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협함과 성향 사이에서 고민에 빠지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작가의 길을 걷겠다고, 그게 내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어릴 때부터 독서와 글쓰기에 남다른 관심과 약간의 재능 - 글쓰기 대회에서 곧잘 상을 받곤 했으니까 - 이 있었고 종종 장래희망에 작가를 써 넣기도 했지만 진지하게 '작가'라는 직업을 생각해본 적은 고등학생 때가 처음이었다.
문학에 있어서 내 첫사랑은 '시'였다. 시가 왜 좋았는지 지금은 잘 생각이 안나지만 나는 시를 열렬히 사랑했다. 좋아하는 시들을 공책에 필사하면서 나름대로 시에 대한 감각을 키워나갔고 그 공책이 한 권이 되고 두 권이 될 때마다 시란 어떤 것이다 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시에 빠져있던 그 때의 나, 일명 문학소년이었을 당시에 내게 시는 '백석', '윤동주', '김수영', '파블로 네루다'의 시였고, 보들레르의 '취해라'와 같은 시였다.
문학소년이었던 고등학생은 이제 서른이 되었다. 첫사랑이었던 시는 이제 소설로 바뀌었고 그래서인지 시에 대한 애정 또한 이전만 못하다. 물론, 아직도 시에 대한 애틋함은 남아있어서 -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제법 오래 가듯이 - 틈틈이 예전에 좋아했던 시들을 필사하고 다시 곱씹어 보며 추억과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클럽 창작과 비평> 활동을 하면서 매주 과제를 하고 있다. 이번 주 과제는 <작가 조명>이라는 코너를 읽고 감상을 쓰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황인찬 시인이 나왔다. 해당 글을 읽으면서 글에 대한 감상보다 다른 상념에 잠겼다. 그 상념은 최근 고민하고 있는 내 문학적 성향에 대한 것이었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이었는지 어느 소설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사람들은 태어난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친숙함을 느끼고 고향처럼 여긴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잦은 이사로 인해 고향이라는 개념이 없고 현재 살고 있는 지역이 그나마 친숙하다고 느끼는 내게 이 내용은 일부분 공감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나는 지리 뿐만 아니라 사상 혹은 문화 또한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작가의 길로 돌아온 나는 문학론 혹은 문학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종의 개념, 틀, 기반이 필요했다. 많은 작가들이 토로하듯, 작가들은 자신들이 선호하고 영감을 받는 작가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작가들의 작가'라는 표현도 있을 정도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 교과서로 삼고 싶은 작가와 작품들이 있다.
언젠가 닮고 싶고 영감을 받은 작가들과 작품들을 정리했던 적이 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등 작가들과 작품들을 써 내려가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해외 작가들에게만 '꽂혀있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한국 작가와 그들의 작품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선듯 손과 마음이 가지 않았다고 해야할까. 때문에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작품들 중에 읽은 작품이 거의 없다. 강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읽다 중단했던 <7년의 밤> - 너무 읽기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 뒀다 - 이 그나마 읽어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비단 소설만이 아니다. 소설에 비해서는 그나마 낫지만 - 물론 소설 중에서도 황순원의 <소나기>는 정말 좋아한다. 어쩌면 유일하게 좋아하는 한국 소설일지도? - 시 또한 일정 부분 해외 시인에게 더 편향되어 있다. 게다가 시에 대한 나의 선호를 들여다보면 좀 더 다른 문제가 드러난다. 그것은 그나마 좋아하는 한국 시들이 대게 1980~90년 이전의 시라는 점이다.
무엇이 예술인가 라는 질문은 오래도록 지속되어 온, 해묵은 질문이다. 시대에 따라 예술이 아니었던 것이 예술이 되기도 하고 후대에는 그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미술사에서 보면 인상파의 그림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내게 최근의 시들을 '시'가 아니다 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어도 최소한 끌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여기서부터 나의 자기검열, 혹은 자아비판이 시작된다. 혹시나 내가 문화사대주의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편협한 사고에 빠져있는 건 아닐까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물론, 문화사대주의라고, 편협함의 산물이라고 지적하는 물음에 대한 반박도 있다. 단지 성향 차이라고, 어디선가 읽었던 구절처럼 그저 다른 문화를 친숙하게 느끼는 것일뿐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그럴듯한 근거도 제시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예를 들면서 그가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챈들러, 프란츠 카프카 등의 서구 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로 인해 그의 작품들 또한 서구적임을, 이국적이라며 강변하는 것이다.
나는 사뭇 다른 이 두 개의 소리 가운데서 고뇌에 빠진다. 회의적인 성격과 원체 생각이 많은 스타일 답게 어느 한 쪽에 무게를 둔다해도 늘상 반대 쪽, '가지 않은 길'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명확하게 답을 낼 수 없는 이런 문제는 내게 더욱더 크고 무겁게만 느껴진다.
얼마 전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나는 한국적 정서에 잘 맞지 않는 지도 모르겠다고. 내 인생 여정을 살펴보니 일견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개성이 강한 성격, 자기 주장과 자기 표현 욕구가 강함, 내향적이고 개인주의적임, 잦은 이사를 경험하며 생긴 담백한 인간관계, 가정 폭력 경험으로 인한 가부장주의 및 밀착된 가족적 분위기에 대한 거부 - 가족이라고 해서 가족 구성원의 자유나 의사를 침해해서는 안된다 등 - . 집단주의와 가족주의 - 특히 유교적 가족주의 - 에 대해 거부감 - 어쩌면 혐오감일지도 모르는 부정적 감정 - 이 내 정체성 중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정서가 묻어나올 수 밖에 없는 한국 문학을 피해가는 게 아닐까?
여기에 더해 감상적, 감성적인 것에 대한 거부도 있다. 흔히 감성글, 감성글귀라고 인기를 끌고 있는 문학적 형태들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따지자면 하드보일드 스타일, 단문 위주의 중언부언하지 않는, 현란한 수사와 묘사 없이 담백한 문장, 의미가 비교적 분명하고 문장 구조 또한 단순한 글을 선호하는 나에게 감성글은 참기 힘든 고문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런 부류들, 비록 내가 선호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들을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내게 맞지 않는 것일뿐, 사람마다 각자의 선호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니까.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한국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외국인 중에서 우리나라 문화에 심취해 있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글을 쓰다보니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고뇌에서 자유로워졌다. 사실 이런 고뇌는 몇몇 사람들에게 내 문학적 취향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 받았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내가 한국 문학보다, 한국적인 것보다 외국 문학에 끌린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놓고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사람이 한국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 다는 걸 이상하다고 여기는 듯 했다. 그 때는 스스로도 나의 성향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기에 그런 말들이 버겁게만 느껴졌다. 이제는 그런 질문을 받아도 웃어 넘길 수 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