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을 위한 기독교 안내서>

루 윌리스의 <벤허> 서평

by Argo

한 나라를 이해하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그 나라의 문화를 아는 것이다. 특히 문학작품은 그 나라의 문화가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좋은 문학작품을 제대로 읽는다면 해당 국가에 대한 전문적인 책보다 더 많은 정보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벤허>는 기독교와 기독교인-더 나아가서는 ‘종교’의 본질에 대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역사 소설이자 종교 소설이다.




8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 흔히 말하는 벽돌책인 <벤허>는 동방박사들과 벤허, 예수의 삶이 교차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처음에는 동방박사들이 메시아를 찾아나서는 과정과 고대하던 메시아와의 만남이 등장하고 한동안 벤허의 삶, 그가 겪는 고난과 시련, 그리고 그것의 극복과 복수가 주된 내용을 이룬다. 벤허는 개인적인 복수심을 민족적 복수심, 즉 피지배자인 유대 민족이 지배자인 로마인에게 갖는 분노와 복수심과 연결해 민족을 구원하고 개인적인 야망을 성취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예수는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인데, 이런 벤허의 견해는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을 반영한다. 하지만 벤허의 의도와 목적과 다른 예수의 행동으로 인해 벤허는 혼란을 느끼고, 벤허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들이 기대한 예수, 즉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압제자인 로마인들로부터 유대인들을 구원하고 강력한 지상의 왕국을 건설할 ‘왕’이 아니라는 것에 실망하여 예수를 버릴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에 동조한다. 벤허는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건, 자신의 신념과 목표가 한순간에 무너진 사건 앞에서 생각의 변화를 경험하고 정치적인 ‘왕’, 자신의 야망을 채워줄 수단이 아닌 진정한 메시아로서의 예수를 받아들인다.




작가는 벤허와 그의 삶을 중심으로 다양한 민족(로마, 그리스, 이집트, 인도, 아랍 등)과 여러 인물(동방박사, 메살라, 이라스, 에스더, 예수 등)을 등장시키고 각각의 인물을 서로 비교하며 무엇이 옳은 지 밝히려고 한다. 즉 이 소설은 우리가 문학 시간에 배운 ‘고전 소설’의 냄새, 그 특유의 교훈적인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캐릭터가 매우 뚜렷하고 자석의 양극이라고 해도 될만큼 대립적이며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의 경계가 분명하다. 훈계적, 교훈적, 교조적인 성격과 설명적인 요소, 이를테면 “~하기로 하자”, “~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등의 작가가 직접적으로 거의 대부분을 설명하려는 부분들이 다소 거북할 수 있다.


또한 이라스의 배신과 관련해 그녀가 어떻게, 언제 메살라를 만났고 어떤 식으로 메살라에게 도움을 주었는지 등에 대해 설명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배신의 효과-파급력- 또한 부족하다. 벤허를 암살 시도에 노출시키기는 했지만 너무 쉽게 벗어났고 메살라와 이라스, 벤허가 만나는 장면에서 메살라와 이라스가 이미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면 그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좀 더 나왔어야 한다. 차라리 메살라와 벤허의 경주에서 벤허를 위기에 빠뜨리거나 이라스가 메살라에게 편지 등을 통해 벤허를 배신하는 내용이 더 나왔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중후반부, 그러니까 벤허의 복수 성공-메살라와의 경주에서 승리-이후부터 힘이 조금 빠진 느낌이 들더니 예수의 죽음에서 힘이 확 빠져버린다. 이라스와 메살라에 대해 간단히 넘어간 것도 아쉽고 예수의 부활도 다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을 감안하더라도 <벤허>는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앞서 말했듯, 이 소설은 역사 소설이자 종교 소설이다. “예수”라는 인물과 그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그 당시 관습이나 문화 등이 잘 고증되어 있다. 또한 예수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언행을 통해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무신론자인 나를 포함한 지구인-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도인, 유대인 등 종교적인 민족과 다른 비종교적인 현대 사람들을 뜻하는 단어-들에게 <벤허>는 기독교라는 종교와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한다. 전문적인 용어와 학술적인 접근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분위기와 느낌을 체험할 수 있다.




20년 넘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가 무신론자가 된 나에게 이 책은 매우 흥미로웠다. 내가 알고 있는 기독교(인), 그리고 내가 기독교인으로 살았을 때의 생각과 행동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기에 웃음이 났다. 또한 현재 기독교와 비교할 때 소설의 내용이 중요한 시사점을 가진다는 것도 그랬다.


벤허를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구원자, 왕으로 생각하고 개인과 민족적 욕망-혹은 열망-을 충족하려고 한 것처럼, 지금의 기독교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기복 신앙, 번영 신학으로 대변되는 현재의 기독교는 그럴싸한 종교적 수사-이를테면 “하나님의 뜻”, “성경적인”-를 앞세워 물질적인 성공과 사회적 지위 획득에 열을 올린다. 세속적인 욕망 때문에 예수의 사명이 “정치적인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잊는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교회)의 이익을 위해 여러 성경 구절을 들이밀고-이 구절들은 대게 제한적이고 지엽적인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고 자신들의 생각과 이익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된다-신앙과 믿음으로 포장한다. 이는 예수를 왕으로 세우고 그 곁에서 권력과 부를 거머쥐려던 벤허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낮은 자와 함께하며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규정한 나환자들에게도 사랑과 자비를 베풀었던, “평화와 선의, 사랑과 무저항”이 “가르침의 핵심”이었던 예수. 그런 그가 신도수 늘리기와 거대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에 목숨 거는,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중요시하고 이것이 곧 신앙과 믿음의 증표이며 사회적 성공이 교회에서도 인정받는-예수는 결코 사회적인 성공을 말하지 않았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현재의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지 심히 궁금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종교소설이라는 부분에서는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가, 복수라는 요소에서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예수를 주제로 했다는 점에서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생각이 났다. 어떻게 보면 이 세 작품을 합친 것이 <벤허>라고 할 수 있다. <벤허>와 함께 위의 세 작품도 보면 좋을 듯 싶다.


종교와 관련된 부분 이외에도 이라스-벤허-에스더로 이어지는 애정 관계도 재밌었다. 팜므파탈로 묘사되는, 클레오파트라도 한 수 접어줘야 한다는 이라스를 실제로 보고 싶기도 하다. 여기에 더해 종종 등장하는 통찰력 있는 문장들-인생과 사랑 등에 대한-도 인상적이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와 벤허, 동방박사들의 삶을 통해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점검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 내용만으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이해하기 힘들었던-그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그려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지구인들 또한 기독교라는 종교를 이해하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가치체계와 행동 양식을, 그들이 사는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그러므로 종교에 상관없이 한 번쯤 읽는 것이 이 서평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좋을 것이다”.




인상 깊었던 문장들

40p “사랑의 기쁨은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행동하는 것으로 드러나지요.”
50p “인간의 적은 인간이랍니다.”
293p 종교 문제에서 우리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많이 교류하고 나서야 받아들이는 것이 용이해진다. 우리는 모든 신앙은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법이지만 타 종교에 대한 예의 없이는 그러한 존경심도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는데 벤허도 지금 그런 마음이었다.
302~303p 그들은 감정의 고양, 아폴로 신이나 그가 사랑한 다프네,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 고요한 은둔이 필요한 철학, 위안을 얻기 위해 바치는 종교의식, 더 거룩한 의미에서의 사랑에는 맹세하지 않았다. 훌륭한 독자들이여, 이쯤에서 진실을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이 시대에 지구상에서는 위에 언급한 종류의 고양을 추구할 수 있는 민족은 모세의 법에 의거해 살아가는 히브리인들과 브라흐마의 법에 의해 살아가는 인도인 두 부류밖에 없었다. 오로지 그들만이 여러분에게 외칠 수 있을 것이었다. 사랑 없는 율법이 무질서한 사랑보다 낫다고 말이다.
게다가 공감은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화가 난 상태에서는 공감이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는 매우 자기만족인 상태에 있을 때 공감이 일어나기 쉽다.
404p 하지만 혁명의 과정은 늘 똑같아서 사람들을 혁명으로 이끌려면 두 가지가 필요했다. 우선 지지자들을 끌어모을 대의명분이나 영향력이 있어야 했고, 다음으로 목적이나 구체적 성과가 있어야 했다. 대체로 사람들은 악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이 있으면 잘 싸운다. 그러나 그 대의명분을 원동력 삼아 상처를 치유할 위안을 받고, 용기에 보상을 받으며, 죽음에 임박해서는 추억과 감사를 떠올릴 수 있는 등 빛나는 성과를 꾸준히 전망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잘 싸우는 법이다.
430~431p 아름다움은 그저 하나의 속성일 뿐이라고 깎아내리는 것은 현명하지도 정직하지도 않다. 아름다움에 무관심할 정도로 고상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피그말리온과 그가 사랑한 아름다운 조각상 이야기는 시적인 동시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일종의 힘이다.
533p 해야 할 일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580p 즉 진정한 회개란 하늘나라에 합당하도록 인성이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655p “인간의 궁극적 행복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이라네.”
659p 확실히 말하자면 벤허는 이라스의 존재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높은 가마에서 그녀가 내려다보기라도 하면 황급히 곁으로 다가갔다. 이라스가 말을 걸면 마음은 평상시와 다르게 고동쳤다.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에 들고 싶은 충동에 계속 시달렸다. 가는 길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더없이 평범해 보이다가도 이라스가 관심을 보이면 흥미롭게 변했다.(...) 단조로운 모래더미에 묻힌 석영 조각이나 운모 파편이 태양빛에 반짝거리기라도 하면 말 한 마디에 당장 달려가 그것을 주워다 주었다.
660p 사랑은 논리가 통하지 않고, 수학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라스가 자신의 매력을 마음껏 활용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내려 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라스는 벤허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것을 꿰뚫고 있는 눈치였다.
691p “물에 빠진 사람은 구할 수 있어도 사랑에 빠진 사람은 구할 수 없단다.”
699p 사람은 한 번에 여러 가지에 열정을 품을 만큼 마음이 넓은 경우는 흔하지 않다. 중요한 관심사 외에 다른 것에 대한 관심도 계속 살아남을 수는 있지만 처음만큼 강렬하지는 않다.
726p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이들을 아무리 동정해봤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막연히 이해하는 정도다. 하지만 불가사의하게도 아픔을 겪는 이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면 그들의 슬픔과 기쁨을 자기 일처럼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된다.
737p 예나 지금이나 자기 마음을 제대로 잘 모르는 젊은이는 교묘하게 에둘러 표현하는 습성이 있다.
738p 앞에서는 나사렛 사람에게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이 있다고 언급했었다. 그런데 이것을 보통 사람에게 확대시켜 보면 사람은 누구나 이중 본성을 갖고 있다. 즉 선천적 본성과 후천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 후천적 본성은 교육을 통해 몸에 밴 본성으로서 때로는 교육이 너무도 완벽히 이루어져 후천적 본성이 선천적 본성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753p 어떤 기분에 젖으면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자신을 속이기 마련이다.
760p 평화와 선의, 사랑과 무저항이 바로 나사렛 사람의 가르침의 핵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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