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가 거래가 되는 순간

by 역전의기량

남편 : “민국이 23. 5월에 결혼한다는데요. 결혼식 갈 수 있어요?”
기량엄마 : “어? 아내 되는 사람 나라에서 이미 결혼하지 않았어요?”
남편 : “그때는 거기서 살다가, 지난번엔 아들 돌잔치 하고… 이번에 한국에서 결혼식 한대요.”
기량엄마 : “아… 당신. 돌잔치 얘긴 못 들었는데요.”
남편 : “친척만 모여서 간단히 했나 봐요.”
기량엄마 : “네…”

남편이 ‘친한 동생’ 결혼식 이야기를 꺼낸 건,
아마 내가 잊지 못하는 그 헤프닝을 남편도 알고 있어서였을 거다.
그 질문을 일부러 미뤄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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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나는 보험설계사 일을 막 시작했었다.
자격증을 따고 트레이닝센터에서 교육을 받던 시절,
숙제가 있었다. 주변 지인 보장분석을 해보고 부족한 보장을 제안해보는 것.

그래서 남편의 친한 동생 민국에게 전화를 했다.

기량엄마 : “통화 괜찮아요?”
민국 : “괜찮아요, 형수님.”
기량엄마 : “보험회사 취직했잖아요. 보장분석 숙제가 있어요… 시간 괜찮으면 근무하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요?”
민국 : “그래요. 형수님.”

약속은 생각보다 쉽게 잡혔다.
매니저님과 함께 구로 디지털단지로 갔다.

민국은 말도 예쁘게 했다.
“형수님 같은 분이 시작하면 믿고 할 수 있죠.”
“응원해주고 싶었어요.”

나는 그 말이 고마웠고, 그날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리고 민국이 말했다.

“8월쯤 아내 출산이에요. 태아보험 그때 형수님이랑 해요.”

그 말이… 나는 진짜로 약속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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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달쯤 지나 다시 연락했다.
태아보험이 리뉴얼된 시기였고,
그때의 나는 한 달 한 달 수입이 절실했다.

보험은 한 번 가입하면 오랫동안 보험료가 빠져나간다.
머리로는 알지만, 몸은 조급했다.

제안서를 만들려면 배우자 정보가 필요했다.
민국의 아내는 외국인이어서 동의받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물어물어 해결했고,
요청한 대로 빼달라는 것도 다 반영했다.

진땀을 빼며 만들었고
이제 계약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연락이 없어서 쎄한 마음에
보장분석 리포트를 확인해봤다.

이미 다른 보험사로
태아보험과 건강보험이 가입돼 있었다.

그 순간,
뒷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

뒤늦게 민국이 연락했다.

“죄송해요, 형수님…”

부족한 게 있으면 말해주면 넣어줄 수도 있었고 알아봐줄 수도 있었는데
아무 말도 없이 끝나버렸다.

계약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상처받은 건
믿었던 마음이 허공이 된 느낌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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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편이 내 편 들어줄 줄 알았다.

기량엄마 : “민국이 오라 해서 갔잖아요. 좋은 말도 해주고… 태아보험 한다길래 제안서 다 만들어줬는데 다른 데 가입했더라고요. 이게 말이 돼요?”
남편 : “왜 그랬대요?”

남편은 욕을 해주지도, 편을 들지도 않았다.
그냥 물었다.

그게 더 서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편이 차가웠다기보다
내 감정을 상대가 이해할 언어로 전달하지 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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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나는
호의와 거래를 구분하지 못했다.

보험설계사를 하려 했던 이유는 분명했다.
첫 유방암 수술을 겪으며
보험 준비를 제대로 못해 수술 후 바로 출근해야 했던 내가,
나처럼 모르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내가 절실하다고 해서
상대가 내 고객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걸 그때는 몰랐다.

호의는 호의고,
거래는 거래다.

호의가 거래가 되는 순간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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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받을 기대’를 몰래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민국이 응원해줬고
좋은 말도 해줬고
“그때 형수님이랑 해요”라고 했으니까.

마음 한구석에
그럼 나도 그만큼 받을 수 있겠지
라는 기대가 숨어 있었던 것 같다.

그 기대가 깨지니까
더 크게 서운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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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론은 이거다.

급하게 가려 하지 말자.
내가 조급해지면
호의도 거래로 만들고,
관계도 숫자로 만들고,
내 마음도 쉽게 부서진다.

나는 아직 서툴렀고
그래서 상처도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안다.

상대가 선택하지 않은 일을
배신이라고 부르기 전에
내 안에 숨어 있던 기대를 먼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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