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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ubris

돌아온 아카시아의 계절

그 향기로 되살아나는 기억에 대하여

by Argo

내가 좋아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인 이육사.

독립운동가였던 그의 시에는 절절한 울림이 있기에 좋아할 수 밖에 없었다.

<청포도>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시간 보내는 동안 어느새 봄이 찾아왔고 날씨도 제법 더워서 초여름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문득 ‘아, 이맘 때면 아카시아 꽃이 필 무렵인데’라는 생각이 며칠 전부터 머릿속을 맴돌았다.


1주일 전부터 집 근처에서 상수도 공사를 시작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작한 공사는 점점 집 가까이 다가왔고 결국 통행로 한 쪽이 공사로 인해 막혔다. 평소 자주 가던 길 대신 다른 길로 가다가 익숙하고 반가운 향기를 맡게 되었다. 마침내 아카시아 꽃이 핀 것이다.


내 동네 오월은
아카시아가 피어 나는 시절


세상에는 많은 향이 있고 여러 종류의 향을 좋아하는 내게 아카시아는 특별한 향이다. 본래의 향기도 아름답지만, 내가 행복했던 시절, 짧았던 유년 시절의 행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약 10여년 간 살았던 부천에는 원미산이라는 산이 있다. 지금 사는 동네만큼은 아니지만 아카시아가 제법 많았다. 그래서 4월에서 5월 무렵에 그 산에 가면 아카시아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나 외삼촌의 손을 잡고 산에 오르던 기억이 희미하게 난다. 20년도 더 지난 시절의 기억들은 지나간 세월 속에 선명함을 잃어버렸지만, 그때의 따스한 느낌은 오히려 더 선명하고 뚜렷하게 남아있다.


인간의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지워지고 재구성되며 그래서 객관적 사실과 멀어질 때가 많다. 하지만 그 기억을 창조한 사건이 만들어낸 감정은 쉽게 잊혀지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는 경우가 있다. 내 경우에는 매년 찾아오는 아카시아 향기가 그 감정을 보존하고 더 깊게 만든다.


기억은 지나간 사건, 순간에 대한 인식이다. 달리 말하면 기억은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 것이고 그 시간 속에 존재하는 자신,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행위다. 기억이 없다면 인간은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표류하는 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말 것이다.


나는 매년 이맘 때 쯤 콧속을 간질이는 아카시아 향기를 통해 과거의 나와 과거에 내가 경험했던 사건, 행복의 감정을 떠올리며 내 정체성과 그 연속성을 돌아본다. 나에게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고 그 때 느꼈던 찬란함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며 살아가도록 한다는 생각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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