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다는 것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은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생각나면 들러봐요 조그만 길모퉁이 찻집
아직도 흘러나오는 노래는 옛 향기겠지요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생각나면 들러봐요 조그만 길모퉁이 찻집
아직도 흘러나오는 노래는 옛 향기겠지요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 산울림,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요즘 엄마가 흥얼거리는 노래,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엄마와 나는 성격 차이 - 극 외향과 극 내향 - 만큼이나 노래 취향도 차이가 크다. 이매진 드래곤스를 비롯해 포스트 말론, 빌리 아일리시 등 엄마의 표현대로라면 "시끄러운 노래"를 좋아하는 나와 달리 노사연, 박인희, 우순실 등을 좋아하는 엄마. 한국 가수들의 노래를 거의 듣지 않는 내가 그나마 좋아하는 김광석은 엄마 취향이 아니란다. 고로 우리의 음악적 취향은 평행선을 달린다.
하지만 향을 감싼 종이에서 향 냄새가 나듯 한 집에서 살다보면 서로 영향을 받는다. 나는 내 방에서, 엄마는 엄마 방에서 각자의 노래를 틀어 놓지만 문 틈 너머 혹은 서로의 방을 왔다갔다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 노래를 듣게 된다.
그러다보니 내 취향은 아니더라도 상대방의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아, 이것이 바로 '노출효과'라는 걸까. 그다지 끌리지 않았던 사람도 자주 보다보면 눈이 간다는 말처럼 딱히 좋아하진 않지만 자주 듣다보니 나도 엄마도 무의식적으로 그런다.
예전에 썼던 글에서 우순실의 <우산이 없어요>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고 했었다. 이번에는 산울림의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가 그렇다. 멜로디와 다르게 다소 슬픈 가사가 인상적인 이 노래는 듣고 있노라면 절로 '옛 생각이' 나게 하는 노래다. 슬프다기 보다는 애수, 기쁨과 슬픔의 공존이랄까.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에 나오는 문장처럼 말이다.
지나가 버린 행복을 회상하는 것, 지나가 버린 괴로움을 회상하는 것, 우리를 속박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먼 과거 속으로, 수년 전에 죽은 아들의 무덤 앞에 무너지는 어머니처럼 영혼이 무너지는 먼 과거 속으로 조용히 침잠하는 것, 어떤 희망과 소망도 조용한 침잠을 방해하지 못하는 회상, 그것을 사람들은 아마도 애수라고 부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애수 속에는 행복이 있다. 그런 행복은 오직 사랑과 고민을 뼛속 깊이 체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시집올 때 머리에 썼던 면사포를 딸에게 씌어 주면서 오래전에 사별한 남편을 생각하는 어머니에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보라.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여인이 마지막 날에 사랑하는 남자에게, 어렸을 때 받아 이제는 다 시들어 버린 장미꽃을 되돌려 주었다면 그 장미꽃을 받아든 남자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어머니도 남자도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눈물은 고통의 눈물도 기쁨의 눈물도 아니다. 그것은 헌신의 눈물이다.
-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
오늘은 낮에 서울에 사는 형이 왔다 갔다. 코로나 위험 지역인 대전을 기어코 오는 형이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됐다. 형을 보내고 이런 저런 일을 하다 어김없이 저녁잠을 자고 야식인듯 야식 아닌 저녁 식사를 했다. 산책을 하면서 엄마의 흥얼거림과 스쳐지나가듯 들었던 산울림의 노래를 처음으로 직접 재생시켰다.
한적한 길 위에는 내 발자국 소리와 가로등의 그림자만이 놓여져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통통 튀는 멜로디와 담백하고 맑은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노래가 끝날 무렵, 나는 문득 '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운칠기삼'. 살면서 '노력이 중요하다'에서 점점 '결국 운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어떤 미국 코미디언이 졸업사(1)에서 "모든 것은 운이다"라고 했던 말처럼, 내가 태어난 것도 - 그 많은 정자 중에서 단 하나의 정자만이 수정에 성공했으니까 - 사회경제적 배경, 지금에 이르기까지 결국 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운이 전부는 아니다. 매순간 최선을 다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노력했던 건 분명히 있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에도 운이 전부라는 것이 아니라 운이 작용하는 범위가 생각보다 크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내 운은 어떤 것일까. 우울의 시기에는 내가 불운하고 또 그래서 불행하다 - 불운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꼭 불운하다고 해서 불행한 건 아니다 - 는 생각을 많이 했다. 조울증이 발병한 것도, 그래서 너무 많은 것들이 안 좋은 쪽으로 변해버린 것도 불운이다. 조금씩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때의 트라우마가 없었다면 조울증이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텐데(2) 라며 불운함을 곱씹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는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게 됐다. 조울증, 불운한 사건인 건 맞다. 하지만 지금 이 정도로 회복된 것,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운이 좋은 거다. 비록 아빠 - 이혼하고 나서는 완전히 남남처럼, 번호도 차단하고 살고 있지만 - 는 내 조울증에 관심이 없었고 치료에 1도 도움이 되지도 도움을 주지도 않았지만 다행히 엄마는 내 조울증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온 힘을 다해 내 재활을 도왔다. 한국에서 대다수의 정신질환자들이 가족의 보살핌보다는 냉대와 무시를 받고 방치되는 것이 현실인데 이 정도면 정말 운이 좋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형은 내 상태와 조울증에 대해 잘 모르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다. 조울증으로 인해 인생계획이 어그러졌지만 덕분에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선택할 수 있었으니까, 이것도 운이 좋은 경우다.
내가 좋아하는 고사성어 중에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다. 화가 복이 되기도 하고 복이 화가 되기도 한다는 뜻의 고사성어에는 '인생은 알 수 없다'는 의미와 운이라는 것도 어쩌면 상대적인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기도 하고 불운인지 행운인지 따지기보다 그저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해 살다보면 나중에서야 알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니 나는 '슬픈 눈으로' 나와 내 현재, 그리고 지나간 과거를 바라보지 않기로 했다. 과거의 불운이 지금의 행운이 되기도 하고 지금 행운이라 해서 이것이 나중에도 행운일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알란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소중한 순간이 오면 따지지 말고 누릴 것.
우리에게 내일이 있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소중한 순간, 지금 내가 온전히 누려야 할 현재를 놓치지 말아야겠다.
(1) 팀 민친의 졸업사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Mp4xXZ5Jbdc&list=PL3iIx8fhaH2JxW7-ZMpVQcwh6Ga7c3aRf&index=11&t=0s
(2) 조울증의 발병 원인은 다양하다. 주로 생물학적인 메커니즘에서 원인을 찾지만 대다수의 환자들이 어린 시절에 학대나 불우한 가정사 등 심리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건, 큰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사건을 경험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때문에 생물학적인 문제 - 신경전달물질 이상이나 뇌의 문제 - 만으로 조울증이 발병한다기 보다는 생물학적인 문제가 환경적인 요인과 맞물려졌을 때 발병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