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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ail of Argo

조그마한 발진이 마음을 들었다 놨다

조울증도 서러운데 부작용 걱정도 해야하다니

by Argo

며칠 전 아침에 일어나 발목을 돌려주다-관절이 안 좋은 관계로 매일 일어나자마자 전신 스트레칭을 해준다-발목 근처에 난 조그마하고 빨간 점 하나가 보였다. 그 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몇 년째 먹고 있는 라믹탈은 양극성 장애에 쓰이는 약물이다. 데파코트랑 병용하다가 라믹탈만 먹은지는 어느덧 2년. 데파코트를 먹을 때-물론 다른 약의 탓도 있지만-무지막지한 부작용에 시달리다가 라믹탈만 먹게 된 후로는 기적적으로 부작용이 급감했기에 라믹탈만 먹는 지금-웰부트린도 먹긴하지만 우울증이 심할 때만 먹으므로 고정은 아니다-꽤나 만족하고 있다.


라믹탈은 데파코트나 리튬에 비해 양극성 우울증에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내 주된 증상이 우울증이기에 그런지 라믹탈은 그 역활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라믹탈에게도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건 바로 스티븐슨-존슨 증후군을 비롯한 피부 질환의 부작용이다.

검색해 보면 알겠지만 스티븐슨-존슨 증후군은 상당히 치명적이고 사망할 가능성도 있는 부작용이다. 때문에 라믹탈에 대한 주의사항을 보면 피부에 문제가 생길 경우 이것이 약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진단이 내려지지 않는 이상 약물 복용을 중지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때문에 나는 틈틈이 몸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피부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았나 점검한다. 그러다 발목에 생긴 이상한 점 하나를 봤으니 얼마나 마음이 떨렸겠는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며칠 고민을 하다가 혼자 걱정만 하고 있으면 나아지는 것도 없고 괜히 불안하기만 할테니 피부과를 가기로 했다. 오늘 아침 피부과를 향하면서 제발 부작용이 아니길 간절히 바랬다.

'이게 부작용이면 다른 약을 써야 할텐데 또 무슨 약으로 바꿔야 하지?'

'데파코트는 죽어도 먹기 싫은데'


마침 오래 전부터 다니던 피부과가 있어서 30분 정도 기다렸다가 의사선생님을 만났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피부를 보여드렸더니 그냥 알레르기 같은 거라고 말씀하신다. 그 순간 마음이 탁 놓였다.


의사 선생님은 정말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대게 약물로 인한 부작용들은 약물 복용 2주 이내에 나타나고 스티븐슨-존슨 증후군 같은 경우에는 몸통부터 여러 개의 발진이 나온다고 한다. 몇 년 동안 잘 먹고 있는 라믹탈이 지금에 와서 갑자기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은 매우 적다는 말이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을 짓누르던 짐 하나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역시 아는 것이 힘이다. 피부 발진이 라믹탈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잠시 우중충했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고 할까.


글을 쓰기 전, 저녁에 먹어야 하는 라믹탈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아침에 웰부트린과 함께 먹은 라믹탈은 왠지 모르게 돌멩이처럼 크고 무겁게만 느껴졌는데, 저녁에 먹은 라믹탈은 한없이 가볍기만 했다.


약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언젠가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조울증을 완치시켜줄 약물이 나타나기를. 그래서 그 약 한번만 먹으면 조울증에서 해방될 수 있기를. 더 이상 나와 같이 고통받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다소 비현실적인 기대를 해보고는 픽 웃고 물을 마져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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