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석을 모르는 남자, 연석으로 크는 여자
쫄보의 운은 1종 면허 시험에 몽땅 써 버렸다.
그 후로 12년간, 면허는 장롱 안에서 조용히 숙성되었다.
매일같이 ‘운전 연수받아야지’ 생각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뤘다.
남편은 내가 하루라도 빨리 운전 연수받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게 다 1종 면허 따느라 고생한 트라우마다.
결국 연수를 받기로 마음먹은 건
내 안의 맹모 근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하면서였다.
우리 동네는 나름
‘맹모 삼천지교’로 유명한 동네였다.
당연히 동네 도서관은 늘 책이 부족했고,
나는 책을 빌리러 다른 동네 도서관까지 원정을 다녔다.
그런데 무거운 책들을 이고 지고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더니 관절이 항의했다.
노후 리스크 급상승.
그래서 결국,
운전 연수를 결심했다.
나는 ‘검증이 끝나야 움직이는 엑셀형 인간’이다.
판단이 안 끝났는데 그냥 하라고 하면
손발부터 버틴다.
1. 학원 연수 – 느긋한 강사님과의 평화
먼저 집 근처 운전학원에서 2종 연수를 받았다.
왕초보를 수없이 겪어본 듯한 그 강사님은
다행히도 굉장히 느긋한 타입이었다.
내가 느려터지게 운전해도
타박 한 번 하지 않았다.
거북이처럼 가도 그냥,
“좋아요, 천천히 가요.”
이에 나는 조금씩 자신감이 올라갔다.
한 번은 신호등이 바뀌는 걸 미처 계산 못 해서
그만 횡단보도 한가운데에 멈춰 서 버렸다.
“아, 어떡하죠.
민폐가 돼 버렸네요.”
내 말에 강사님이 말했다.
“조금 더 앞으로 가요.
보행자들이 차 뒤로 돌아가게 하는 게 나아요.
앞에서 지나가면서 쳐다보면 민망한데,
뒤에서 지나가면 뭐라고 해도
안 보이니까.”
오. 역시.
초보의 민망함을 아주 정확히 알고 있는 조언이었다.
2. 자차 연수 – 급한 강사님과의 충돌
그다음은 자차 연수였다.
강사님은 다부진 체격의 여자분.
말도 많고, 유쾌하고,
성격도 빠릿빠릿했다.
문제는 코스였다.
내가 굳이,
남편 출근길을 연수 코스로 잡자고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초보에게는 꽤 난도 높은 선택이었다.
줄줄이 달리는 차들 사이에 끼어들기 위해
깜빡이 켜고, 사이드미러 보고, 백미러 보고,
앞 상황까지 보면서
순식간에 판단해서 들어가라니.
멘탈은 이미 과부하 상태였다.
강사님은 말했다.
“지금! 지금 들어가셔야죠.
왜 안 들어가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이드미러는 봤는데,
내 안의 검증표에 아직 체크가 안 됐는데요…?’
검증 안 된 명령에
몸이 먼저 따라가 주는 타입이 아니었다.
강사님은 답답했을 것이다ㅡ 나는 무서웠다.
그래도 강사님은 끝까지 성실했다.
그래서 연수가 끝날 때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답답하셨을 텐데
끝까지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자칫 싸움이 날 뻔한 순간을 잘 봉합하고
서로 덕담을 나누며 헤어졌다.
3. 첫 홀로 주행 – 연석과 나, 그리고 남의 편
우여곡절 끝에 자차 연수도 어떻게든 마쳤다.
이제 남은 건
혼자 나가는 일뿐.
일단, 동네 한 바퀴부터.
차 키를 들고 현관을 나서는 순간부터
심장은 두방망이질을 쳤다.
절체절명.
그런 기분.
운전석에 앉아
일단 심호흡.
비록 정확히
동네 한 바퀴 돌 뿐이지만,
성실하게 폰 내비게이션도 장착했다.
안전벨트 착용.
브레이크 밟고 시동 ON.
기어를 D로 옮기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발을 아주 천천히 브레이크에서 떼었다.
조심스레 차를 빼서
옆으로 돌려 나오는 그 순간,
“드드드드득—”
주차장 연석을
대차게 긁어먹었다.
다음번 연습 때도 비슷했다.
“드드득—.”
연석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10cm쯤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4. 연석을 모르는 남자, 연석으로 크는 여자
그렇게 두 차례 연석을 긁어먹은 이야기를 하자
남편이 말했다.
“조심해야지.
잘 모르겠을 땐 여러 번 내려서
차랑 연석 거리 확인해 봐야 돼.”
말만 들으면
정론이다.
하지만 그가 잘 모르는 게 하나 있다.
초보에게는
시동 켜 놓고 차문 열고
들락날락하는 것 자체가
이미 공포라는 사실을.
남편에게 시동은 ‘전원 ON’인데,
나에게 시동은 ‘위험 ON’이었다.
공포는 자동 실행.
화도 내지 않고
그저 “조심해라” 한마디 했을 뿐인데도,
잔뜩 졸아 있던 나는
그 말만으로도
비 맞은 강아지처럼 주눅이 들었다.
연석도 한 번 안 긁어 본,
성실 A형 엑셀남에게는
초보의 공포가
전혀 체감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위로는
동네 베테랑 엄마들이 해 줬다.
“처음 운전할 때 연석 긁는 건 다반사야~
그거 한 번 안 긁고 사는 사람이 어딨어.”
그런가 하면
스무 살부터 운전한 친구.
복잡한 주상복합 주차장 안,
다른 차 옆에 닿을 듯 좁은 길에서도
거침없이 핸들을 돌린다.
옆에서 보는 나만 괜히 간이 콩알만 해졌다.
이런 곳은 차 긁을까 봐 못 끌고 오겠다는 내 말에,
"나도 처음엔 차 많이 긁어 먹었지.
수리비를 다 합치면 차 한 대 뽑을 걸."
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제야 알았다.
연석 한 번도 안 긁어 본 사람의 조언보다,
이미 몇 번 긁어 본 사람들의
“원래 다 그래요.”
한마디가
초보에겐 훨씬 큰 힘이 된다는 걸.
그리고 하나 더.
쫄보의 운전은
누가 뭐라고 한마디 한다고 확 느는 게 아니라,
비슷하게 겪어본 사람들의 시간만큼
조금씩 는다는 걸.
그리고.
남편은 역시
‘남의편’의 준말이라는 것도.
5. 생애 첫 접촉사고
드디어 접촉사고가 일어났다.
도서관 야외 주차장에서 살금살금 차를 빼고 있는데,
주차장 도로에 있던 차가 갑자기 후진해 와서
그대로 내 차와 부딪혔다.
나는 뒤늦게 클락션을 울렸으나, 이미
“퉁.”
때는 늦으리.
나는 느린 순발력, 아니 늘보력을 한탄했다.
몰랐다.
이럴 때 클락션을 눌러야 한다는 걸.
운전대 한가운데에 그게 있는데도.
“아니, 백미러도 안 보고 후진하시면 어떡해요?”
나는 속상한 마음에 따졌다.
상대편 역시 아주머니 운전자였다.
백미러를 보지 않고 냅다 후진해 버리는,
초보에게는 제일 무서운 타입이었다.
게다가 본인도 얼어붙은 얼굴이었다.
잠시 서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래도 나는 ‘남의편’에게 전화했다.
나는 보험 처리보다는
적은 금액으로 합의를 보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 사이 상대방은 이미 보험사에 연락을 넣은 모양이었다.
결국 나도 자문을 얻기 위해
보험사에 연락했다.
그날은 서로 상대 보험사 연락처를 주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남편이 차를 보더니 말했다.
“합의 볼 수 있으면 그게 나을 것 같아.”
그래서 나는 내 차 보험사에,
상대방 차주가 합의 의향이 있다면
내가 제시한 금액으로 진행해 달라고 전했다.
사실 상대방의 과실이 더 컸기에,
내가 제시한 금액이 그에게도
보험 올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터였다.
그렇게 가해 차주와 나는
원만히 합의를 마쳤다.
남편은 나에게,
“고생했어.”
라고 말했다.
아.
그가 전혀 뭐라고 하지도 않고
건넨 담담한 한마디는,
마음의 평화를 주었다.
남편은
‘남의편’의 준말이 아니었다.
희한하게도 나는
연석 좀 긁어먹은 것에는 왕창 졸고,
접촉사고에는 되레 담담했다.
내 잘못보다 상대방 실책이 컸다 해도,
연석 긁기보다야 접촉사고가
훨씬 스케일이 큰 사건 아닌가.
결론.
나는
아주 별것 아닌 데서는 왕창 졸고,
부담이 큰 데서는 의외로 의연한(?)
아주 이상한 왕초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연석 긁기에는 뭐라고 하고,
접촉사고에는 “고생했다” 말해 주는,
역시 조금 이상한 남편의 조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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