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마지막, 한해의 끝인 오늘은 병원에 가는 날.
확장 공사가 끝난 병원은 이전보다 더 아늑하고 좋은 분위기였다.
예약 시간보다 20분 늦게 도착해서 그만큼 기다려서 진료를 봤다. 12월 들어서 불안불안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기에 의사 선생님 또한 내 상태에 대해 우려를 안고 있었다.
나는 솔직하게 지금의 상태를 말했다. 약간의 무기력함, 좋지 않은 컨디션, 자살 사고 등등. 이러한 원인이 무엇인지도 솔직하게 말했고 내가 먼저 약물 추가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작년에도 먹었던 웰부트린-양극성 장애에서 거의 유일하게 쓸 수 있는 우울증 약-의 복용이 나을 것 같다는 내 말에 선생님께서는 아빌리파이도 추가하는 걸 말하셨지만 내가 그 녀석에게는 안 좋은 기억이 있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아침에 웰부트린만 추가하는 걸로 끝내고 종전의 3주에서 2주로 줄여서 만나기로 했다.
모든 질환이 그렇지만, 정신질환에 있어서 약물치료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 어떤 치료보다 우선하는, 제 1원칙이라고 할까.
그렇지만 그만큼 환자들이 약물치료를 꺼리는 이유도 명백하다. 부작용. 여타 질환에서 쓰이는 약물에 비해 심각한 부작용들은 환자들이 약물치료를 거부하는 첫번째 이유다.
그런만큼 내가 약물을 추가한다고 선선히 말한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누군들 약을 더 먹는게 좋겠는가.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약을 더 먹지 않으면 증상이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약 하나 더 추가하지 않으면 더 많은 약을 먹어야 할 지도 모르며 이건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을 나중에 가래로 막아야 된다는 뜻이기에 약간의 주저함을 뒤로 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때때로 의사의 견해와 환자의 입장이 다를 때가 있다. 대게의 경우 환자는 의사의 말을 따른다. 물론 의사가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대체로 의사의 말을 따르는 게 좋다. 하지만 나 같이 고인물-장기 환자-의 경우 경험적으로 어떤 약물이 자신에게 맞는지 안다. 그럴 경우 솔직하게 특정 약물에 대한 허용과 거부를 명확히 하는 게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좋다. 왜냐하면 환자가 특정 약물에 대한 부작용을 인지하고 그것을 이야기해야 의사는 더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고 추후 약물 선택에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의사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 후에 약을 먹지 않거나-환자들이 의사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안하고) 약을 받은 후 약을 복용하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흔하다-불평하고 의사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는 차원도 있다.
정확한 치료뿐만 아니라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 향상을 위해 환자는 의사에게 솔직해야 하고 분명한 자기 주장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관계에서도 무조건 참고 수용하는게 능사가 아니듯이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그러니 혹시나 정신질환으로 치료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로 의사와 소통하는 것이 좋다. 의사라고해서 환자의 모든 것을 아는 게 아니며 의사는 해당 질환에 대한 일반적인-지금까지 누적되어 알려져 있는 환자들에 대한 공통적 속성- 지식과 경험적인 지식이 있을 뿐, 환자 개개인의 모든 증상을 아는 건 아니다. 즉, 의사는 환자가 말하는 만큼만 안다. 조울증이라고 해서 모든 증상이 같은 것도 아니고 환자마다 같은 약물에 대한 반응과 수반되는 부작용이 천차만별이기에 환자는 의사에게 정직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상태를 설명할 의무가 있고 의사의 말을 수용하되 자신이 그 말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있다.
물론 의사의 의견이 자신에게 맞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려면 자신의 질환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다른 질환보다 정신질환은 본인이 해당 질환에 대해서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 의사만큼은 아니더라도 준전문가 수준의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 나 같은 경우는 심리학을 전공했기에 다른 환자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이해도가 높다. 때문에 사실에 근거해 의사에게 말하는 게 더 쉽다. 의사와 함께 내 질환에 대해 이야기 할때 내 주관만을 기초해 일방적으로 밀어부치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 각자의 생각을 나누고 서로의 입장차를 좁힐 수 있다.
한해의 마지막에 약물 하나를 추가하는 게 조금은 꿀꿀하긴(?) 하지만 뭐 어쩌겠나. 살려면 그럴 수 밖에 없는데. 어느덧 5년차인 지금에는 나름 익숙해졌다. 내년에는 조금더 나아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