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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을 Jan 23. 2020

과거의 기억은 행복보다는 불행에서 시작된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민우야. 우리 당분간 떨어져 지내야 해” 엄마가 말했다. 그때는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엄마는 엄마 친구의 가게를 도와줘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통보였지만 며칠 동안 엄마와 아빠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으니까. 이따금 방에선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고 아빠는 말없이 밖으로 나가 몇 시간이 지나서야 들어왔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지고 궁금했지만 물어보기가 무서웠다. 방 안에 나보다 2살 어린 여동생과 틀어박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인 척을 했다. 


 꽤 오랫동안 살았던 집을 비우는 건 순식간이었다. 처음 보는 아저씨들이 우리 가족의 쉼터에 들어와 물건들을 기계처럼 빼서 나갔다. 이사를 가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학교를 갈 준비를 하며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가족사진을 가방에 챙겨 넣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이 아닌 할머니 댁으로 갔다. 이제는 여기가 나의 집이었다. 


 하루아침에 많은 게 변했다. 나의 방은 사라졌고 방 한 칸에 아빠와 나 그리고 여동생이 함께 지내야 했다. 할머니는 우리를 보며 말없이 담배만 피우셨고 알 수 없는 단어들을 내뱉었다. 아마 욕 비슷한 단어들이었던 것 같다. 

 많은 것들이 창고에 처박혔다. 방 한 칸에 걸맞은 물건들만 가져와야 했으니까. 영어 선생님이었던 아빠의 책들과 책상 그리고 컴퓨터 정도만이 살아남았다. 침대도 사라졌고 나의 책상도 사라졌다. 쓸모없다며 버리라고 잔소리를 들었던 장난감 비슷한 물건들도 전부 사라졌다. 머리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짐을 싸들고 말없이 한참을 나와 여동생을 껴안고 있었다. 아주 예전에 내가 집에서 달고나를 해 먹는다며 설치다가 손가락에 화상을 입었을 때 보았던 그때처럼 엄마의 표정에는 빛이 없었다. 

 “조만간 보러 올게, 그때까지 동생 잘 챙기고 있어. 알았지?”엄마의 말에 여동생은 울음을 터트렸다. 우는 여동생을 두고 엄마는 뒤를 돌았다. 나의 기억이 왜곡되었는지 모르지만 5분 정도 되는 일직선의 거리를 돌아나가는 동안 엄마는 단 한 번도 우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여동생의 울음소리는 더 커졌고 나는 꾹 참았다. 아마 엄마 역시 울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갑자기 할머니 댁에 살게 되었다. 가방 속에 숨겨둔 가족사진을 꺼내어 아빠의 책상 위에 조심히 올려놓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우리 가족의 얼굴이 어쩐지 어색해 보였다. 거실에서 할머니의 한 숨소리가 방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부도’라던가 ‘사기’ 같은 단어들이 들려왔다. “그러게 왜 쓸데없이 도와줘서는...”할머니는 울고 계셨는지 화가 나신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나의 삶은 많은 게 변할 것이라고 느꼈다. 울다 지쳐 잠든 여동생은 옆에서 잠에 들었고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노란 가로등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어딘가로 가고 있을 엄마를 생각했다. 


 나의 모든 기억은 이날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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