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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ail of Argo

지금은 겨울을 걷는 중입니다

그리고 또 잠시 뒤에는 다른 계절을 걷고 있겠죠

by Argo


"감정 기복은 한 마디로 제어를 벗어난 감정이다. 한 사람의 감정과 기본적인 기분 표현에서 제대로 조절이 불가하다는 것이다"(출처 : 원더풀 마인드)


감정기복은 조울증을 겪는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겪는 문제다. 감정기복에 대한 위의 설명안에 왜 조울증 환자들이 괴로움을 겪는지 잘 드러나 있다.



우리(조울증 환자)는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다. 인지치료에서는 생각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이 바뀌면 감정도 바뀐다고 이야기 하지만 조울증에서 이 말은 맞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어떤 생각이나 사건이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생긴다.


밑도 끝도 없이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온 세상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경험을 한다. 무기력해지고 세상만사가 덧없이, 그리고 귀찮음으로만 느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활력이 넘치면서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싶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은 자신감이 넘친다.

문제는 이러한 감정기복이 하루에, 심하면 한 시간 안에 반복된다는 거다.


조울증 환자가 겪는 감정기복은 매일 사계절을 겪는 것과 같다. 생동감 넘치는 봄, 열정으로 타오르는 여름, 뜨거움과 시원함이 있는 가을, 그리고 오로지 추위와 차가움만 있는 겨울. 다른 사람들은 일정한 계절을 걷고 있는 반면에 조울증 환자는 하루에도 여러 계절을 왔다갔다 한다. 아침에는 봄이 었다가 낮에는 여름, 저녁에는 겨울. 어떤 날에는 순서 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계절에 따라 우리가 옷을 바꿔 입듯, 감정기복도 그때의 계절에 맞춰 모든 게 변한다. 생각도, 기분도, 반응도 각 계절에 맞게 달라진다. 여름에는 활력이 넘쳐서 활동량도 많아지고 일도 많이 벌린다. 자신감도 넘치고 무엇이든 해낼 거 같다. 자존감도 높아지고-조울증은 조증과 우울증에 따라 자존감이 변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자존감에 대한 지식을 조울증에 적용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 겨울이 오면 모든 것은 회색으로 보인다. 유채색 안경을 쓰다 무채색 안경으로 바꿔낀 느낌이랄까. 우울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질 만큼 매서운 추위가 느껴진다. 마치 동상에 걸렸을 때 심한 경우 감각 자체가 사라지는 것처럼 우울 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저 세상사가 덧없이 느껴지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흩어지는 모래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전에 나를 즐겁게 해줬던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내게 의미가 없다. 무감각과 공허함이 지배하는 계절, 겨울이 온 것이다.



몇 년 동안 조울증의 감정기복을 경험하면서 나는 내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기 시작했다. 조금 기분이 좋고 삶에 대해 '두근두근'함이 느껴진다면 '지금은 봄이구나', 무언가 막 하고 싶고 자신감이 넘칠 때는 '여름이 왔네', 여름의 열정이 조금 식고 차분하게 사색한다면 '이젠 가을이구나', 그리고 온 세상이 잿빛으로 보일 때는 '지금은 겨울이구나' 이렇게 말이다.


내 감정은 지금 겨울이다. 아직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추운 초겨울이다. 내가 겨울을 싫어하는 이유는 겨울 자체의 힘듦-추위에 약하고 안 좋은 관절이 더 아픈 것-도 있지만, 내면의 계절이 겨울일 때 외부 세계의 계절도 겨울이면 그 고통이 더 심화되기 때문이다.

내면의 계절이 겨울이라고 해도 외부 세계의 계절이 다른 경우에는 쉽게 그 추위를 물리칠 수 있다. 내 안의 추위를 느끼다가도 눈을 돌려 밖을 보면 화창한 햇빛이나 화사한 꽃들을 보며 따듯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두 겨울이 만날 때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그저 두툼한 외투를 여미고 묵묵히 걸어갈 뿐. 어찌보면 나머지 계절은 겨울이라는 잔인한 계절을 버티기 위한 에너지를 비축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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