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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달리다

로망과 달랐던 제주 러닝

by 해루아 healua

2박 3일 제주도 여행이 시작됐다. 시어머님 환갑을 겸한 가족 여행이라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첫날부터 작은 사건이 터졌다. 우리는 김포에서, 시부모님과 아가씨는 김해에서 출발해 제주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도착하자마자 어머님께 전화가 온 것이다. 아뿔싸, 아가씨 지갑이 실종됐다는 소식이었다. 순간 남편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분위기가 어수선했지만, 나는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다. 첫날 제주는 비가 내리고 흐릿했고, 주차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다행히도,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 자리에 지갑을 떨어뜨린 덕분에 분실물 센터에서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그날 저녁에는 지갑 사건도 잊게 할 만큼 맛있는 녹두와 삼, 야채가 가득한 닭도가니를 든든히 먹고, 저녁엔 어머님 환갑 이벤트를 몰래 준비해 용돈 케이크와 풍선, 편지, 손수 만든 라탄 가방을 선물로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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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제주 여행은 남편과의 둘만의 여행이 아니었기에 조금의 긴장감이 있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은 에너지 방전으로 숙소에 오자 마자 바로 침대에 쓰러졌고, 마지막 날 아침 달리기를 기약했다.


셋째 날 아침 7시 40분, 서둘러 모자와 옷만 챙겨 입고 숙소 밖으로 나와 뛰기 시작했다. 제주도의 5월 날씨는 선선하고 비가 와서 춥기도 했지만, 뛰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다. 첫 브이로그를 담고 싶었던 나는 새로 산 짐벌 캠을 들고, 달리는 우리의 영상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우리가 뛰기 시작한 지점부터 이미 많은 러너들이 있었다. 요즘은 러닝이 일상 취미인 듯, 모두가 각자의 길 위를 달리고 있었다.


산방산


우리가 뛰는 코스는 해변과 맞닿아 있는 평지 길이었다. 뛰는 순간 제주도만의 풍경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발소리와 숨소리, 그리고 새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순간들. 이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평소 놓치고 있던 내면의 소리, 혹은 잊고 지냈던 감각들을 다시 일깨울 수 있었다. 아주 짠 바다 향이 났고, 뒤로는 웅장한 산방산이 보였다. 산방산은 가까이서 보면 정말 압도적이다. 중국의 장가계와 비교할 순 없지만, 커다란 종 모양의 독보적인 느낌이 살아있다. 그래서 진시황도 산방산을 두려워했나 보다.


문득 산방산의 유래가 궁금해졌다. 옛날 한 포수가 한라산에 사냥을 나갔다가 실수로 산신의 몸을 활로 쏘았다. 노한 산신은 손에 잡히는 대로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던진 것이 날아와 '산방산'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웅장한 산방산이 가까이 보이는 곳에서 뛰는 기분이 너무 설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숨이 가빠오고 온몸이 무거워졌다.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을 왕복하자 숨이 더 거칠어졌다.



KakaoTalk_20250529_232050013.jpg 제주도 러닝

3.07km 완주. 나의 호흡이 너무나 거칠어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마침내 머리까지 어지러웠다. 순간 주저앉아 몇 분 동안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기대했던 로망의 제주도 러닝과 달리, 뛰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메슥거림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후 미지근한 물 한잔을 마시니 다행히 호전되었다. 그리고 짐벌캠을 확인해 보니, 나의 울렁거림을 증명하듯, 영상도 초점이 맞지 않아 빙빙 돌았다.


러닝 중 예상치 못한 고르지 않은 길, 혹은 잠시 멈춰 서서 풍경을 감상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우리의 삶이나 글쓰기도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시작하기보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들을 마주하며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완벽할 필요 없다. 그저 불완전함 속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때론 숨을 고르고 멈춰 서서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어쩌면 그 모든 순간들이 미래의 진짜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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