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망치녀의 남편을 만나다 -웰니스아파트 804호

연작소설 <웰니스족>

by 힐링가객

*연재소설 13회 차입니다. 전편의 스토리는 여기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healingsiinger/63





처음의 흥분은 동영상을 몇 차례 돌려보는 동안 가라앉았다. 창밖으로 손이 나와 우리 집 창문 외벽에 분무하는 것은 분명한데 분무기에 들어있는 내용물도, 아래층 여자의 얼굴도 확인할 수 없어서 증거자료로 사용하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그래도 동영상 편집기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여 해당 영상을 잘라내고 제목을 '망치녀'라고 붙여 저장했다. 곧바로 위층 언니와 진희의 휴대폰으로 파일을 전송했다. 진희가 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진희의 전화를 받은 건 추석 연휴를 앞두고 캠핑준비로 정신없을 때였다. 연휴도 긴데 어디 안 가면 자기 집으로 놀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명절 때마다 챙겨주는 진희 덕분에 가족끼리 만나 종종 친분을 쌓았는데 쌍둥이가 태어난 뒤로는 남편도 현서씨와 만나지 못해 소원해진 감이 있었다. 캠핑 때문에 아쉽지만 두 가족 모임은 다음 기회로 미뤘다. 대신 오랜만에 진희랑 수다를 떨었다. 진희 네도 서준이 때문에 당일치기 캠핑을 다닌다고 했다. 야영을 3박이나 계획한 나에게 대단하다고 했다. 망치녀의 소식을 묻기에 베란다에 감시 장비 설치한 사연을 말해주었더니 결과가 나오면 자기에게도 알려달라고 했다.


한참 일하는 시간인지 언니는 아직 메시지 확인을 안 한 상태였다. 진희는 메시지를 확인한 것으로 보였다.

남편에게 영상을 보낼까 말까 고민했다. 영업직이라 운전 중이거나 거래처에 가있을 거였다. 저녁에 보여주고 논의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상을 어떻게 사용해야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 궁리했다. 영상에 찍혔으니 아래층 여자가 순순히 자백을 할까? 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뿌려댄 걸까? 교활하게 변명을 준비했다면 밝혀낼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 정리하고 있을 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위층 언니였다. 인터폰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아이들이 깰까 봐 살금살금 규원이 방으로 들어가서 받았다.


“증거 잡았네?”

“성분이 뭔지는 안 보여서 아쉬운데, 일단 찍히긴 했어요.”

“어떻게 할 거야? 일단 만나서 당사자한테 확인을 해봐야지?”

“그래야 할 텐데, 순순히 자백을 할까요? 하도 성격이 이상한 여자라 뭐라고 나올지 모르겠어서 저녁에 규원이 아빠랑 이야기 좀 해보려고요.”

“그래 그게 낫겠어. 일단 찍혔으니까 발뺌은 못하겠지. 탐정이나 과학수사대 같은 걸 동원할 순 없는 건가?”

“뭔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신고부터 할 수도 없고, 참 답답하긴 해요. 그래도 증거가 있으니까 밝혀낼 방법이야 있겠지요.”

“그래그래. 그 여자 버릇 고치고 맘 편히 살면 좋겠다. 규원엄마 위험을 무릅쓰면서 촬영한 증거물이니까 잘 간수해.”

“알겠어요. 어떤 방법이 좋을지 남편이랑 머리를 맞대고 궁리해 볼게요.”

언니의 전화를 끊자마자 휴대폰이 또 울렸다. 진희였다. 전화기를 쥔 채 아이들 동태를 확인했다. 깰 때가 되었는데 아직 조용했다. 방문을 조용히 닫고 전화를 받았다.


“은주야, 서준이 아빠한테 물어봤는데, 공동주택은 영상물 촬영에 제한이 많더라고. 고지 없이 설치하면 불법 감시 장비라 너가 오히려 벌금 맞을 수 있대. 당장 철수하고 관리실과 관할 환경과에 허가신청을 하고 나서 내용을 고지한 후에 설치하라는데?”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정신이 확 돌아왔다. 내가 지금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진희에게 다시 전화를 해주기로 하고 일단 끊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서 아이들 동태를 확인했다. 낮잠 시간이 늦어져서 그런 걸까, 오늘따라 두 녀석이 길게 잤다. 병원에 가서 영유아 검진을 받은 것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베란다에 나가서 설치했던 감시 장비를 풀었다. 설치할 땐 그렇게 힘들더니 푸는 건 간단했다. 구입하면서 불법인지 아닌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 나이를 먹고도 뭔가에 매몰되면 분별이 안 되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특히나 아이들에게 해로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정신이 없었다. 나는 감시 장비를 검은 비닐에 넣어 주방 하부장 안쪽에 넣어놓고 휴대폰으로 관련 법령을 찾아보았다. 과연 진희 남편 말이 맞았다. 젠장!


언니에게 전화해서 진희의 말을 전해주었다. 언니도 그런 법령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헷갈리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층간소음 갈등이 불거져 사이가 좋지 않은 윗집에서 방범카메라를 설치해 놓은 바람에 무서워서 베란다에 나가지도 못한다는 아래층 주민의 사연이 방송에서 다뤄진 걸 봤다고 했다. 언니가 덧붙였다.


“규원엄마, 방송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걸 보면 좀 된 것 같아. 법령도 계속 바뀌니까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 있겠어? 괜히 내가 추썩거린 것 같아서 미안한데, 직접 만나서 물어보는 게 낫지 않겠어? 만나게 되면, 내가 같이 갈게.”


“언니가 추썩거린 건 없어요. 어쨌든 언니 덕분에 냄새의 진원지를 알아냈잖아요. 아이들이 숨 쉬면서 마시게 되는 건데, 모르면 어떡하겠어요. 뭘 뿌린 건지 확인을 해야죠. 확인만 하면 돼요.”


시원이가 발작적으로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지원이까지 일어났다. 망막검사를 위해 갑자기 안구에 공기를 분사했을 때 놀라서 울더니 아직까지 불안한 모양이었다. 시원이를 안고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영상물 때문에 잠시 덮어두었던 걱정이 가슴을 짓눌렀다. 잠자면서 올라간 체온 때문에 시원이 몸이 뜨거웠다. 유독 시원이의 울음소리는 가슴을 저미는 듯 아프다. 규원이는 울음소리를 들은 기억이 거의 없고, 지원이는 한두 번 와앙 하면 끝날 정도로 울음 끝이 짧다. 하지만 시원이는 공포에 휩싸인 듯 다급하고 놀란 울음이라 애가 타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출생 때 시원이가 겪었을 고통이 고스란히 재현된다. 우는 아이를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줄줄 흘러 앞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검사를 해야 하는데, 결과가 안 좋게 나오면 수술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


오후 내 갈팡질팡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랫집 여자를 만나서 직접 물어보는 것이 가장 명확한 방법이었다. 늦은 시간에 언니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오전에 잠깐 아이들을 봐줄 수 있는지. 언니는 메시지를 받자마자 수락했다.




다음 날 아침에 언니네 집에 쌍둥이를 데려다 놓고 규원이를 등원시켰다. 704호에 가서 일단 초인종을 눌러보았다. 아무 기척이 없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들어오는 시간이 언제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였다. 1층에 서있던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걸 보고 휴대폰에서 분무자국을 처음 발견한 날에 찍어두었던 사진을 찾았다. 엘리베이터는 4층에서 멈췄다. 잠시 후에 1층으로 내려간 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왔다. 7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그 여자가 내렸다. 나를 발견한 여자의 눈이 동그랗게 열렸다.

“안녕하세요?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뵈러 왔어요. 혹시 이게 뭔지 확인하시고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내가 내민 휴대폰 카메라를 외면한 채 여자가 경계를 드러내면서 말했다.

“그게 뭔지 보고 싶지 않은데요? 왜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이러세요?”


“용건이 있어서 온 거니까 오해는 마시구요, 보고 싶지 않다면 설명해 드리죠. 우리 집 창문 아래 분무자국이 많던데, 뭘 뿌리는 거예요?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확인 좀 하려고요.”


“그것 때문에 왔다구요? 그건 무독성 소독제인데, 우리 집 욕실과 하수구에 매일 쓰고 있는 거예요.”

“무독성인지 아닌지는 봐야 알죠. 저한테 보여줄 수 있어요?”

여자가 입술을 실룩이며 웃었다. 그리곤 정색을 하곤 쏘아붙였다.

“소독제가 다 똑같지, 내가 왜 댁한테 그걸 보여줘야 해요?”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플 정도면 그걸 마시는 우리 아이들 때문에라도 확인이 필요한 거죠. 그게 뭔지 확인을 해야겠어요. 옥시 사건도 있고, 미세플라스틱이 발암물질이라 위험하잖아요?”


“정말 기가 막히네. 이제 내가 소독제까지 허락받고 써야 하는 건가요? 위층이 불결해서 세균 좀 차단하려고 뿌리는 건데, 그게 싫으면 집이나 좀 청결하게 유지하세요.”


순간 슈퍼주인한테 들은 말이 생각났다. 듣고 와서 몇 날 며칠 괘씸하고 분했던 이야기였다.

“저기요, 우리 집 상태가 어떤지 뭘 안다고 그래요? 언제 우리 집에 와 봤어요? 내 허락 없이 왔다면 가택 침입인데, 신고를 해야겠군요!”


내 말을 들은 여자의 입이 실룩거리는가 싶더니 얼굴 전체에 경련이 일었다. 그리곤 눈을 번들거리며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신고요? 하세요. 남의 집 베란다로 물이 줄줄 흘러서 손빨래 널어놓은 것까지 얼룩지는데 찾아가지도 못해요? 집은 엉망이고, 거기다 애들까지 방치하고! 신고? 한번 해보세요, 아동학대로 고발할 거니까. 상식이 통해야 뭔 말을 하지. 무식해서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무슨 말을 하겠어요. 난 우리 집 위생을 지키는 것뿐이니까 신고든 뭐든 마음대로 하세요.”


여자가 혼잣말을 줄줄이 내뱉으면서 몸으로 내 어깨를 밀쳐내고 자기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집 안으로 들어간 여자가 현관문이 부서지도록 꽝 닫았다.


704호 현관문을 노려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여자가 망설임도 없이 말한 걸 보면 집 안에서 항상 사용하는 무독성 소독제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여자를 신뢰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걸 뿌린 여자의 머리와 얼굴과 손에 분무한 방울이 먼저 묻을 거였다. 영상에서 보인 여자의 머리와 손에 방독면이나 장갑을 낀 것 같지는 않았으니 된 거였다. 나는 그쯤에서 생각을 멈췄다. 더 이상 그 문제로 골머리를 썩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시원이의 안과 검사가 있는 날이었다. 남편이 연차를 내서 함께 갔다. 며칠 동안 내가 너무 걱정에 휩싸여 있어서 그런지 남편도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시원이는 주말에나 타는 아빠 차의 카시트에 앉아 영문도 모르고 지원이랑 까르륵 대며 손장난을 하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눈 검사를 할 거라고 설명했더니 알아들은 듯 눈을 찡긋찡긋 해 보이고는 눈꺼풀을 꼬집으면서 말했다

“아야 아야 해. 아야 아야 해떠.”


지난번 검사 때 안구에 공기를 분사했던 걸 기억하고 있는 거였다. 시원이에게 이젠 놀라지 말라고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재검사에선 어떤 방식으로 측정하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담당의로부터 정확한 검사를 위해 표준적인 방법으로 진행될 거라는 설명을 들었다. 눈에 특수한 염료를 넣고 눈의 표면에 약간의 압력을 가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시원이는 의사가 손을 대기도 전에 공포의 울음을 터뜨렸다. 노련한 간호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무사히 검사를 마칠 수도 없었을 거였다.


시원이의 눈 상태는 좋지 않았다. 특히 오른쪽의 시력이 왼쪽에 비해 현저하게 낮았다. 게다가 시신경의 손상이 있어서 계속 더 지켜봐야 한다는 거였다. 녹내장은 계속 관리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기억하려고 ‘녹내장’이란 용어만 꼭 움켜쥐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심장이 눌린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었다. 망막 박리 증상은 없어서 수술적 치료가 필요한 단계는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희망이었다. 병원을 나오면서부터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남편의 콧등이 붉어져 있었다. 나도 말을 아꼈다. 시원이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니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운전석에 앉은 남편이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원이와 지원이가 좋아하는 쌀국숫집에 도착해 있었다. 두 달 만에 갔는데도 주인 내외분이 우리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한산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 상을 차려주었다. 시원이가 눈을 비빌까 봐 시원이를 품에 안은 채 손을 붙잡고 있어야 해서 남편이 육수에 야채와 소고기를 듬뿍 넣었다. 끓어서 진국이 될 때까지도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검사를 위해 투여한 염료 때문에 시원이의 눈동자가 주황색으로 보였다. 그래선지 동공이 확장된 것처럼 보였다. 낯선 동공의 초점이 어긋난 것이 더 확연하게 보였다.


이른 점심이라 식당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눈이 붉어진 채 시원이의 손을 붙들고 식사를 못하고 있는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주인아저씨가 다가오더니 시원이 손에 장난감 차를 건네주었다. 남편이 아저씨한테 고맙다고 인사하고 내 얼굴을 보았다.


“이 녀석 눈 검사 허고 오는 길인디 결과가 좋질 않어서 애 엄마가 저러고 있슈.”


“어이구 그랬군요.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그런데 저도 키워보니까 애들은 걱정거리를 주다가도 잘 먹고 잘 놀면 무사히 지나가더라고요. 딸 하나 있는데 뇌수막염도 걸리고 패혈증도 겪었지만 잘 컸어요. 의술이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니까 방치만 안하고 관리하믄 치료도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아저씨 말을 듣는데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애들은 잘 먹고 잘 놀면 무사하다는 말이, 방치만 안 하면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시원이에게 진하게 우러난 육수를 떠먹였다. 시원이가 자동차를 쥐고 있어서 나도 한 손의 자유를 얻은 거였다. 남편이 접시에 덜어준 국수를 지원이가 호로록 빨아들이는 걸 본 시원이도 잡고 있던 내 손을 뿌리치고 쌀국수로 손을 뻗었다.

집에 돌아와서 시원이의 눈을 관리해 주기 위해 증상과 관련된 정보들을 찾았다. 안압을 낮추는 점안 액을 처방받았지만 그것만으론 안압을 낮추기 어렵다고 했다. 우선 눈 질환을 개선시키는 식단부터 만들었다. 시금치와 달걀노른자 등 루테인과 지아잔틴이 풍부한 식재료를 식단에 골고루 포함시켰다. 케일과 브로콜리 섭취를 위해 야채 치즈 계란말이 간식도 계획했다. 망막 시각세포들이 모여 있는 황반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했다. 포도껍질에 많은 레스베라트롤 섭취를 위해 발사믹 소스를 이용한 샐러드 메뉴도 추가했다.


안토시아닌과 항산화물질이 함유된 블루베리를 먹이기 위해 수제 요거트와 스무디 메뉴도 추가했다. 아로니아로 잼을 만들어놓고 먹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시즌이 끝나서 아쉬웠다. 망설이다가 식재료 주문 목록에 냉동 아로니아를 추가했다. 본래 인스턴트식품이나 가공된 반제품을 사는 일은 거의 없지만 어쩌다 한 번씩 사 먹인 간식들이 마음에 걸렸다. 아이들이 스파게티를 좋아해서 손쉽게 사용했던 토마토 페이스트도 끊고 생토마토를 사서 직접 만들어 먹이기로 했다. 조금 더 움직이면 신선한 야채와 과일로 건강식을 먹일 수 있었다.

결명자를 끓여 음료로 먹일 계획과 오메가 3 지방산 섭취를 위해 신선한 생선과 견과류, 들기름을 즐겨 이용하기로 했다. 눈에 잘 띄도록 포스트잇에 메모해서 냉장고와 조리대 상부 장에 붙여놓고 나서야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시원이의 검진 결과를 물어보려고 들른 위층 언니를 붙잡고 눈 건강식과 관리 계획을 의논했다. 언니가 좋은 계획이라며 아이들의 눈 건강을 위해 다 같이 하는 것이 좋겠다고 격려해 주었다. 시험 삼아 케일과 시금치에 냉동블루베리를 갈아서 요거트와 꿀을 넣은 스무디를 만들었다. 아이들을 붙잡고 언니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설명을 했는지 호영이랑 호민이가 컵을 들고 그 걸쭉하고 푸르뎅뎅한 것을 한숨에 마셔버렸다. 규원이가 따라 했더니 지원이랑 시원이도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바닥이 보이도록 알뜰하게 비우는 걸 보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시원이만 먹이려고 했으면 고역이 되었을 텐데, 형들과 함께하면서 격려하고 응원하니까 게임을 하듯 즐겁게 먹어치운 거였다.


“언니, 언니 생각이 항상 맞아요.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호영이 호민이한테도 고맙고요.”

내가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더니 언니가 내 손을 잡고 꾹꾹 주무르면서 말했다.


“뭔 말이야. 덕분에 아이들 눈 건강 미리 챙기고 예방하게 되었으니 내가 고맙지. 우리 시원이랑 아이들 다 잘 클 거니까 걱정하지 말자, 나중에 분명 자랑스럽게 추억하게 될 거야.”


언니 말에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는데 또 눈물이 주룩 떨어졌다. 요즘 왜 이렇게 감정이 통제 불능인지 누가 보면 조울증인줄 알겠다는 생각이 들어 웃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언니의 눈도 붉어져 있었다.






추워지기 전에 아이들 놀이방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언니네 집에 갈 때마다 드레스 룸을 개조한 놀이공간에 들어가서 나올 줄 모르는 쌍둥이 때문에 부러웠는데, 규원이가 놀이방 타령을 해서 더는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내려와서 우리 집 드레스 룸을 보면 심란했다. 규원이 때문에 남겨놓은 유아용 장난감부터 자주 사용하지 않는 가습기 선풍기 같은 소형 가전제품들이 선반을 채우고 있었다. 바닥엔 얼마 전에 캠핑 간다고 구입한 킥보드와 규원이의 블레이드, 캠핑용 소품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내 계획을 들은 남편이 신발장 맞은편에 다용도 선반 장을 사다가 놓았다.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들여놓고 보니 현관문을 열면 바로 보이던 거실의 가름 막 역할을 해서 오히려 안정감이 생겼다. 아이들의 킥보드와 블레이드, 나갈 때 챙겨갈 소품들을 그곳에 보관했다. 나머지 캠핑용 소품들은 베란다에 설치된 창고에 선반을 추가해서 정리했다.


내가 놀이방에 들여놓고 싶은 원두막처럼 생긴 이층짜리 원목 교구를 보여주면서 뭔가 입체적이고 재미있어할 만한 공간구성이면 좋겠다고 했더니 남편이 2층짜리 텐트를 보여주면서 이런 건 어떠냐고 물었다. 캠핑족의 기지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드레스 룸에 설치되어 있던 선반들을 모조리 빼놓고 바닥에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질 좋은 매트를 깔았다. 배송받은 2층짜리 텐트를 설치해서 2주 만에 놀이방을 완성했다. 아이들에게 비공개로 작업을 했기 때문에 위아래층 아이들의 궁금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드레스 룸 문에는 남편이 직접 만든 ‘Let's go Camping!’ 명패를 붙여놓았다.


토요일 저녁에 위층 호호를 초대해서 개방식을 했다. 눈 영양간식으로 만든 야채 치즈 계란말이와 블루베리요거트를 나눠먹은 후에 방을 공개했다.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고 텐트 2층에 올라가서 뛰고 구르고 난리를 쳐도 충격이 크지 않았다. 언니도 캠핑족의 완승이라며 남편의 빛나는 아이디어를 추켜세웠다. 남편이 2층 텐트를 주문한 날, 값을 듣고 너무 비싸서 놀랐다. 하지만 앞으로 사용할 날이 많을거라는 캠핑달인의 주장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어딘가 빈 땅에 원두막을 짓는대도 비용은 들여야 했다. 결과적으론 만족이었다.

지난 추석 연휴에 캠핑을 경험한 아이들은 2층 텐트에 올라가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언니도 올라가 보더니 튼튼하고 좋다며 엄지 척을 했다. 낮잠이 필요할 때 공중부양 체험하러 오겠다며 예약까지 했다. 남편도 어깨를 으쓱대며 대놓고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캠핑족의 DNA는 아이들에게 기본적으로 흐르고 있어서 찾아만 주면 된다면서.


그날 밤 호호와 규원이가 2층 텐트에서 잤다. 매주 토요일마다 허락해 주기로 했다. 큰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서 쌍둥이가 끼어들 틈이 없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아래쪽에 설치한 해먹에 올려주니 너무 좋아했다. 텐트가 고정 형이 아니라서 구름매트를 내리면 낮게도 쓸 수 있었다. 이래저래 대성공이었다. 소음스트레스 없는 놀이공간을 만들었다는 것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면 가을이 깊어지는 걸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잊고 있다가 선득해지면 그제서 창문을 닫았는데, 이젠 열어놓고 30분만 지나도 으스스 몸이 떨려서 닫기 바쁘다. 아이들 놀이방을 꾸미고 들어앉아 노느라 몇 주가 삭제되었다. 아래층 여자가 그 후로 소독제를 계속 뿌려대고 있는지 신경 쓸 새도 없었다. 어차피 여름철이 지나가서 창문을 내내 열어놓을 일도 없으니 뭘 해도 상관없었다. 뿌리면 뿌리는 대로 제일 먼저 자기가 마실 테니 더더욱. 감시 장비에 대해선 이야기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미루다가 남편한테 냄새가 났던 이유만 이야기했다. 남편은 그때의 상황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신경 쓸 거 없다고 말했다.


아빠랑 킥보드를 타려고 주말만 기다리는 아이들 덕분에 토요일이 되면 나는 도시락을 준비했다. 축제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불러 모으는 곳을 제외하고 남편이 찾아낸 기막힌 장소들을 다니며 관전 포인트를 배경으로 아이들 사진 파일을 축적해 갔다. 아이들도 단풍 진 야산을 오르거나 노을이 지는 갈대숲 보는 걸 좋아했다. 게들이 순간 이동을 하는 갯벌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 이번 가을의 큰 수확이었다. 그만큼 아이들이 자랐다는 증거이기도 해서 순간순간 내가 받은 감동을 사진과 함께 메모해 나갔다.

인터넷에서 찾아낸 기념사진집 셀프제작 프로그램으로 추석 캠핑 때부터 찍은 사진들을 편집해서 기념 앨범을 두 권이나 완성했다. 책이 도착하자 아이들이 더 좋아했다. 시원이 지원이도 텐트의 구름시트에 올라타서 질리지도 않고 앨범을 들여다보았다. 자신과 가족이 담겨있는 책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텐트는 주중에는 낮게 설치해 놓고 쌍둥이가 주로 이용하고 주말에는 2층으로 설치해서 큰 아이들의 욕구를 채워주었다. 창고로 방치되고 있던 드레스 룸을 아이들을 위한 힐링 공간으로 개조한 것이 두고두고 흐뭇했다.


이번 주에도 아이들은 아빠가 마련한 이벤트가 뭔지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 후배의 결혼식이 있어서 남편 혼자 다녀왔다. 바뀌는 계절에 적응하느라 그런지 남편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투잡이 무리가 된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위층 호호도 외할머니댁에 가고 없었다. 남편에게 꼼짝말고 피로가 풀릴 때까지 한 숨이라도 자라고 특별주문을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텀블링장에 갔다가 산책을 하고 들어왔다. 집에 왔을 때 남편은 집에 없었다. 세면도구가 든 가방이 없어진 걸 보고 사우나에 간 걸 알아차렸다. 역시 사람마다 피로를 푸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는 거였다.

남편이 상기된 얼굴로 들어온 건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컨디션이 나아진 모양이었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긴 건지 시선이 마주치자 싱글싱글 웃었다. 의아해하는 내 표정을 읽은 남편이 아끼는 정보라도 풀듯 장난스럽게 털어놨다. 이발소에 들렀다 오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아래층 남자를 만났다는 거였다. 7층을 누르기에 704호냐고 묻고 바로 통성명을 했단다. 베트남 주재원으로 나갔다 잠깐 들어왔다고 해서 출국 전에 한 잔 하자고 했더니 쾌히 수락했다는 거였다. 내가 묻기도 전에 남편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뜸 들일 거 뭐 있어, 이따 저녁 먹구 여덟 시쯤 만나서 한 잔 허기루 했지.”


저녁을 먹고 나간 남편은 10시가 훨씬 넘어서 들어왔다. 남자가 그 간의 갈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서 부부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단다. 남편 말에 의하면 남자는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자기 아내가 좀 독특하다고 이해해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아내를 대신해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다. 어떤 의견차가 있는 건지 알아보고 중재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게 다야? 이 시간까지 뭔 말을 그렇게 오래 나눈 거야?”


“성질 급허기는 여전허네, 마음이 열리는 것두 다 시간이 필요헌 거여.”


남편은 뭐가 좋은지 빙긋이 웃었다. 그러더니 믿기지 않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래층 남자도 한 때는 캠핑 족이었다고. 남편은 그에게도 캠핑족의 DNA가 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함께 캠핑을 갈 수도 있지 않겠냐는 거였다. 그러면 송이와 지원이가 어울릴 수도 있고, 이웃 간의 이해와 친분도 멀지 않다는 거였다. 횡설수설할 정도로 취한 건 아닌데 비약이 좀 심해서 나는 떨떠름했다. 왜 그렇게 확신하냐고 물었다. 알고 싶었다. 간혹 짓궂기는 해도 근거 없이 헛소리를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남편이 남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결혼 전, 남자가 송이 엄마에게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캠핑카를 빌려서 이벤트를 준비했다는 거였다. 캠핑카의 뒤 칸을 장미꽃으로 가득 채워 장식했는데 향기가 너무 진해서 질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결국 야영을 포기하고 숙소를 구해 호텔에서 잤는데, 문제는 이튿날엔 장미 향기가 더 진해져서 숨이 막혀 차를 탈 수가 없었다. 송이 엄마가 버리자고 하는 걸, 창문을 모조리 열고 차를 움직여 가까운 카페에 기증하고 나서 무사히 여행을 마쳤다는 거였다. 장미 이벤트는 실패했지만 결혼엔 성공해서 송이를 얻었다는 거였다. 남편 이야기를 들으니 지독하게 현실적인 송이 엄마와는 결이 다른 사람일 것 같았다.


“그 남자 낭만적이네. 잘하면 뭔가 통할 것도 같은데?”

“그런 것 가텨, 캠핑 족끼리 통하는 것이 있더라구.”


남편에게 또 뭔 얘기를 들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남편이 또 히죽 웃었다. 뭔 얘기가 더 있는 것이 분명했다.


“거기도 딸 바보여. 그래서 바보끼리 하이파이브를 혔지.”


남자가 딸한테 어찌나 애틋한지 송이 자랑을 늘어놓았단다. 남편도 지원이 자랑을 하곤 같이 파이팅을 했다는 거였다. 아래층 남자보다 4살이나 많아서 남편은 형님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주재원 생활도 꽤 괜찮고 회사에서도 기간을 연장할 수 있어서 가족을 데리고 가고 싶은데 송이 엄마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송이 아빠는 3개월 후, 이른 봄에 돌아올 거라고 했다. 남편들끼리라도 소통을 하면 뭔가 달라질 것도 같았다.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송이 엄마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그럼, 이번 겨울만 잘 넘기면 되는 건가?”


남편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눈썹을 찡긋 움직여 대답을 대신했다.









*연작소설 <웰니스아파트 804호> 13회 차를 구독해 주시고 지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804호 스토리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다음 주에 '끝나도 끝난 게 아닌' 에필로그로 찾아뵈려 합니다. 작가님, 구독자님 모두 즐거운 가을날 보내시고, 에필로그에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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