지막 편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13회차는 명절 휴가 관계로 10월 6일에 발행할 예정입니다. 작가님, 구독자님 모두 즐거운 명절 보내시고 다음 회차에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