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민우야. 우리 당분간 떨어져 지내야 해” 엄마가 말했다. 그때는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엄마는 엄마 친구의 가게를 도와줘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통보였지만 며칠 동안 엄마와 아빠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으니까. 이따금 방에선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고 아빠는 말없이 밖으로 나가 몇 시간이 지나서야 들어왔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지고 궁금했지만 물어보기가 무서웠다. 방 안에 나보다 2살 어린 여동생과 틀어박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인 척을 했다.
꽤 오랫동안 살았던 집을 비우는 건 순식간이었다. 처음 보는 아저씨들이 우리 가족의 쉼터에 들어와 물건들을 기계처럼 빼서 나갔다. 이사를 가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학교를 갈 준비를 하며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가족사진을 가방에 챙겨 넣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이 아닌 할머니 댁으로 갔다. 이제는 여기가 나의 집이었다.
하루아침에 많은 게 변했다. 나의 방은 사라졌고 방 한 칸에 아빠와 나 그리고 여동생이 함께 지내야 했다. 할머니는 우리를 보며 말없이 담배만 피우셨고 알 수 없는 단어들을 내뱉었다. 아마 욕 비슷한 단어들이었던 것 같다.
많은 것들이 창고에 처박혔다. 방 한 칸에 걸맞은 물건들만 가져와야 했으니까. 영어 선생님이었던 아빠의 책들과 책상 그리고 컴퓨터 정도만이 살아남았다. 침대도 사라졌고 나의 책상도 사라졌다. 쓸모없다며 버리라고 잔소리를 들었던 장난감 비슷한 물건들도 전부 사라졌다. 머리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짐을 싸들고 말없이 한참을 나와 여동생을 껴안고 있었다. 아주 예전에 내가 집에서 달고나를 해 먹는다며 설치다가 손가락에 화상을 입었을 때 보았던 그때처럼 엄마의 표정에는 빛이 없었다.
“조만간 보러 올게, 그때까지 동생 잘 챙기고 있어. 알았지?”엄마의 말에 여동생은 울음을 터트렸다. 우는 여동생을 두고 엄마는 뒤를 돌았다. 나의 기억이 왜곡되었는지 모르지만 5분 정도 되는 일직선의 거리를 돌아나가는 동안 엄마는 단 한 번도 우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여동생의 울음소리는 더 커졌고 나는 꾹 참았다. 아마 엄마 역시 울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갑자기 할머니 댁에 살게 되었다. 가방 속에 숨겨둔 가족사진을 꺼내어 아빠의 책상 위에 조심히 올려놓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우리 가족의 얼굴이 어쩐지 어색해 보였다. 거실에서 할머니의 한 숨소리가 방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부도’라던가 ‘사기’ 같은 단어들이 들려왔다. “그러게 왜 쓸데없이 도와줘서는...”할머니는 울고 계셨는지 화가 나신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나의 삶은 많은 게 변할 것이라고 느꼈다. 울다 지쳐 잠든 여동생은 옆에서 잠에 들었고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노란 가로등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어딘가로 가고 있을 엄마를 생각했다.
나의 모든 기억은 이날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