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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전의기량 Jan 02. 2021

세월이 지나도 따라 다니는 내면 아이

어릴 적 나와 다시 만나다.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 알아준다"  내가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엄마에게 자주 듣던 말이다.  나는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묵묵히 일하면 언젠가 알아준다는 엄마의 말에  어떠한 일에도 거절 한번 없이  다 하려고 했다.


일에도 우선순위가 있고 모든 일은  다 할 수 없는 법인데 , NO라고 한 번도 말해 본 적이 없었다.

부서의 막내로 일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회사 모든 전화는 내가 다 받았고  퇴근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업무는 시작되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야근이 계속이 되면서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나는 야근하면서 나의 사수는 정시에 퇴근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었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데 인정해 주지 않는지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했다.





 연일 계속되는 야근, 누구에게 얘기할 수 없는 답답함   그 어떤 것도 확신 없는 회사생활이 어떤 것이 좋은 것지 모를 때쯤 남편이 찾아왔다.  비슷한 사람의 만남이었기에 더 많이 의지되었는지 모른다. 남편을 만나면서  회사생활의 어려움도 해결되는 듯했는데  힘들면 힘들다 얘기 못하고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려고 했던 나는 얼마 가지 못해  회사에 퇴직 의사를 밝혔다.   내가 퇴사 의사를 밝힐 무렵에는  내 예전 사수가 부서장이 되셨었고 중간 사수가 있었는데 그 사수가 관두면서  생긴 일까지 내가 다 도맡게 되면서 더 이상 이 회사에는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부서장과의 면담 , "  그동안 많이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며  후임을 뽑아야 하는 데 늦어졌었다.

일을 열심히 잘해서  대리로 승진시켜주려고 했는데 퇴사 의사를 밝혀서 안타깝다. 내가 밖에서 주임님 자랑을 얼마나 하고 다녔는지 몰라."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담담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마도  "일을 잘하고 있어서 승진시켜주려고 했다" 나는 그 한마디가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대화로  끝났을지도 모르는 일에 오래 다니던 회사와 이별을 하면서 나는  명치 깊은 곳에서 오래된 아픔이 도지는 것을 느꼈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께 받았던 상처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유복하지 못한 가정환경에서 언제나 부모님은 일을 하셔야만 했고 집안의 장녀인 나는 어린 나이부터 학교 다녀오면 온갖 집안일을 도 맡아해야만 했다.  아이들과 놀고도 싶지만 놀 수 없었고  저녁시간에는 엄마 장사일을 도와드려야만 했다.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예스'  '예스'는  어렸을 때부터  모든 것을 내가 다 해야만 하는 줄 알았던 만능주의가 몸에 자리 잡고 있어서 커서도 고치지 못하고 내면의 나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생겼던 아물지 못한 상처는 훗날 커서도 다른 사람을 통해  다시 체험하게 되곤 하는데 이것을 전이 감정이라고 한다.  과거의 경험의 현재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상대를 오해하게 만드는 현상이다. 나는  내 사수에게서 어렸을 때부터 느꼈던 전이 감정을 다시 기억하게 한 것이다.





전이 감정은 부모뿐 아니라  자녀, 부부 사이인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형제를 다르게 대하는 부모의 편애에도 대체로 전이 감정이 일어난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느냐 하지만 유독 아픈 사 손가락이 있듯이  우리 엄마도 어린 시절 경험을 통해 나와 내 동생을  다르게 대하는 듯했다.


여덞 남매에 막내로 자란 엄마, 부잣집 막내딸로 자란 엄마에게도 시련이 찾아온다.  할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기울어진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은 갈 수 없었고 할아버지에 이어 할머니까지 아프고 나신 이후  꿈을 포기하는 대신  결혼을 해야만 했다.   어려운 시절에는 고등학교 가는 것도 부모님의 정성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는데 다섯 자매 중에 모두가 갈 수 없는 고등학교를  엄마가 졸업한 것도 보이지 않은 이모들의 시샘을 이겨내어 가능했던 일이다.   고등학교도 갈 수 없을지 몰랐는데 보란 듯이 졸업한 것을 보면 엄마는  다른 이모들보다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모들은 다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고 엄마는 하루 먹고사는 것도 걱정하는 집에서 돈에 대해 매일 매일 전전긍긍하고 살았기에 이모들과 만나는 것을 피하기도 했었다.


어릴 적부터 돈에 대한 강박관념이 어느 집보다도 심했던 나는  아이를  낳으면서 엄마와 함께 살았는데  내 몸이 힘들어 쓰러질지언정 아이를 봐주는 엄마의 생활비는 안 드리면 안 된다는 책임감에 일을 해야만 했다.  한 번도 엄마에게 생활비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매달 들어가는 돈에 일을 포기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살기 빠빴는데......  이런 나에게 크나큰 상처가 되는 일이 생기고 말았던 것이다.


몇 년 전에 엄마가 폐암 수술을 하셨었는데  경과도 좋았고 보험금도  탈 수 있었다.  평생을 고생만 하던 엄마에게 생긴 돈이란 선물 같은 돈이기에 엄마 인생에 도움이 되는 곳에 쓰이길 바랬다.   

4년 후, 엄마에게 찾아온 또 다른 병 뇌경색 각종 보험에 많이 들어 있었던 엄마인지라 병원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보험  엄마는 좋다는 보험이라 다 들었지만  결국 정작 필요한 곳엔 도움되지 않은 보험들 뿐이라 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찾다 찾다 보니  몇 년 전 폐암 수술로 받은 보험금 일부가 어디로 들어갔는지 알게 되었다.


나보다 엄마와 가족을 위해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매 순간 전전긍긍하며 살았었는데 정작 둘째 동생에게 큰돈이 보내졌던 것이다. 돈은 없어도 산다. 그러나 돈보다 서운했던 건 나만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그 사실을 안 순간 , 목 밑에서 올라오는 슬픔이 나를 주체하지 못하게 하기도 하였다.  엄마는 힘들게 산 나한테 왜 그랬을까?


엄마는 무의식 속에  나를 과거에 엄마를 힘들게 했던 이모로  둘째 동생을  집안의 막내였지만  언니들의 시샘 속에 버텨야만 했던 엄마 자신에게 하는  지난날 보상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오늘은 안 싸웠니?" 한 동안 시어머니께서 전화하시면  첫인사말 자락에 하시던 말씀이셨다.

내가 일을 쉬게 되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는데  오랫동안 하던 일을  놓고 아이와 온종일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코로나 19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하고 뛰어노는 것을 했어야 하는 아이가 초등학교의 묘미도 느껴보지 못하고 집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도 답답한 일인데 일이 인생의 전부처럼 느꼈던 사람이 집에서  온 발이 묶였다는 사실이 상실감을 크게 가져오게 되었다.


작고 크게 자주 부부싸움을 하면서  남편에 대한 실망감이 더 커져만 갔다. 오랫동안 회사에서 일하던 사람이 집에서 아이를 보며 집안일을 한다는 것을 이해해주려 하지 않고 자기는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산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으니 말이다.     코로나로 손발이 묶인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이혼한다고 했던가?   이혼하자고 소리도 몇 번을 얘기했다.  우리도 그토록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들인데 말이다.  


이혼을 할 때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 남편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우리 아빠는 16년 전에 돌아가셨다.  혼자 계시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돌아가신 것이  마음에 한으로 남아  있었다.   동생이 있는데도 외롭게 자란 나는 정에 굶주려 있긴 했지만 아빠의 죽음을 보고 쉽사리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비슷한 닮은꼴의 남자를 만나면서 몹시 끌리게 되었는데 바로 지금의 남편이었다.


나는 내 남편에게 전이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한테 받지 못했던 사랑을 남편이 채워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부부생활에서는 남편이 남편 역할만이라도 잘하면 된다.  남편에게 남편 그대로를 인정해 주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사랑까지 대신 채워주기를 바라는 것부터 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3교대 업무를 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이틀을 집에서 쉬는데  집안일을 하고 있는 나를 위해 집에서 쉬는 이틀은 도와주길 바랬지만 피곤해서 이틀 내내 자는 남편을 보면 목팉에서 올라오는 화를 해소하지 못할 때도 많았으니까.......   전이 감정은 특히 부부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미친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이 배우자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게 만든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받아주던  남편은 신이 아니었다.  


남편과 싸우고 나면 늘 하는 소리가 있는데 ' 남 탓은 그만 하고 당신 자신을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상처 받은 어린 시절의 내면 아이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남편을 탓하는 식으로 감정이 표출되었던 것이다.   세상일은 모두 이유가 있는 것인데 남편의 결점과 단점의 결혼의 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동안의 나는 어릴 적 나를 다시 만나려 하지 않았다. 인정하기엔 너무나  들추고 싶지 않을 만큼 아픈 일이기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면의 나를 돌아보지 않고 전이 감정을 살피지 않는다면 평생 내 안의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엄마를  보며  알게 되었다.  나도 누군가의 엄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기에  부정적인 감정을 다른 사람 때문으로 미루기보다  나 자신의 과거 상처에서 생겨난 것임에서부터 분리해서 생각하는 방식으로 해결점을 찾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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