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부부의 세계>에 대한 단상
1.
요즘 엄마가 <부부의 세계>에 빠져있다. 15화, 16화를 도대체 몇 번씩 보는 건지 모르겠다. 오늘, 아니 어제도 15화와 16화를 또 봤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오가며 드라마를 조금씩 봐야했다.
2.
<부부의 세계>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들었다. 원체 세상사에 관심이 적기도 하고 - 아예 없는 건 아니다 - 특히 연예 쪽은 더 그래서 요즘 누가 핫한지, 어떤 영화가 상영되고 어떤 드라마가 뜨는지 모른다. 케이팝에도 관심이 없다보니 요즘 대세인 아이돌도 모른다. 그러니 당연히 <부부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도 종영한지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엄마 옆에서 꼽사리껴서 조금 본 결과 흥행할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사랑, 결혼, 불륜, 이혼... 내가 지금까지 본 드라마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저 네가지 키워드로 압축시킬 수 있다. 사랑해서 이태호와 지선우는 결혼을 했고 그러다 이태호의 불륜으로 이혼에 도달한다. 그 과정의 다이나믹함이 시청자들을 매료시킨 것 같다.
4.
언듯 보면 이 드라마는 한국의 막장 드라마의 계보를 잇는 것처럼 보인다. 자극적인 소재들, 남편의 불륜으로 이혼을 한 아내의 복수극으로 볼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 지선우는 이태호에게 복수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끝내 파멸에 가까운 결말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드라마를 단순한 막장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까?
5.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 부분적으로 보긴 했지만 - 막장 드라마의 탈을 쓴 명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한 자극적인 요소가 있지만 사랑과 결혼, 불륜과 이혼에 대해 상당히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당사자들의 심리를 잘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대본과 함께 김희애의 연기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6.
사랑은 죄가 아니다. 나는 결혼 생활 중에서 남자와 여자 모두 충분히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 기존의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결혼을 계약 - 신성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은 딱 법률적인 계약의 의미 -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운 계약을 맺으려면, 즉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면 이전의 계약을 파기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이태호가 다경이(성을 몰라서 그냥 다경이라고 부름. 예뻐서 그냥 다경이라고 할래!)와 사랑에 빠진 것에 대해서는 '그럴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하지만 결혼이라는 큰 틀에서 볼 때 그의 행동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며 무책임한 행동이다.
7.
엄마가 15화와 16화를 자주 보다보니 이 두 화는 거의 다 봤다. 다른 화를 제대로 보지 않아서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15화와 16화는 상당한 인사이트를 담고 있다. 이혼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고 등장인물의 심리 분석을 할 수 있는 단서들이 제공되기 때문이다.
8.
15화를 보면 지선우는 다경이에게 이태호의 실체에 대해 알려준다. 다경이에게 프로포즈할 때 썼던 음악이며 사준 향수, 속옷 등등 모든 게 지선우와 똑같았다. 명백해 보이는 - 적어도 시청자 입장에서는 - 증거 앞에서 다경이는 인정하는 게 아니라 부정하고 끊임없이 반박하려고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며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다경이는 지선우의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혹은 진실인 줄 알면서도 계속 부정한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되면 올바른 선택을 할거라고, 각자의 이성을 사용할 것이라는 합리적인 기대를 하지만 온갖 증거와 과학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신념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9.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의 믿음을 지키려는 행동,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나는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경이는 이태호를 사랑했다(=사랑하기로 선택했다). 그리고 명확하고 구체적인 행복한 가족에 대한 꿈이 있었다(15화 초반에 나오는 걸로 기억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경이가 지선우의 말을 부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기가 지선우의 "대용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건 그녀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뜻이고 더 나아가 완벽주의적인 성격상 자기 존재 자체의 문제, 정체성에 큰 손상을 입히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10.
보통 사람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힘들어 한다. 하지만 유독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잘못을 인정하는 행위가 자기 존재의 무가치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잘못을 지나치게 개인적인 것으로, 사형 선고에 준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들은 잘못을, 현실을 외면하고 거부하며 부정하려고 한다.
11.
15화에서 지선우는 다경이에게 현실을 알려준다. 너와 나, 지선우와 다경이라는 사람은 매우 닮았다고. 그렇기에 자유로운 냄새를 풍기는 이태호에게 빠진 거라고. 나는 이 부분에서 작가에게 감탄했다. 아마 이 부분이 없었다면 나는 이 드라마를 흔하디 흔한 막장 드라마라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태호의 심리를 명확하게 드러낸 이 부분 때문에 이 드라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12.
지선우가 말했듯, 다경이는 지선우와 매우 닮았다. 그리고 이 두 사람과 이태호는 거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성격이 다르다. 아마 이 점 때문에 이태호도 그리고 두 사람도 서로에게 끌렸을 것이다.
13.
서로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만나는 것이 좋다, 나쁘다를 말하고 싶지는 않다.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를 만나도 잘 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다른 성격을 가진 지선우와 이태호, 다경이와 이태호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성격의 차이가 아니라 트라우마이며 명백한 심리적인 문제에 해당한다.
14.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스캇 펙은 성격 장애와 신경증(노이로제)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신경증 환자들은 문제가 생기거나 무언가 잘못되었을 경우 그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는다. '~해야 했어' 같이 내가 문제의 원인이기 때문에 자책하고 죄책감을 갖는다. 반면에 성격 장애 환자는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쉽게 말해 매사에 남탓한다는 것이다. 15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태호는 장인에게 뺨을 맞으며 완전히 몰락한다(완전 사이다 스윙... 한 여름 소나기처럼 시원!). 망연자실해 있는 그에게 지선우가 찾아오고 그는 모든 게 너 때문이라고, 너를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이태호에게 지선우는 뼈때리는 명언을 날린다. 당신을 망친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고.
15.
뭔가 더 쓰려고 했는데 잘 안나온다. 내일 이어 써야지.
16.
드라마 보면서, 그리고 글을 쓰면서 전 아빠 - 아빠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서 전 남편이라는 용어를 차용해봤다 - 생각이 났다. 이태호랑 은근 비슷한 점이 있어서 그런지도. 어쨌거나 이태호 극혐. 그리고 지선우랑 다경이도 딱히 좋다고는 못하겠다. 엄청 불쌍하다, 정말 안됐다고 말하기엔 좀... 드라마에서 준영이가 제일 안타깝다. 내가 경험해봐서 알지, 암 그렇고 말고. 나는 전 아빠가 부정적인 존재라 그나마 마음 정리하는데 많이 힘들지는 않았는데 준영이는 이태호랑 좋은 기억이 많아서 정리하기 힘들었을 듯. 나에게 잘해준 아빠 vs 엄마를 배신한 아빠 라는 양극단이 존재하는 거라...