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에 서핑 바지를 입고 왔던 남자

요가 정모에 서핑 바지를 입고 온 이유

by yeon


2000년대에는 요가 커뮤니티가 꽤 활발했다.

커다란 요가 커뮤니티에서 종종 오픈 클래스나 정모가 열렸고,
어느 날은 커플 요가 정모가 있었다.


나는 그때 막 일을 시작한 햇병아리 요가 강사였다.
동기들과 함께 그 정모에 참석했다.


각자 짝이 정해졌고,
우리는 둘씩 짝을 지어 수련을 하게 되었다.


그날 처음 본 남자 한 명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야자수 그림이 그려진 화려한 서핑 바지.

요가 정모에.


그것만으로도 이미 시선을 끌었는데, 문제는 옷이 아니었다.
몸이 정말 뻣뻣했다.


요가에서는 뻣뻣한 사람을 가끔 “통나무 몸”이라고 부르는데,
그는 그 표현이 너무 잘 어울렸다.


커플 요가는 둘이 함께 자세를 잡는다.
그래서 한쪽이 유연하지 않으면 파트너가 고생한다.


예를 들어 삼각자세를 할 때 서로 등을 맞대고 옆으로 내려가면,
몸이 뻣뻣한 사람은 엉덩이가 자꾸 뒤로 밀린다.
그러면 파트너는 앞으로 밀려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텨야 한다.


그날 우리와 함께 간 남자 동기는 서핑 바지를 입고 온 남자와 짝이 되었다.

남자 동기가 푸념했다.

“아우, 허리야. 죽는 줄 알았네.”

파트너가 뻣뻣한데 힘까지 세서 자꾸 잡아당긴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쟁기 자세가 나왔다.
누워서 다리를 머리 뒤로 넘겨 발을 바닥에 대는 자세다.


그 남자는 결국 혼자 쟁기 자세를 해야 했다.
여러 사람이 둘러서서 그의 자세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장면이 지금도 떠오르면 웃음이 난다.



그는 자신을 H라고 소개했다.

군대 친구인 헬스 트레이너 M을 따라왔다고 했다.

눈에 띄는 화려한 서핑 바지를 입고 온 이유는 의외로 별다를 게 없었다.

서핑을 즐기는데, 별생각 없이 요가에 입고 왔다고.

우리는 나와 동갑인 H와 M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H는 말이 꽤 웃긴 사람이었다.
허풍과 너스레가 섞인 스타일이었다.

그는 강남의 유명 스포츠 센터의 핫요가 프로그램을 통해

요가를 처음 접해봤다며 이렇게 말했다.


“와- 거기 갔더니 예쁜 여자들이 다 탑이랑 반바지를 입고 있는 거야!
완전히 천국이더라구.”


우리는 다들 실소했다.


한 달 정도는 열심히 다녔다고 한다.

그 말이 더 웃겼다.


H는 서울대를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전형적인 수재 느낌보다는, 사람을 웃기는데 재능이 더 있는 쪽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가끔 만나는 친구가 되었다.



나중에 H는 유명한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원래 나는 보험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예전에 그런 일로 친구와 멀어진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H는 달랐다.
강요하지 않았다.
그냥 설명을 했다.


그는 영업 이야기를 꽤 재미있게 했다.

대단한 인사를 만나기 위해 삼고초려를 했다느니,
고객 취향에 맞춰 커다란 꿀단지를 선물했다느니.

회사가 혹시라도 망하면 어떡하느냐는 내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장담했다.

“그럴 일도 없지만, 걱정 마.
만에 하나 그런 경우가 생기면
내가 ‘야야, 얼른 보험 빼라!’ 하고 먼저 알려줄 테니.”

그 특유의 입담 덕분인지 나는 결국 몇 개를 가입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보험보다 사람이 더 기억에 남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락은 자연스럽게 뜸해졌다.
경조사 때 가끔 얼굴을 보는 정도였다.


H는 내 결혼식에도 왔다.


청바지를 입고.


그게 또 H다운 모습이었다.


그 뒤로 우리는 각자 결혼을 했고,
비슷한 시기에 아이들도 태어났다.


직접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SNS를 통해 그의 소식을 보게 되었다.


나는 가끔 생각했다.


저 자유롭고 엉뚱한 H는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어느 날 H의 SNS에 사진 하나가 올라왔다.


어린 아기가 H의 팔을 베고 누워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00아, 아빠 팔베개 해주기 힘들다...”


아기가 아빠 팔을 베고 자는 게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다른 사진들도 거의 아기 사진이었다.

영락없는 ‘딸바보’가 된 모양이었다.


그 엉뚱했던 서핑 바지 남자가 이제는 딸 팔베개 담당이 되었다니.

새근새근 자는 아기에게,


"아빠 팔 아프다~"


하고 슬쩍 허풍을 섞어 말했을 것 같은

H의 목소리가 괜히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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