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Hubris

모자람과 지나침 사이에서

독서가 늘 다다익선인 것은 아닙니다

by Argo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필사 9일째.
어제 친구랑 늦은 생일 축하를 하고 배드민턴을 열심히 쳤더니 꿀잠을 자버렸다. 저녁잠을 제대로 잔 탓에 저녁도 늦게 먹었고, 그래서 이제서야 필사를 했다.
책을 멀리하라는 아우렐리우스의 조언은 선듯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최근에 독서 모임이나 필사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1권에서 스스로 여러 철학자들의 책을 통해 많은 유익을 얻었다고 말한 아우렐리우스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아우렐리우스는 아마도 지나친 독서로 스스로를 망치는 결과에 대해 경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흔히 독서를 권장하면서 ‘부족함’만 집중하지 ‘지나침’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지나침은 모자람보다 못하다”라는 말이 있듯, 독서에서도 ‘지나침’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지나침이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지나침이란 독서가 삶보다 앞설 때, 정확히 말하면 습득한 지식이 그저 지식으로만 남거나 소화시키기도 전에 지식만 쌓는 경우를 말한다. 즉 지식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독서를 하는 것이고 삶을 변화시키거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사변적인 수준에서 머무르는 상황이다.


우리가 애초에 독서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의 선조들 - 특히 선비들-은 학문을 수양으로 생각했다. 그들에게 학문을 한다는 건 입신양명보다 자기 수양을 위한 수단이었다. 중용 23장의 말처럼 자기를 먼저 갈고 닦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감화시키는 수기치인의 자세가 우리 선조들이 책과 학문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렇기에 지나치게 책에만 몰두하고 그저 지식을 쌓는데만 열을 올리는 태도는 스스로에게 무익할 뿐더러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실천과 유리된 지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뿐더러 그 지식이 공공선을 해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타인과 집단, 사회에 해를 입히는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대게 고학력자, 흔히 말하는 엘리트인 경우가 많다. 누가 잡느냐에 따라 환자를 살리는 도구가 될 수도, 타인을 해치는 도구가 될 수 있는 칼처럼, 지식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고 나와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


내 경험도 아우렐리우스의 견해와 비슷하다.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왔고 그러다보니 독서가 삶의 일부가 되었다. 무언가 알아가는 게 즐거웠고 새로운 지식들이 쌓일 때마다, 지식의 크기가 커질 때마다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순수한 즐거움이 남을 재단하는 잣대가 되기 시작했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사람의 지적 수준과 지식의 정도만 측정하고 판단하고 있었다. 머리만 커져서 옹졸한 나의 세계와 시야로 사람들을 구분지었다.
이런 내 모습을 깨달았을 때, 나는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내가 쌓아올린 지식이 남을 판단하는 도구로만 쓰인다는 게 충격이었고 삶은 그대로인데 머리에 있는 지식이 마치 내 전부인듯, 아는 것만으로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부족한 점을 개선했다는 태도에 실망했다.


그래서 나는 얼마전부터 전보다 적게 읽고 실천에 집중하는 법을 훈련중이다. 아무리 많은 펜을 가지고 있어도 글을 쓸 때 쓸 수 있는 펜은 하나에 불과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많은 펜을 수집하는 게 아니라 적합한 펜을 찾아 쓰는, 실천이 중요하다.


오랜만에 햇빛을 맞으며 바람 속에서 운동을 하고나니 기분이 상쾌해지고 그간 덮었던 우울의 이불이 벗겨진 느낌이다. 운동 그 자체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비록 엉덩이 근육이 땡기긴 하지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걸 얻었으니 만족, 또 만족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