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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전의기량 Jan 07. 2021

늘 사람과 함께 있어도 외로운 아이

어릴 적 나와 다시 만나다.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취미가 있었다.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것을  좋아했고  친한 사람들끼리  수다 떠는 것을 좋아라 했다. 그러나  나는 마음 한 구석이 늘 외로웠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께 따뜻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랐기에 조금만 누가 잘해주면 좋아라 했고 헤어짐을  두려워했다.  


내가  처음 짝사랑을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였다. 

엄마랑 따로 살았었지만   배워야 좋은 곳으로 취직할 수 있다며  엄마가 힘들게 번 돈으로 나는 고등학교 수업시간이 끝나면 자격증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름도 모를 부기부터 시작해서  워드프로세서, 컴퓨터 활용능력, 정보처리 기능사, 정보기기 기능사, 컴퓨터 그래픽까지  자격증이라는 자격증은  다 취득을 했는데 이 모든 자격증을 취득할 수 었던 건 학원 선생님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다.    


하나하나 친절하게 알려주셨고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선생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격증 공부를 하게 만들었고 집에 있는 시간보다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 일 년이 지나고  학년이 바뀌어 학원에 갈 수 있는 일이 줄어들게 되었고 학원 선생님은  새로운 학생들을 맞이 하기 바빴는데  당연한 일인 것을 선생님의 그 모습을 보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허전함이 정도를 넘쳐서 집에 와서 펑펑 울기도 했는데  어쩌면 선생님은  학생이 학원에 다니는 동안 많은 자격증을 취득해야 학원도 알리고  선생님 실력도 인정받을 수 있기에  학생이 학원을 잘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는 거였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때 학원 선생님을 시작으로 이후에도  여러 번 나의 짝사랑은 계속되었다. 

조금만 누가 잘해주면 좋아하기 일쑤였고,  가슴앓이를 하고 혼자 포기했던 적도 많았으니까......

늘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  순간순간 외로움을 느끼고  혼자 사랑임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안고 살았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과거 엄마가 그랬듯이 주위의 사람들이  내 곁을 다 떠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홀로 서기를 두려워하면서  무엇을 하면서도 문득문득 뼛속 깊이 외로움에 사무쳐서 살았다. 







나는 하루 24시간을 48시간처럼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  회사와 집을 구분하기는커녕 일만 하는 워커홀릭으로 내 머릿속에 온통 일뿐이었다.  회사일이라면 누가 먼저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아서 챙겨 일하는 사람이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편했을지 몰라도 난 분주하게 바쁘게 살았는데 마음 한구석엔 외로움에 

사무쳐 있었다.  주위에  지인들이 날 보면 대단하다 할 정도였으니까  아마도 개인의 삶과   회사의 삶을 구분 짓지 못하며 한쪽만 매어 사는 내가 안타까워서 얘기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보면 외롭지 않은 아이가 왜  그토록 일에 매진하면서 살았을까? 


가족은 우리가 처음 태어나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곳으로  가족 안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감정을 경험하였는가를 평생 동안 간직될 감정을 고정시키게 만드는데 어린 시절 무던히도 외로웠던 탓에 외로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항상 무언가를 하며 마음을 달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나를  바라봐 달라고 묵언으로 말하면서  하루 24시간을 48시간처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많은 노력에도 외로움을 떨쳐지지 못했다.   


가족관계를 통해 인생을 살면서 수없이 형성하게 될 대인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과 기대를 갖게 되는데 이것은 친구, 사회생활, 결혼생활 등 여러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어릴 적 가족관계가 어른이 되어서까지 인간관계를  그대로 모방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외로웠던 어린 시절이 커서까지 영향을 주면서 일상 속에서도 외로운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는데   늘 다른 사람 탓만 하며 내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을 뿐 이 외로움이 내 안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지금은  심해진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도  마음 편히 만날 수 없지만  회사를 다니지 않은 후부터는 한 동안 사람들 만나는 것을 기피하기도 했었다.  남편이 집에만 있지 말고  밖에 가서 사람들도 만나고 바람도 쐬고 오라 했지만 나가고 싶어라 하지 않았다.  나가면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 비교되는 것 싫었고 성공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  힘들었다.  그 자리에 있으면서 열등감을 느끼는 나 자신이 외롭고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내 나이 28살에 나는 첫 번째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그때도 인천에서 삼성동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는데  야근이 많아지면서  스트레스도 심했고 수술까지 받은 이후에는  2시간 걸리는 출퇴근을 하기엔 무리라고 판단했기에  수술 이후에는 동생이 결혼해서 살기 시작한 동네에 전세방을 얻어 혼자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집에 있을 때도 엄마는 늘 일하느라 바빴고 막냇동생은 막냇동생대로  나는 나대로 일하느라 서로 만나지도 못하는 집에 살면서도  외로웠지만 아무도 없는 빈방에 혼자 살기란 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언가 일에 열중하면서도 가슴 한구석 곳이 뼈가 시리게 외로웠던 나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친한 친구에게 소개팅 주선을 부탁했고 여러 명의 사람들 중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혼 후에도 고독과 외로움은 여전했다.  남편과 갈등이 생기면 정서적으로 깊은 단절이 찾아왔다.  


우리는 대게 자신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거나 상처를 받을 때가 많다.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에 따라 내가 받는 상처의 강도는 세진다. 한 번은 시어머니와 나와의 전화통화 내용을 남편이 듣고 있더니 왜 그렇게 생각 없이 얘기하냐고 말하는데  상처 받으실만한  말이었는가 했었다. 별거 아닌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으시는 어르신분들은 언제 외로움을 제일 많이 느낄까. 바로 애지중지 하며 키웠던 자식이 다 컸다고  이제 자신을 배려하지 않았을 때이다.  직장상사나 동료, 애인이나 배우자 등 나에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로 인해 크게 상처를 받고 외로움과 불안을 느낀다. 특히  어린 시절의 부모가, 결혼 후에는 배우자가 그 역할을 맡는다.


동생이 먼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살았었는데 내가 결혼한다니 "  외로움을 달래러 달라지는 것은 없다며 돈 벌 능력 있으면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라 했다."   그때는 동생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결혼해보니 남편의 가족들이 더 생겼다는 것 말고는 정작  사라지길 원했던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고 더해졌을 뿐이지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외롭지 않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면 동생 말처럼 돈 벌 능력이 있으면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외로움의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제일 중요한 것은 내 안의 나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세상일이 숨 가쁘게 돌아간다고는 하지만 지나고 보면  아무 이유 없이 생겨난 일들이 아니었다.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태어나 지금에 자라기까지  어릴 적 맺은 인간관계의 굴레가 커서도 반복되는 데  자신을 인정하기 싫어서 지나쳐버리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외로움의 저주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알고 보면 대단한 것이 필요한 게  아니라 외롭고 서글펐던 어린 시절 나를 만나 마음으로 감정으로 인정해 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따라오던 외로움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불안은 잘못된 생활습관처럼 반복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외로움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고 외로움의 저주에서  단숨에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체를 알고 나면  같은 감정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자신이 인지하고 변하려고 노력하기에 모든 반응을 감성적으로만 받아들였던 예전과는 달리 자신이 자기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시키고 조금씩 컨트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엄마가 아프면서  나를 나답게 인정하는 것이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알게 되었다.  지난날의 상처로 현재의 내 감정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나를 나답게 인정하는 것부터 치유는 시작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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