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 시작이 아니듯 이혼도 끝이 아니다
부모님이 이혼했다.
1월 말에 아빠의 폭력 사건으로 시작된 이혼 과정은 9월 초 합의 이혼으로 끝을 맺었다.
올해 초에 결혼에 대해 쓴 글이 조회수가 꾸준히 올라가는 걸 보면서 사람들이 결혼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큼 결혼이 한 사람에게 중요한 문제라는 뜻이리라.
내가 심리학과에 간 이유 중 하나는 가족 문제였다. 정확히 말하면 아빠로부터 비롯된 여러 트라우마와 가정 불화, 나를 둘러싼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나는 심리학을 통해 내 고통과 문제를 해결하기 원했고 우리 가족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길 희망했다. 그리고 이 바램은 절반만 성공했다.
대학교 초기에 나는 아빠가 왜 그런 행동을 하고 그런 삶을 살 수 없었는지 이해하고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데에는 지난날의 경험과 환경이 큰 영향을 미친다. 태어날 때부터 뇌에 문제가 있지 않는 이상 대게의 경우 인생의 각 시기에 겪은 일들이 부정적인 행동의 이유가 된다. 아빠는 그런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나는 아빠를 이해하고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이해를 위한 노력 가운데서도 이런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아빠가 그런 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지금의 잘못과 우리 가족의 고통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나와 우리 가족이 아빠를 위해 노력한 일들과 희생들은 과연 가치가 있으며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언제까지 우리가 그러해야 하는가.
솔직히 이혼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어릴 때부터 지속되어 왔다. 아빠는 엄마와 크고 작은 전투 가운데서 걸핍하면 이혼하고 나가라는 말을 내뱉었고 그럼에도 엄마는 나와 형을 지키기 위해 숱한 굴욕과 어려움을 감당해냈다. 우리 형제가 아빠의 폭력과 잘못에도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엄마의 공이다.
대학교를 마칠 무렵, 나는 우리의 노력에 대해 그리고 나의 희생에 대해 회의가 들었다. 나는 우리 가족의 이혼을 막기 위해 중재자의 역할을 맡기도 하고 경제적인 어려움과 정신적인 고통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아빠가 제대로 된 수입이 없고 그나마 벌은 돈도 다단계나 허튼 곳에 퍼부어서 중고등학교 때부터 학비를 준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학자금 대출을 비롯해 각종 알바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장학금을 받기 위해 도서관 죽돌이로 살았다. 대학 시절을 돌아보면 제대로 놀아본 기억이 거의 없다. 집-학교-도서관-집 생활이 기본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빠는 그대로였다. 작은 부분에서의 변화는 있었으나 본질에서는 변화가 없었다. 나는 서서히 우리 가족의 운명이 이혼으로 기울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래도 이혼은 안된다는 생각에 엄마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했었다(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뒷통수를 한 대, 아니 두어 대 때려주고 싶다).
그러다 작년 여름, 나는 아빠를 포기했다. 엄마가 대상포진으로 고통 중에 있을 때 일본 선교를 간다며-그것도 자비로, 100만원이 넘는 돈을 들여 간다고 했다. 매년 선교를 간다며 시간과 돈을 투자했고 우리 형편상 그 돈들은 매우 큰 금액이었다. 엄마는 치과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앞으로 틀니도 못할 거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그런 곳에 돈을 쓴다는게 가당키나 한가. 정작 자기는 온갖 건강보조식품을 먹으면서 말이다-아무렇지 않게 짐을 쌌다. 엄마는 그때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일본에 가면 이혼이라고, 정말 끝이라고. 그럼에도 아빠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리고 올해 초, 교회 학교에서 교사로-돈이 있건 없건, 우리가 아프건 말건 항상 교회 일을 멈춘 적이 없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아빠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좋다-봉사하면서 맡은 아이들을 초밥을 사주고 영화관과 놀이 시설에 데려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단순히 아이들에게 잘해줘서 그랬던 건 아니다. 그 아이들은 소위 ‘잘사는 집’ 아이들이었다. 정작 자기 자식들은 어릴 때 그렇게 해주지도 않았고 나는 조울증으로 고생하며 고통받고 있으며 엄마 또한 돈이 없어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인데, 그리고 형은 서울에 올라가 어떻게든 돈을 벌면서 적은 돈이나마 우리를 위해 쓰는데 어떻게 아빠라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는지, 자기 가족은 죽든 말든 오로지 교회와 자신의 건강에만 신경쓰는 모습을 보며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 이야기를 본인에게 직접 들었을 때-아주 자랑스럽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나는 아빠의 인생에서, 그리고 계획에서 우리 가족은 안중에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돌이켜보니 아빠는 무조건 자신의 계획이 우선이었다. 선교사가 되겠다는 실현불가능한-선교사가 될 수 있는 지식도 준비도, 그 무엇도 안 되어 있었다-미션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 가족을 고통 속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아빠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다녀야 했고 무려 14번이 넘는 이사를 다녀야 했다. 나는 초등학교를 세군데, 중학교는 두군데를 다녔고 그래서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 없다. 섬(제주도)과 산골(벌곡)에서 살면서 살을 에는 추위와 극한의 가난을 경험했고 남들은 좋다는 제주도가 내게는 악몽의 장소가 되었다. 형은 아토피로 10년 넘게 고생해야 했고 엄마는 소아마비가 악화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아마 엄마가 보다 좋은 환경에 있었더라면 아직까지도 다른 기구의 도움 없이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점차 이혼이 우리 가족에게 유일한 해결책임을 깨달았다. 아빠의 행동과 엄마와의 갈등은 내 조울증에 악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는 나의 입원이었다. 입원했던 병원의 의무기록지에는 예후에 대해 이렇게 써 있다.
“병전 기능이 우수해 향후 치료 결과가 좋을 수 있으나 가족의 불화와 지지체계가 나쁘기 때문에 예후가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빠는 내 조울증에 대해 아무런 인식이 없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 내 조울증에 대해 지분이 있음에도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은 것처럼-조울증이 생물학적인 원인, 뇌의 문제이긴 하지만 그것이 조울증으로 발전하는데에는 환경적 요인이 작용한다. 생물학적 원인에 환경적인 요인, 극도의 스트레스나 트라우마가 있는 경우 조울증이 완성되는 것이다-나를 탓하거나 엄마를 탓했다.
결정적으로 아빠가 엄마를 폭행했을 때 나는 이혼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행동에 나섰다. 이전에는 엄마에게 언어 폭력은 했어도 물리적 폭력은 없었기에-물론 나와 형은 물리적 폭력도 당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무차별적으로 맞고 집에서 쫓겨난 일은, 내가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 할 상처로 남았다. 이 일은 심각한 트라우마가 되어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내게 기억될 것이다-그나마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사건으로 나는 엄마를 살려야 겠다고 다짐했다. 아빠의 변화를 기다리다가 엄마가 죽는-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사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엄마의 정신 건강은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내가 조울증에서 조금 회복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30년 넘게 아빠의 폭력과 잘못을 감당했던 엄마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최악의 상태였다.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화를 조절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행동들이 보이고 기존에 내가 생각했던 엄마의 장점들이 사라져갔다. 그래서 나는 뇌진탕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엄마를 데리고 가정폭력 상담소와 응급실을 거쳐 관할 지구대에 갔다. 거기서 신고 접수를 하고 이와 관련된 진행 과정에 참여했다.
나는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일을 진행했다. 엄마는 그런 가운데서 종교적인 신념-엄마는 나와 달리 독실한 기독교인이기에 이혼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과 경제적인 문제-이 부분은 대게의 여성들이 이혼을 망설이는 이유다. 나와 엄마 또한 이 문제로 염려했고 그 염려대로 고생중이다-를 놓고 이혼을 포기할 생각도 몇 번 했으나 그럴 때마다 내가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아빠의 보복이 두려웠으나 나는 노예처럼 사느니 인간답게 하루라도 살다가 죽는게 낫다는 심정으로 적극적으로 이혼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아빠의 전화 번호를 차단했다. 그리고 아빠가 집에서 퇴거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누군가는 “그래도 아빠인데 너무한 거 아니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럴 이유가 충분하다. 아빠는 내게 지속적으로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며 나를 조종해 엄마의 생각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내가 조울증으로 심신의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에도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태도로 일관한 것이다. 나는 그런 아빠의 연락을 받을 때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결국 아빠를 차단했다. 그러고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아빠의 퇴거 후 한달 동안 나와 엄마는 불편한 편안함을 느꼈다. 30년 넘게 집에서 느꼈던 불안의 근원이 사라진 것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집은 단 한번도 편안하고 안전한 곳이었던 적이 없었다. 늘 집에 가면 오늘은 무엇 때문에 아빠와 엄마가 싸울까, 무슨 이유로 내게 폭력을 행사할까 걱정했다. 그러다 아빠가 없고 그런 상황들이 없으니 좋기는 한데 익숙했던 상황이 아니기에 이상했던 것이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자 지금의 안정과 평안이 익숙해졌다. 지금은 집이 너무나도 좋다. 이전에는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했던 집이 이제는 생각만 해도 좋은 장소가 되었다. 나와 엄마는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웃고 행복을 누린다.
결혼에 조건이 있듯 이혼에도 조건이 있다. 내게 이혼을 해야 하는 조건은 “인간성”이다. 가족 구성원의 인간성이 파괴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이혼해야 한다. 부모의 다툼을 지켜보는 아이는 군인이 전투 중에 겪는 트라우마와 같은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부모의 불화가 심각해 아이에게 악영향을 주는 경우, 부부 중 한쪽이 지나친 희생으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클 경우-대게 질병으로 나타난다-진지하게 이혼을 고려해야 한다.
사랑에는 희생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개개인의 인간성을 파괴해가면서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희생을 하면서 얻는 대가가 그만큼 가치가 있을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책의 제목처럼 사랑이라는 단어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이혼 과정 중에 나와 엄마는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나도 엄마도 상담을 공부하고-엄마는 가정폭력 상담소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다-주위의 사례를 보면서 이혼이 결코 끝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이혼은 똑같은 고통을 반복할 수 있다. 내가 참여했던 행위자 프로그램(법원에서 이혼 소송 중에 있는 부부에게 이수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에서 본 어떤 사람은 3번째 이혼이었는데 전 남편들과 현 남편 모두 심각한 폭력을 행사했고 그래서 이혼을 하게 됐다. 이혼은 절대 끝이 아니다. 행복한 결혼을 위해 우리가 준비하고 노력하는 것처럼, 행복한 이혼-행복한 미래를 위한 이혼 준비가 더 맞겠다-을 위해서는 그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고통스런 결혼 생활에서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의 인생에서 이전의 경험을 토대로 어떻게 살 것인지, 경제적인 문제와 인간관계-새로운 이성관계를 포함해-를 어떻게 할 것인지 등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부분이 많다. 엄마는 이런 문제들을 상담을 받으면서 해결하고 있다. 만약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리고 이혼을 했다면 무조건 상담을 받는 것을 추천한다. 혼자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미 과거의 생각과 행동의 틀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문제점을 발견하기 어렵고 객관성을 가지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문가의 도움을 통해 과거를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고 무엇이 나은 삶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알아야 한다.
나는 결혼과 가족이 중요한 가치이며, 한 개인의 인생에서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라는 걸 안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라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행복한 결혼 생활과 가족은 쉽게 얻을 수 없을 수 없다.
그러니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준비하고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