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과 수용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2015년 3월.
조울증이 모든 것을 집어 삼켰을 때 내 모든 일상은 무너져내렸다.
졸업학기에 그것도 복수전공을 하던 중에 막무가내로 휴학계를 던지고 뛰쳐나온-극심한 조증기라 졸업학기고 복수전공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보였다- 나는 이듬해인 2015년 1학기에 복학을 했다.
나 스스로도 인지 능력이 떨어지고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바닥을 기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예전의 나의 모습을 생각하며 다시 학교에 발을 딛었다.
하지만 상황은 내 생각보다 심각했다. 나는 교수님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느리게, 그것도 아주 느리게 재생되는 비디오나 노래처럼 느껴졌다. 교수님의 말은, 단어와 문장은 내 귀로 들어와 뇌를 잠깐 건드리고 그대로 빠져나갔다. 내 생각의 속도는 교수님의 말 뿐만 아니라 주변 세계의 흐름을 쫓아갈 수 없었고 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실망감과 좌절감을 넘어 공포를 느꼈다. 내가 아등바등 애를 써서 쌓아올린 탑 - 우수한 성적과 그로 인해 쟁취한 복수전공, 심리학자와 강단에 서겠다는 목표 등등 -이 와르르 무너지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수강신청 정정기간이라 대다수의 수업이 오리엔테이션만 하고 끝났다. 짧게는 10여분 내에 끝났던 수업이지만 그것도 내게는 벅차서 집에 가는 길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집에 가자마자 잠에 빠져들었고 아침에 겨우 일어나 다시 학교에 가야한다는 사실에, 내가 철저한 무능력자임을 깨닫게 해주는 그곳에 가야한다는 것에 절망했다.
결국 나는 지옥같은 한 주를 보내고 또다시 휴학계를 내러 가야 했다. 아직도 그날이 기억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옅은 추위를 느끼며 나는 내 인생의 암흑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 생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우울증은 나날이 심해졌다. 아침에 겨우 일어나 아침-이라고 하기엔 적은 견과류 조금과 우유-을 먹고 약을 먹은 다음 다시 잠에 빠졌다. 점심 먹으러 일어났다가 또 자고, 저녁 먹고 또 자고..... 먹고 자고는 게 전부인 일상이 시작되었다.
어느 정도 약에 적응하자 전보다 잠은 덜 잤다. 그래봤자 발병 전에 비하면 많았지만, 그래도 낮에 뭔가를 할 시간이 생겼다.
그래서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책을 읽으려고 했다. 조울증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고등학생 시절 꿈꿨던, 그리고 전공을 심리학으로 선택한 후에도 간직했던 작가의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치료를 받으며 회복이 되면 내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
하지만 내 소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책상에 앉아 책을 편 순간, 나는 다시 강의실에 앉아 교수님의 말을 못따라가 갔던 때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말이 아닌 문장들이 그저 스쳐지나갔다. 한 줄을 겨우 읽으면 방금 읽은 문장이 생각이 안나거나 이해하지 못해서 다시 이전에 읽은 부분을 읽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이 책이 예전에 몇 번이나 읽었던 책이었던 것이다. 집중력도 바닥이었고 기억력은 파도 앞의 모래 같았다.
나는 절망의 끝에 다다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니, 먹고 자는 건 할 수 있었으니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 먹고 자는 것만 한다는 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같았다. 나는 내 삶의 목표와 목적, 의미를 모두 상실했다.
얼마간의 노력 - 반복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것 등등 -을 하고나서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달은 뒤에 나는 이 무력감과 절망을 해소하기 위해 게임을 했다. 하루종일 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컴퓨터 앞에서 게임을 하면서 보냈다.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무언가가 게임이었기에 재미있기에 한 게 아니라 - 조금은 있었겠지만-살아있음을, 내가 쓸모있는 존재라는 걸 느끼기 위해 강박적으로 게임에 몰두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노력은 그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일일 뿐이었다. 하루를 마감하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을 때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허무함과 공허함, 좌절과 절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때문에 나는 내일의 해를 볼 수 없길 바랬고 극심한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이런 시기에 내가 가장 공감했던 노래가 혁오의 <위잉위잉>이었다. 가사 하나하나가 다 내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출근하고 학교가고 하는 시간에 나는 겨우 일어나 밥을 먹고 그저 게임만 하다 하루를 다 보냈다. 버스를 탈 일도 없었고 남들은 취업을 하거나 취업 준비를 하고, 동기들은 대학원이나 수련을 하면서 커리어를 위해 노력하는데 나 혼자 도태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의미없는 하루의 반복. 실패자. 낙오자. 다들 자기 갈 길을 바쁘게 가고 있는데 나혼자 멈춰서서 그들의 걸음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 눈에 다른 사람들은 토끼처럼 빨랐고 나는 한 걸음 내딛는 것도 힘든 거북이처럼 느껴졌다.
29번째 생일이 지난 얼마전, 나는 다시 이 노래를 들었다. 브런치북 프로젝트를 실패하고 나서 느낀 나에 대한 실망감과 좌절감이 이 노래를 다시 생각나게 했다.
여러가지 악재가 겹쳐서 완수하지 못했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느끼는 이 씁쓸함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나마 어제 상담을 받으면서 어느 정도 정리했기에 마음을 다잡고 느린 걸음이지만 천천히 다시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